2003년 9월호

현대차는 왜 항상 시끄러운가

‘선명성’에 짓눌린 勞, ‘시장’에 발목잡힌 使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3-08-22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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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차 파업사태가 47일 만에 마무리됐다. 노사는 악수를 나눴지만, 애써 지은 웃음 한 구석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 이번에도 ‘수술’은 없었다. 그저 ‘봉합’만 있었다.
    • 그래서 또 ‘루즈-루즈(lose-lose) 게임’이 되고 말았다.
    현대차는 왜 항상 시끄러운가
    “현대자동차는 전경련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민주노총의 한 관계자가 농반진반으로 던진 말이다.“노사 모두 파업은 각오했었다. 어차피 휴가철인데다 재고 차도 처분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파업이 오래가리라곤 예상하지 않았다. 현대차 노동조합의 파업찬반 투표에서도 사상 최저의 찬성률(54.8%)이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느닷없이 주5일(40시간) 근무제가 끼여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전경련 등 재계가 이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바람에 파업이 장기화한 것이다.”

    현대차를 비롯한 상당수 대기업들은 1996년 무렵부터 토요 격주 휴무제를 도입, 주당 근로시간을 44시간에서 42시간으로 단축했다. 더욱이 현대차 노사는 관련법이 개정되는 대로 여기에서 2시간을 더 줄여 주 40시간 근무제를 실시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다. 그러니 “법 개정 전에 주5일 근무를 내주면 절대 안된다”는 재계에 등을 떠밀려 ‘대리전’을 치르고 1조4000억원대의 손실을 입은 현대차로선 가슴을 칠 노릇이었다.

    자동차회사 노조, 교섭력 막강

    현대차 노조가 노동계를 대리한 것은 자동차산업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자동차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대개 자동차회사 노조가 가장 강경한 기조로 노동운동을 선도한다. 대량생산체제라 근로자의 수가 워낙 많은데다, 일부 라인만 멈춰서도 생산이 중단되는 일관 조립생산라인의 특성상 파업효과가 크고 교섭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계에서도 전미자동차노조(UAW)의 협상패턴이 다른 산업분야로 전파되는 게 일반적이다. 국내 최대 규모인 현대차 노조도 1987년 이후 민주노총의 최선봉에 서 왔다.



    ‘고임금과 기득권을 성역화한 노(勞), 경영권마저 내주고 백기투항한 사(使)’.

    파업기간 내내 현대차에 빗발치던 비난은 지난 8월5일 노사가 2003년 임금 및 단체협상(이하 임단협)을 타결짓고 합의문을 공개하자 극에 달했다. 그야말로 ‘각계’에서 성토를 쏟아냈다. 특히 회사가 노조의 일부 경영참여 요구를 받아들인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생산방식 유연성 미확보

    하지만 노조의 경영참여와 관련된 내용은 이번 임단협에서 신설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2001년 임단협에서 합의된 내용을 좀더 구체화했을 뿐이다. 가령 2001년 임단협에선 차종(車種) 이관, 사업 확장, 합병, 공장 이전, 일부 사업부의 분리 및 양도 등이 필요할 경우 ‘계획수립 즉시’ 노조에 통보하도록 했으나, 올해 임단협에선 계획수립 90일 전에 통보하기로 명문화했다. 또한 외주처리, 하도급, 용역전환 등의 계획을 수립할 경우 ‘계획이 확정되기 전’에 노조에 통보하기로 했던 것도 앞으로는 90일 전에 통보하게 했다( 참조).

    이번 임단협에서 노조가 요구한 노조 대표의 이사회 발언권 행사, 사외이사·감사 추천, 인사·징계위원회의 노사 동수 구성 등 보다 적극적인 경영참여 방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현대차 노사 합의사항의 경영참여 부분은 대부분 노동자들의 고용조정과 관련된 내용”이라며 “이처럼 고용과 직결된 사항에 대해 노사 합의를 거친다는 고용안정협약은 이미 많은 사업장에 도입돼 있다”고 지적했다.



