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3-08-25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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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에는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첨단과학을 연구하고, 저녁에는 발레를 보고 숲길을 산책한 뒤 카페에서 상대성이론을 논하는 도시.’ 광대한 러시아 영토의 한복판, 시베리아의 넓은 평원지대에 연구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하려 했던 사람들이 처음 그렸던 꿈은 그런 것이었다. 비록 역사는 그 꿈을 무너뜨렸지만 소비에트 붕괴 10년을 넘긴 지금 도시는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아카뎀고로도크 전경

    공항을 출발하면서부터 한 시간 내내 시베리아 자랑에 침이 마르던 택시기사가 다 왔다며 차를 세웠다.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라는 것이다. 이상한 것이, 지도에는 분명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는 호텔인데 사방을 둘러봐도 울창한 숲뿐이다. 한적한 휴양림 분위기다.

    호텔 직원에게 예약을 했다고 얘기했지만 선뜻 방을 내주지 않을 분위기다.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어느 기관의 초청을 받았는지, 누구를 만날 예정인지 꼬치꼬치 묻는다. “아카뎀고로도크는 제한이 엄격한 도시이기 때문에 단순 관광객에게는 호텔 투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 소련 시절부터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국가지정 과학도시임을 실감케 하는 ‘첫인사’였다.

    한참을 확인하고 난 호텔 직원이 열쇠를 내준다. 방에 올라가 다시 사방을 살펴보지만 온통 숲이기는 밑에서 볼 때나 마찬가지. 한참을 둘러보고 나서야 나무들 사이로 숨어 있는 건물 꼭대기들이 언뜻언뜻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시를 짓고 나서 조경을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숲속에 군데군데 건물을 짓고 길을 낸 형국이다.

    안내지도를 펴보니 도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러시아어로 ‘아카뎀’은 아카데미, ‘고로도크’는 작은 도시를 의미한다. 아카뎀고로도크는 그러니까 ‘작은 학술도시’쯤 되는 셈이다. 이 도시는 러시아 영토의 한복판인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남쪽으로 40km 지점, 사방을 둘러봐야 언덕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완벽한 ‘一’자 지평선의 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자작나무와 전나무만이 울창하던 숲 사이사이에 30여 개의 대형 연구소와 4개의 대학, 10만여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 사회주의 소련 과학중흥의 본거지로 마련한 것이 바로 아카뎀고로도크다. 동서냉전 체제와 우주개발 경쟁이 막 불붙기 시작하던 1957년의 일이었다.

    잘 관리된 연구단지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아카뎀고로도크 인근 시베리아 횡단철도

    짐을 풀고 거리에 나가 천천히 걸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과연 연구도시답다. 도로 위에 반듯하게 그려진 횡단보도와 제대로 작동되는 신호등. 한쪽에서는 새로 도로포장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려진 건물 하나 눈에 띄지 않고, 길가의 잔디는 잘 다듬어져 가지런한 데다 여기저기 꽃까지 심어놓았다. ‘여기가 러시아 맞나’싶을 만큼 잘 관리된 모양새다.

    호텔이 있는 일리치 거리를 따라 우체국과 쇼핑센터, 영화관, 노천카페, 콘서트홀 등이 줄지어 서 있다. 여가용 문화시설을 한 거리에 배치한 것이 전형적인 소비에트식 도시설계 그대로다. 필요할 때는 집회를 할 수 있는 작은 광장도 있고, 연구도시답게 꽤 큰 규모의 서점도 몇 군데 보인다. 일리치 거리를 따라 중심도로인 모르스코이가와 라브렌체브가에 이르자 4~5층짜리 연구소 건물들이 숲 사이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아카뎀고로도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연구소가 밀집해 있는 연구단지와 아파트가 대부분인 거주단지가 그것이다. 기자가 묵은 호텔은 연구단지에 위치해 있다. 연구단지라고 해서 연구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빽빽한 나무에 가려 있는 까닭에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뿐, 연구소 사이사이 숲 속에는 3층짜리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우선 이 연구단지를 구석구석 살펴보기로 마음먹는다.

    조금 더 걷자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연구소라는 핵물리연구소가 나타났다. 그 앞 화단에는 젊은 여성 두 명이 모종삽을 들고 빨갛게 핀 꽃들을 다듬고 있다. 거리의 잔디밭이 어찌 그리 깔끔한지 궁금증이 해결됐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20명 남짓 되는 직원들이 일주일 내내 도시 주요도로와 건물 주변의 꽃과 잔디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내친김에 숲속 아파트 사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나뭇가지가 길을 막을 만큼 울창한 숲길 사이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다. 알록달록 페인트칠이 잘 돼 있는 놀이기구 뒤로 보이는 주차장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일제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다. 마침 아이를 데리고 나온 30대 주부 라리사 카말료바씨에게 이 도시에 사는 이유를 물었다.

