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호

“반도체 기술 배우러 갔다가 스파이 취급받아 서러웠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㉛]

호암은 마라톤 하듯 삼성 반도체 키웠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5-2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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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세 번째로 개발했지만 알릴까 말까

    • 삼성에는 기술 주지 않겠다

    • 모두 한꺼번에 시작하는 병렬 전략

    • 1등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반도체業

    64KD램 개발 성공을 알린 삼성반도체통신 광고. [동아DB]

    64KD램 개발 성공을 알린 삼성반도체통신 광고. [동아DB]

    1983년 12월 1일 삼성이 64KD램(이하 64K)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자 국내외가 발칵 뒤집혔다. 호암이 ‘도쿄 선언’을 통해 VLSI(초대규모 집적회로)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한 지 8개월만의 일이다. 64K는 새끼손가락 손톱(2.5 × 5.7㎜)만한 크기의 칩에 머리카락 50분의 1정도 되는 미세한 선을 800만개 정도 판 뒤 트랜지스터(6만4000개) 등 약 15만개 소자를 박아 넣는 것이다.

    일본에 주눅 들어 있던 시절

    삼성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VLSI 생산국이 됐다. 미국과 일본이 20여 년간 거쳤던 개발 과정(4K, 16K, 32K)을 세 단계나 뛰어넘은 쾌거였다. 당시만 해도 64K를 양산하던 회사는 미국에서는 모토롤라를 비롯한 4개사, 일본에서는 히타치를 포함한 6개사에 불과했다.

    64K 개발은 대한민국 산업사(史)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단순 조립 가공에만 머물던 기술 후진국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64K는 2013년 8월 27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563호로 기록됐다.

    삼성의 발표는 전 세계로 타전됐다. 한국 TV와 라디오도 하루 종일 ‘톱뉴스’로 다뤘다. 다음날 신문 사설도 일제히 ‘기술 한국의 승리’라고 흥분했다. 당시 삼성반도체 사업본부장으로 개발을 총지휘한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삼성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명실상부 첨단 반도체 기술회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정말 센세이션했지요. 특히 일본이 가장 많이 놀랐습니다. 시계 칩이나 만들던 회사가 VLSI를 개발하겠다는 것은 갓 태어나 제대로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아기가 걷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비아냥댔었거든요.



    개발에 성공해놓고도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하는 게 옳은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본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였죠. 삼성이 전자에서 신제품을 낼 때마다 일본 기업들이 바로 덤핑에 들어가 고사시키려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을 의식하지 말고 우리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발표하기로 결정합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우리가 일본에 주눅이 들어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떻든 당시 성공으로 삼성은 명실상부 최첨단 제품 개발 회사가 됐고 전 세계에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널리 알려지면서 갑자기 다른 전자 제품들까지 불티나게 팔려 재고를 싹 해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이크론의 ‘갑질’

    삼성은 어떻게 64K 개발에 성공했을까. 여기에는 봉급생활자 아버지들의 피눈물이 녹아 있는 감동과 기적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다시 김 전 부회장 회고다.

    “세계 최초로 64K가 나온 게 1981년이었는데 삼성이 개발에 착수한 것은 그로부터 3년 가까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제품이긴 했지만 D램 사이클이 보통 3~4년이라고 할 때 64K는 양산면에서는 최첨단 제품이긴 해도 개발 면에서는 끝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256KD램(이하 256K) 개발에 착수했고 선두 기업 중에는 1메가D램(이하 1M) 개발을 비밀리에 시작한 곳도 있었으니까요.

    원천 기술이 없는 삼성으로서는 다른 나라로부터 기술을 배워서 시작해야 하는데 칩이 공개되기 전에는 모든 걸 비밀에 부치는 반도체 업계 특성상 256K는 기술 이전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64K는 칩도 구할 수 있었고 설계도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니 일단 설계 기술은 미국이나 일본에서 배워서 시작하고 제작은 우리 스스로 해보자, 그리고 이것을 밑천으로 256K부터는 설계부터 양산까지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문제는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회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텔, TI(텍사스 인스투르먼트), NEC, 도시바 등에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기술 이전에 인색한 데다 한국 기업에는 기술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미국 기업들은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추격으로 고전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후발 주자를 반기지 않았다.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TI로부터 ‘우리는 제품을 팔지 기술을 팔지 않는다’고 문전 박대를 당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때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이하 마이크론)가 자금난에 빠져 64K 양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김 전 부회장 회고다.

    “이윤우 개발부장이 바로 본사로 날아가 알아보니 사실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협상 끝에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습니다. 생산라인을 보여주지 않아 수율이나 품질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현지 연수도 시켜주고 나중에는 자기들이 개발 중인 256K 기술도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결국 125만 달러에 계약하게 됩니다.”

    삼성이 마이크론으로부터 설계도 등을 넘겨받은 게 1983년 6월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두 달 여 뒤인 8월, 이종길 박사 등 엔지니어 8명이 부푼 꿈을 안고 마이크론 본사 정문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마이크론이 이른바 ‘갑질’을 시작하는 것 아닌가. 이윤우 전 부회장 말이다.