    실업자를 보듬는 사회안전망이 미비하고 재취업이 어려운 우리 여건에선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노동자들의 최우선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연구위원은 “노조의 경영참여보다는 근로자들의 완전고용을 보장한 것이 이번 임단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도 이미 몇년 전부터 언급되어온 내용이다. 2001년 임단협에서는 ‘회사는 현재 재직중인 정규인력의 고용을 유지하고 일방적으로 정리해고, 희망퇴직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그래놓고 이번 임단협에선 해외공장 설립과 관련한 사항에 ‘국내공장에 재직중인 정규인력은 58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아울러 국내공장의 생산물량을 올해 수준으로 유지하고, 수요부족을 이유로 국내공장을 일방적으로 축소·폐쇄할 수 없게 했다. 미국, 인도, 중국 등 해외공장 증가로 국내 고용보장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미래의 불안요인까지 내다본 노조가 이에 대비한 안전장치까지 박아넣은 것이다.

    조성재 연구위원은 “회사가 완전고용 보장을 내주면서 그 대가로 직무순환과 다기능화 등 생산방식의 유연성을 얻어내지 못한 것이 문제”라며 아쉬워했다. 그 결과 가뜩이나 현대차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꼽혀온 작업장 운용의 경직성이 더욱 심화되게 됐다는 것이다.

    시장 대응 순발력 떨어져

    차의 크기, 차종, 사양(仕樣)에 대한 소비자의 다양하고 급변하는 기호를 충족시키려면 생산라인의 유연한 적응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장상황을 주시하면서 적게 팔리는 차의 생산라인을 축소하거나 폐쇄하고, 많이 팔리는 차 라인의 인력과 설비를 확충하는 등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차의 경우 차량의 수요 변화에 따라 생산라인의 신설·폐쇄, 생산라인 간의 인력·설비 전환배치, 라인 스피드 조정 등을 하려면 일일이 노동조합과 합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작업장 운용이 그만큼 경직돼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A라인은 주문이 넘쳐 잔업과 특근을 밥 먹듯하고 B라인은 일거리가 없어 파리를 날려도 회사 마음대로 B라인의 인력과 설비를 A라인에 투입하지 못한다.

    A라인 근로자들은 “일감이 몰릴 때 바짝 일해서 잔업·특근수당을 챙겨야 한다”며 이에 반대하고, B라인에선 “일이 하나도 없어도 기본수당의 70%는 나오는데, 왜 거기 가서 마음고생을 하겠냐”며 반대한다.

    이는 우리나라 제조업 작업장의 미묘한 연고주의와 위계질서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라인으로 전환배치되면 한동안 ‘왕따’ 신세가 되기도 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그쪽 라인의 고참들로부터 잔소리를 들어가며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근로자들은 이를 수평이동이 아니라 수직적 라인의 하향이동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술적으로는 두 달이면 가능한 라인 이동이 보통 6개월 이상 시간을 끌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EF쏘나타 택시 생산라인을 아산공장에서 울산 5공장으로 옮기는 데는 6개월, 2000년 트라제 라인을 울산 2공장에서 4공장으로 이관하는 데는 9개월간의 협상을 거쳐야 했다.

    이런 형편 때문에 안 팔리는 차는 재고가 늘어나고, 잘 팔리는 차는 주문하고 몇 달씩 기다려야 차를 인도받는 상황이 빚어진다.

    한화증권 기업분석팀 안수웅 연구위원은 “생산방식이 유연하지 못한 현대차와는 대조적으로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경우 조업단축에 따른 일시 해고와 라인 폐쇄도 일상화돼 있다”고 설명한다. 1989년 현대차가 캐나다에 설립한 연 10만대 생산규모의 브르몽 공장은 판매량이 연 2만대 수준까지 떨어지자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불러달라’는 조건으로 근로자들이 일시 해고를 자청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주요 자동차회사들은 직원들에게 전체 생산공정을 돌며 일을 배우게 해 다기능공으로 만든다. 이때문에 시장 상황에 따른 신속한 전환배치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들 회사는 자동차 시장이 아무리 공급과잉 상태라 해도 공장 가동률이 100%에 가깝다. 잘 팔리는 차는 공급과잉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왜 항상 시끄러운가

    임단협 타결후 파업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온 현대차 근로자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놀고,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버는 노동자’.

    임단협 후 현대차 노조는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현대차가 기득권에 손대지 않고 주 5일 근무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근로자들의 휴일·휴가일수가 연 170일로 늘어나 미국(121∼163일), 일본(129∼139일), 독일(137∼140일), 프랑스(145일)보다 훨씬 많고, 연봉이 6000만원(15년차 생산직 근로자 평균)에 이르게 됐다는 보도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0일의 휴식과 6000만원의 연봉은 결코 함께 손에 쥘 수 있는 떡이 아니다. 1년 휴일·휴가일수가 170일이라는 것은 104일의 토·일요일과 17일의 법정 공휴일, 평균 21일의 연월차 휴가, 여름·설·추석휴가, 경조휴가 등을 모두 쉴 경우의 얘기다. 만일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씩 일하면서 휴일과 휴가를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 쉬었다면 연봉은 30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현대차 노조에 따르면 이번 임단협으로 임금이 오르기 전까지 연봉 4000만원을 받던 13년 근속 근로자의 본봉 기준 연봉 평균은 2688만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1312만원은 잔업·특근수당이었다. 잔업·특근수당이 연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참조).

    더구나 회사측이 주장하는 연봉액수에는 자녀 학자금, 교통비, 휴가비, 성과금, 퇴직금 전환비용 등도 포함돼 있다.

    실제로 현대차 울산공장 근로자들은 하루 평균 2시간 이상을 연장근무한다. 이들은 지난해의 경우 한 달 평균 48시간의 평일 연장근무를 했고, 83시간의 휴일근무와 33시간의 심야근무를 했다. 연 평균 근로시간은 2770시간. 우리나라 제조업 평균 2400시간은 물론 일본 토요타의 1900시간, 독일 자동차회사 평균 1600시간보다 훨씬 많다. 조립라인의 단순 반복노동이라 성취감이 낮은 데다, 하루 2시간 이상의 초과근무와 매주 주야 맞교대 근무가 일상화해 이들의 노동강도는 대단히 높다.

    “한약 먹어가며 버틴다”

    현대차 노조의 한 조합원은 “지난해 1년 동안 18명이 과로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만도 8명이 죽었다. 한약을 먹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우리더러 ‘귀족 노동자’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다만 국내 제조업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는 데다, 울산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고, 일에 쫓겨 돈을 쓸 시간이 없기에 크게 쪼들리지 않고 살아갈 따름”이라고 했다.

    조성재 연구위원은 “연봉이 웬만한 수준까지 올라온 만큼 노조는 이번 임단협에서 총액임금은 동결하고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삶의 질을 올리는 방향전환을 모색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즉 총액임금은 묶어두고 시간당 임금을 인상하되 사측에는 생산성 향상 조건을 내걸어 타협점을 찾는 게 바람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액임금은 총액임금대로 올리면서 근무시간은 주 40시간으로 줄이는 바람에, 잔업과 특근을 안 하면 회사도 생산목표를 못 맞추고 근로자도 만족스런 임금을 못 받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1998년의 기억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번 임단협 결과를 놓고 현대차 노사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월권이다. 중앙대 이병훈 교수(사회학)는 “공공부문도 아닌 민간기업 노사가 임단협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 회사 사정”이라고 말한다.