    “도착 첫날, 정문에서 공정 담당 엔지니어 두 명만 들어오고 나머지는 숙소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보고를 받고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모릅니다.

    이튿날도 공정 담당 기술자 두 명에 한해서만 연수를 허용하고 설계 엔지니어들은 아예 출입을 시키지 않는 겁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지만 을(乙)인 입장에서 대 놓고 뭐라 할 수 없어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항의를 했지요. 결국 설계 엔지니어들의 출입이 허용됐습니다.

    마이크론은 우리를 연수생이 아니라 거의 스파이처럼 대했어요. 생산 라인을 돌아볼 때는 반드시 자기네 직원들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고 직원들과 일대일 접촉도 안 되며 복사기가 있는 곳과 설계실 근방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우리 연수생 한 사람이 생산 라인에 있던 컴퓨터에 다가가 키보드를 눌렀다며 연수생 전원을 쫓아낸 적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본 것도 들은 것도 일체 기록할 수가 없으니 연수생들은 각자 맡았던 생산 라인 구조와 배관 위치, 공정 흐름 등을 모조리 머릿속에 입력했다가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서로 본 것들을 밤새 돌아가며 말하는 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상복 씨의 책 ‘외발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에는 당시 연수를 갔던 연구원의 말이 이렇게 소개돼 있다.

    “마이크론 본사 정문 앞에 태극기가 걸려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떠났던 우리의 기대는 처음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태극기는커녕 문전 박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초기 연수 인원 외에 2차, 3차의 지원조를 파견해 6개월 동안 순차적으로 기술을 도입하려 했던 계획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연수는 한 달 만에 끝내야 했다. 기술 없는 자의 설움을 한탄하면서 바라보던 창밖의 미국 달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대 속에 이뤄진 연수였지만…

    박대와 모욕 속에서 이뤄진 연수였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배운 것이 마지막에 화룡점정 역할을 했다. 309가지나 되는 제조 공정 대부분은 트랜지스터를 만들던 기술을 응용해 해결했다. 하지만 핵심 기술인 8가지 미세공정에서 실패와 시행착오가 거듭됐다. 이 과정에서 마지막 미국 연수 인력의 합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반도체 칩은 개발과정에서 ①전체 소자 중 일부만 작동하는 동작 칩 ②모든 소자가 작동하는 완전 동작칩 ③고객을 위한 테스트용 샘플 칩 ④판매를 위한 양산 칩으로 나뉜다. 반도체 업체들은 ‘차세대 칩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할 때 이 네 종류 중 어느 수준인지까지는 밝히지 않는 게 관례였다.

    삼성이 64K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을 때의 칩은 1983년 11월 17일 부천공장에서 나온 동작 칩(9개)이었다. 일본 업체들이 “우연히 건진 동작 칩 몇 개로 성공했다고 떠벌렸다”며 애써 평가 절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생산 라인을 부천에서 기흥 1공장으로 옮긴 1984년 5월에도 완전 동작 칩이 나오지 않자 삼성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김 전 부회장 말이다.

    “정말 피 말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 웨이퍼에 설계 회로를 복사할 때 쓰는 ‘프로젝션 얼라이너’가 오염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선은 우리 자체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게 첫 번째 이유였지만 마이크론 설계가 표준이 아닌 게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마이크론이 정전기 방지 회로를 추가하는 등 기존 제품보다 성능을 더 좋게 만든다고 표준을 살짝 바꿨는데 그 때문에 다른 메모리칩과 호환성에 문제가 생긴 거였죠. 어떻든 이런 저런 문제들을 간신히 해결한 뒤 1984년 7월 64K 완전 동작 칩을 얻게 됐습니다.”

    릴레이식 아닌 마라톤식

    반도체 메모리는 대체로 3년마다 집적도가 4배씩 늘어나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속성이 있다. 한 세대가 만들어져 판매가 시작되면 생산량이 점차 늘다가 5~6년이 지나면 가격도 떨어지고 생산도 줄어 수명을 다하게 된다.

    이에 선발 주자는 많은 이익을 내는 반면 기술 개발이 수년씩 뒤처지는 회사는 투자비 지출 탓에 경영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래서 반도체업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불리는 고위험‧고수익 사업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 모든 기업은 차세대 제품을 먼저 개발하기 위해 사생결단의 노력을 경주한다. 1등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삼성의 1등주의도 사실은 반도체업이 심어준 DNA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64K에 이어 다음 도전은 256K였다. 256K는 일본 NEC와 후지쓰, 미국 인텔 3개 회사만 생산하고 있었다. 집적도를 단순 계산하면 64K의 4배지만 장비나 기술 개발 난이도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호암의 전략은 기흥공장 설립 과정에서 보여줬듯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나가는 릴레이식이 아니라, 전 단계를 병렬적으로 놓고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달리는 마라톤식이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의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호암은 생각했다.