    “기업의 단체협상 결과는 그 시점에 노와 사 중 어느 쪽의 교섭력이 더 우위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은 현대차가 잘 팔려 돈을 많이 벌고 있기 때문에 노조의 교섭력이 회사를 앞선다. 반면 1998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노조가 불리한 상황이라 사측에 많은 것을 양보했다. 게다가 노조의 경영참여, 근로시간 단축, 주5일 근무제 등은 우리 사회가 장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현대차 노사갈등은 그 과도기에서 두 ‘대표선수’가 겪는 진통으로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현대차는 지난 10년 동안 단 두 해를 빼놓고는 매년 임단협 때마다 부분파업 혹은 전면파업을 벌였다. 결국은 노사가 어떤 형태로든 합의에 이르렀지만,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방치한 채 드러난 상처를 봉합하는 데만 급급했다. 현대차 노사 간에는 왜 이렇듯 끊임없는 갈등 속에 ‘루즈-루즈(lose-lose) 게임’이 반복되는 것일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의 무더기 정리해고 사태를 그 배경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는 경영상 해고를 합법화한 후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해고사태로, 구조조정의 ‘시금석’이었던 만큼 재계와 노동계의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전개됐다.

    38일간 전면파업이 이어지면서 울산은 전시(戰時)를 방불케 했다. 노사 간의 린치 사건도 잇달았다. 거듭된 협상 끝에 최종 해고 규모는 270여 명으로 줄었지만, 희망퇴직과 무급휴직 등을 포함하면 결국 1만명 이상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후 노사협상에선 고용안정이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미래가 불안해진 근로자들은 정리해고는 물론 일상적인 라인 전환배치까지 거부하고 나섰다. 회사에 대한 근로자들의 주인의식도 크게 줄어 당장의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데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고용조정 당시 유럽식의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일정기간 고통을 분담하거나, 미국 자동차회사 빅3(GM·포드·다임러크라이슬러)와 UAW의 협약처럼 일시 해고제를 활용하고 일정 시점까지 복직되지 않을 경우 자동적으로 해고되는 절차가 있었다면 후유증이 이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현대차 노사는 1996∼97년 임단협 교섭에서 무분규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가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7년 초 노동법 개정 관련 총파업을 주도하자 회사측은 임단협 직후 사측 노사업무담당팀을 강성 인사들로 전격 교체했다. 이들이 ‘현장기초질서확립 캠페인’을 벌이며 현장 조합원들을 자극하는 가운데 그해 하반기 노조 집행부 선거에서는 가장 강성으로 알려진 ‘민투위’ 출신 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1998년의 고용조정 관련 노사분쟁은 이처럼 강경한 노와 강경한 사가 정면 충돌하면서 빚어졌다. 그래서 근로자들은 당시 회사측이 외환위기로 인한 잉여인력 정리 차원이 아니라 ‘노조 손보기’를 겨냥해 대규모 고용조정을 밀어붙였다는 의혹을 품었다.

    또한 경영진은 책임을 지지 않고 근로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했다는 배신감에 회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고조됐다.

    현대차 관계자는 “1998년에 조합원들에게 진 ‘빚’이 지금껏 경영진이 노사관계를 풀어가는 데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생산량 지상주의의 그늘

    우리나라는 노사관계의 제도화·공식화 정도가 낮기 때문에 불황이냐 호황이냐에 따라 노사의 역학관계가 달라진다. 불황기에는 고용조정 가능성 때문에 노가 불리한 지위에 서고, 호황기에는 노사갈등으로 인한 생산차질을 피하기 위해 사의 입지가 위축되는 것.

    특히 호황기의 회사가 생산량 최우선주의에 경영의 포커스를 맞출 경우 작업현장의 관리·감독자들은 노사갈등 소지를 없애고 잔업과 특근을 탈 없이 수행하기 위해 노조 대의원 들에게 통사정을 하는 광경도 빚어진다고 한다.

    현대차도 비슷한 상황을 맞았다. 현대차는 1999년부터 호황기에 돌입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 대우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파행 경영으로 내수시장에서도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게 됐다. 현대차 노조도 이때부터 교섭력에서 회사를 리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줄곧 우위를 지켜왔다.

    특히 1999년은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취임한 해다. 최고경영진부터 가시적인 실적과 성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한 2000년 ‘왕자의 난’으로 현대차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후 회사가 신속히 안정기조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회장이 취임한 후 현대차는 한 번도 불황다운 불황을 겪어보지 않았다. 생산량 지상주의가 ‘상식’이 된 것은 불문가지. 현대차 관계자의 말이다.

    “현대차 최고경영진은 방에서 생산라인 가동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있다. 어느 라인이 멈춰서서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면 즉각 책임자를 불러 올린다. 생산이 중단되면 관리자든 감독자든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이라 현장에선 노조원들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웬만하면 들어주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인사·노무관리의 원칙이 흔들린다. 노사문제에 관한 한 임원에서부터 중간관리자까지 모두 두 손 놓고 정몽구 회장 한 사람만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현장에서 영(令)이 서겠는가.

    현대차는 왜 항상 시끄러운가

    지난해 4월16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미 현지공장 기공식.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정몽구 회장.

    이건 옳지 못하다. 생산목표 달성이 아무리 중요해도 노조가 지나친 행동을 하면 이에 대해 소신껏 ‘노(No)’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정은 임단협 테이블에 그대로 반영된다. 노조측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당당한 목소리를 내며 이니셔티브를 쥐는 데 비해 회사측 참석자들은 운신의 폭이 좁다. 대(對)노조 전략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단기적인 대처에 급급한 형편이다. 처음엔 노조의 요구에 대해 무조건 “안된다”고 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생산중단’이라는 가공(可恐)의 무기를 지닌 노조의 힘에 밀려 결국 다 내주고 만다.

    이처럼 일단 급한 불을 끄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줬다가 나중에 작업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갈등을 빚을 때도 많다. 이 경우 노조는 다음 임단협에서 “회사를 못 믿겠다”며 같은 내용을 더 강력하고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라고 요구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2001년 임단협에서 합의한 노조의 경영참가 조항 일부를 이번 임단협에서 다시 거론하며 구체적인 통보시기를 못박은 것이 그런 사례다. 불신(不信)이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 피하려 使-使 갈등

    현대차에서 노조와 관련된 일은 기피대상 1호다. 노사문제와 관련해 회사 관계자와 익명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요청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누구도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어느 부서 하나 노조와 무관한 곳은 없지만, 다들 노사협력팀에만 뒤치다꺼리를 미룬다. 조직 이기주의에 따른 사(使)-사(使)갈등이다. 화물연대 파업이 건설교통부, 한전의 발전(發電) 자회사 분리문제가 산업자원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도 노동부로 책임을 미루려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LG그룹의 한 임원은 “현대그룹의 독특한 오너문화가 현대차의 노조갈등을 심화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구자경 회장, 허준구 회장 등 LG그룹의 오너 경영인들은 해외관련 업무나 주주총회 등 법률상 필요한 경우 외엔 모든 권한을 전문경영인에 이양했다. 노사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노조원들이 회장실을 점거 농성할 때도 ‘당신네 사장과 얘기하라’며 상대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현대나 대우에선 정주영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직접 노조위원장과 담판했다. 당시 언론은 ‘재벌총수가 직접 노조를 상대한다’며 호의적으로 보도했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와 대우는 사정이 더 나빠졌다. 오너가 직접 노사문제를 챙기면 전문경영인들은 오너의 눈치만 살피고, 노조는 전문경영인을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게 된다.”

    가령 이헌조 LG전자 고문 같은 사람은 전문경영인 시절 노조와 협상하면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했다는 것. 그는 노조측이 작업장의 안전도를 높여달라고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근로자들이 불안을 느끼는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며 노조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안전 설비를 갖춰주겠다고 약속했다.

    현대정공과 현대자동차서비스 CEO를 지낸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회장에 취임한 후 정세영 전 현대차 회장 인맥의 상당수 노무 전문가들이 회사를 떠난 것도 노조에 대한 협상력을 떨어뜨린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정공·자동차서비스 출신 중심의 노무팀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조에겐 ‘쉬운 상대’로 비쳐진다는 것.