    삼성은 64K 동작 칩을 확보한 1983년 말부터 바로 256K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총괄한 사람이 이윤우 전 부회장이다. 그의 말이다.

    “반도체라는 건 제네레이션이 있지 않습니까. 64K, 256K, 그 다음 1메가로 나가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 제네레이션이 늦어지거나 끊어지면 대가 끊기는 겁니다. 그런데 호암은 이런 단계를 밟지 않고 모두 한꺼번에 시작하는 병렬 전략을 썼어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미국 연구소(SSI)와 한국 개발팀 간에 경쟁을 시킨 겁니다. 256K는 미국 팀에서 먼저 개발했지만 동작 칩을 만든 건 국내 팀이 먼저였습니다. 1984년 10월이었습니다. 감정 표현을 잘 안 하시던 선대 회장님이 기흥까지 내려와 개발진들을 일일이 껴안아줄 정도로 감격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미국 팀도 이듬해(1985년) 7월 성공하는데 국내 팀보다는 늦은 개발이었지만 기억된 정보를 잘못 읽는 비율(오독률, 誤讀率)과 정전기에 버틸 수 있는 성질 등이 국내 팀 것보다 높게 나와 생산성과 판매 적응력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국내 팀은 미국 IBM 등의 기술 지원을 받았지만 미국 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성공시킨 제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호암의 자문자답

    삼성은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개발 선언 6개월 만에 64KD램을 개발했다. 사진은 1984년 해외 수출에 앞서 고사를 지내는 모습. [동아DB]

    삼성은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개발 선언 6개월 만에 64KD램을 개발했다. 사진은 1984년 해외 수출에 앞서 고사를 지내는 모습. [동아DB]

    호암은 ‘호암자전’에서 64K와 256K 개발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국제적으로는 미국·일본에 이어 3번째의 반도체 생산국 공장으로서 완성된 64KD램의 제1라인은 완성 4개월 만에 미국·일본에서도 대성공이라고 하는 51%의 제품 합격률을 달성했다. 반년 만인 9월에는 수율이 일본 일류 메이커에 견줄만한 75%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미국 컴퓨터 메이커의 엄격한 검사에도 무난히 합격(필자 주=IBM을 말한다), 9월에는 처녀 수출도 이룩했다.

    기흥 1라인 준공식 세 달 후인 1984년 8월에는 256KD램을 주 제품으로 하는 기흥 제2라인 설립에 들어가 1985년 3월 말 준공했다. 약 1900억 원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2라인 완성에 앞서 1984년 10월 256KD램 독자 개발에도 성공했다. 미국 일본 전문가나 메이커들은 모두들 기적이라고 경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64KD램이나 256KD램 개발에 성공했을 때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해외에 자극을 줄 염려가 있다며 일체 비밀에 부칠 것을 당부해왔다.

    부천 공장의 고문직을 맡아온 일본인 박사가 일시 귀국해 일본 동료 전문가들과 삼성이 VLSI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놓고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종래 일본인들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성공을 일본인 특유의 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해왔는데 한국이 성공을 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박사는 내게 “한국에는 어른을 존중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가부장적 제도가 아직 현존하고 있어 융화와 통솔이 잘되고, 일치단결하여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고 전해주었다.”

    이어 호암은 ‘삼성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자문자답한다. 호암이 꼽은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적 타산이나 위험을 초월하여 국가적 견지에서 첨단 기술에 도전한 확고한 기업정신이 있었다.

    둘째, 부천 공장에서의 집적회로(IC) 생산 10여 년 간의 경험과 인력의 축적이 있었다.

    셋째, 세계 경제가 호황으로 전환하여 반도체 산업에 활기가 되살아났다.

    넷째, 최신 최고이면서 최염가의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다섯째, 재미 한국인 박사들의 사심 없는 조국애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참여로 고도의 두뇌집단과 기술 인력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여섯째, 여자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근면한 노동력 확보 및 훈련이 가능했다.

    일곱째, 어려운 입지 조건에 적합한 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여덟째, 긴축정책 속에서도 각 금융기관의 각별한 이해와 협력을 얻어 소요자금을 순조롭게 조달할 수 있었다.”

    1983년 삼성이 개발한 64KD램 모듈. [동아DB]

    1983년 삼성이 개발한 64KD램 모듈. [동아DB]

    토네이도의 눈 한 가운데로

    삼성은 64K, 256K 개발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86년 7월 13일에는 마침내 1MD램 개발에까지 성공한다. 개발에 착수(1985년 9월)한 지 10개월만의 일이다. 1MD램은 ‘꿈의 반도체’ ‘킬로비트에서 메가비트 단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슈퍼 칩이었다.

    삼성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이제 물건을 잘 만들어 잘 팔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바깥세상에는 이전까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거대한 회오리가 불어 닥치고 있었다. 그리고 삼성은 토네이도의 눈 한가운데로 서서히 빠져드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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