    헤게모니 싸움에 勞-勞 갈등

    현대차 노조는 워낙 대규모 조직이다 보니 내부에 민투위, 민노투, 노연투 등 9개 계파가 각각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이들은 비록 하나의 노조 깃발 아래 있지만, 옛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같은 비판적 협력관계라기보다는 마치 요즘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처럼 적대적 대립관계에 가깝다”고 귀띔한다.

    이들 계파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벌이는 선명성 경쟁이 노조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노동계 관계자의 말.

    “이들이 차기 집권을 겨냥해 선명성·선심경쟁을 벌이다 보니 집행부도 노동자 전체의 공리와 회사의 현실을 고려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어렵게 된다. 선거 과정에선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합원의 기대를 터무니없이 키우기 십상이고, 집행부가 된 후에는 회사의 처지를 잘 알게 돼도 행여 온건한 이미지를 풍길까봐 티를 내지 않는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 ‘누가 조합장이 되든 내 밥그릇만 가득 채워주면 된다’는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막강한 권한을 확보했다. 적어도 고용과 관련해서는 사측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책임감과 정책역량이다. 조합원들의 요구가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가면 ‘회사가 위험하다’며 설득해야 하고, 회사와 동반자로서 머리를 맞대고 중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할 수 있을 만큼 전문성도 길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넉 달째 표류하고 있는 현대차와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상용차 합작법인 설립건(件)은 여러 모로 아쉬움을 갖게 한다.

    현대차는 승용차 부문에선 상당한 기술력을 갖췄으나 대형 상용차 부문은 취약하다. 이 부문에서 자체 기술력을 확보해 수출산업화하기는 요원하다. 따라서 현대차가 전주공장을 현물출자하는 대신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상용차 엔진기술을 제공하고 4억유로를 출자키로 한 이 사업은 현대차로선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현대차는 지난 4월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투자합작사업에 합의, 합작법인을 설립키로 했으나 노조의 반대로 지금껏 실현되지 못했다.

    걸림돌은 노조의 경영참여와 보상금 지급 등. 이 중 경영참여 문제는 이번 임단협 합의안에 따르면 되니 남은 것은 보상금 문제 정도뿐이다. 따지고 보면 회사로선 굳이 보상금을 줄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울산공장에서 전주공장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보상금과 이주비를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전주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법인만 바뀔 뿐인데도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법인명이 ‘현대차’에서 ‘현대-다임러크라이슬러’로 바뀐다고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은행 신용이 떨어질 리도 없다.

    더구나 회사측이 향후 10년간 완전고용을 보장하고, 합작법인에서 일하다 내키지 않으면 현대차로 복귀할 수도 있도록 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다 수용한 마당에 노조가 보상금 액수에 매달려 계속 이 사업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야말로 ‘귀족노조’ ‘노노갈등’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현대차 노사는 “노조는 ‘정치’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회사는 ‘시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공식과 틀 만들어야

    조성재 연구위원은 “자동차산업의 노사관계를 한 차원 끌어올리려면 지금처럼 힘을 가진 쪽이 다른 편을 제압하려는 역학관계적 접근에서 벗어나 임금 및 작업장, 유연성 교섭에 이르기까지 공식화와 제도화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섭의 기본이 될 공식과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임금협상의 경우 미국의 빅3와 UAE는 생산성 상승률과 물가상승률을 연동시켜 임금인상이 자동적으로 이뤄지게 하는데, 교섭은 3년마다 한 차례씩 한다. 매년, 그것도 개별기업 노사 간에 힘의 논리를 앞세운 소모적 교섭을 거듭해온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독일은 전환배치 등을 다루는 작업장 교섭에 회사 및 노조측의 산업공학 전문가들을 함께 투입해 우리의 경우처럼 임의성, 정치성이 아니라 전문성에 입각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또한 미국이나 독일에선 호황기에 불황기를 대비, 근로시간을 저축한다든가 고용안정기금을 축적하기도 한다. 자동차산업은 경기변동에 극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호황이라고 연말마다 고액의 성과금을 받아내기보다는 불황기에 잔업수당이 줄어 생계에 타격을 받고 고용조정 위험까지 맞게 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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