    “자연이 좋잖아요. 거리도 깨끗하고 치안도 괜찮은 편이고요. 이를 위해 시 당국도 노력을 많이 하니까요. 예를 들어 쓰레기만 해도 다른 도시에서는 한쪽 쓰레기장에 모아두면 며칠에 한 번씩 처리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수거차가 건물마다 방문하죠. 모두들 시간에 맞춰 쓰레기를 들고 나오니 거리가 깨끗할 수밖에 없어요.”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카지노가 들어선 주거단지의 청소년 문화궁전 ‘유노스치’. 아카뎀고로도크가 처한 현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러면서 카말료바씨는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지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인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좀 이상하다. 아카뎀고로도크는 연구소 직원들만 사는 게 아니었던가.

    “소비에트 시절에는 그랬죠. 그때는 정부로부터 거주허가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좋은 거주환경을 찾아 이사 온 외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예요. 연구단지의 숲속 아파트는 가격이 비싸서 연구원들이 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럽죠. 직원들은 대개 거주단지에 살아요.”

    알록달록 페인트 칠한 놀이터도 거주자들이 조금씩 돈을 거둬 마련한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재정사정이 나빠지면서 지방정부나 연구소 모두 큰길 주변에나 신경을 쓸 뿐, 작은 골목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고급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돈을 부담해 주변환경을 손본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공공영역의 서비스가 약화되어 관리가 허술해진 골목과 생활공간을, 돈 많은 주민들이 대신해서 관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주차장에 늘어선 일제 승용차들 역시 아카뎀고로도크에서 일하는 사람들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의 차인 경우가 많다는 설명. 왠지 더없이 마음에 들었던 도시의 첫 이미지가 조금씩 바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문화궁전에 들어선 카지노

    2km 남짓 떨어져 있는 연구단지와 거주단지는 각기 전혀 다른 느낌의 두 길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작나무와 전나무 사이로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숲길이다. 거주단지에서 연구단지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어느 쪽 길로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생태적인 주거환경을 위한 도시 설계자들의 작은 배려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한적한 연구단지의 아파트 거리

    이번에는 거주단지를 살펴보기로 마음먹는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보시비르스크국립대학교(이하 NGU) 본부건물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이 도시에는 러시아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전차(電車)를 찾을 수 없다. 버스 차장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시베리아에서는 전기가 석유보다 비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돌아온다. 인근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돼 있는 톰스크가 있다는 자랑이 이어진다.

    그 때문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시내버스노선과 발달된 택시제도가 대중교통의 전부다. 걷기를 즐기는 이 도시 사람들은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꽤 긴 출퇴근길을 걸어다니기도 한다. 차창 밖으로 자전거에 몸을 실은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도시 전체에 경사가 거의 없다 보니 자전거는 매우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거주단지의 입구인 ‘문화궁전 유노스치(청년)’에 다다른다. 10대 학생들이 각종 스포츠와 레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카뎀고로도크 건설 당시 극장과 체육관, 수영장 등을 모아 만든 시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카지노 간판.

    2년 전에 들어섰다는 ‘777’ 카지노 입구에는 한눈에도 힘깨나 쓰게 생긴 건장한 남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다른 쪽 입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정부지원이 줄어든 후 문화궁전을 운영할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임대해주었다”고 말한다. 역시나 돈이 문제였다.

    문화궁전을 지나 거주단지의 외곽인 게로야 투르다 거리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외곽지역의 분위기는 잘 가꾸어진 연구단지의 고급 아파트들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 움푹 팬 도로에는 며칠 전 내린 빗물이 아직까지 남아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흐루시초프 서기장 시절 한 동(棟) 짓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는 조립식 아파트들은 세월이 흘러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거주단지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바노프 거리에 이르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인도는 잡풀이 무성해 통행이 불편할 정도였고, 곳곳에 만들어진 놀이터는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나 다름없었다. 잡초에 뒤덮인 놀이기구는 시커멓게 녹이 슬어 있었다.

    도시 설계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구역마다 하나씩 마련해놓은 운동장이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씩 나타나는 이 운동장에도 잡초가 무성하기는 마찬가지. 야간경기를 위해 만든 높은 조명탑과 축구골대 또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행정책임을 맡고 있는 시 정부는 거주단지까지 신경을 쓸 능력이 없고, 연구단지의 부유한 외지인들과는 달리 거주단지 주민들은 나서서 동네를 관리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의사 벤야민 시콜로프(52)씨의 이야기였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공공의 것’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했죠. 거꾸로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것’에만 집착하게 됐다고 할까요. 돈이 생겨도 자기 집에만 신경 쓸 뿐이지, 동네나 거리, 하다못해 아파트 계단같이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아요.”

    거주단지를 둘러본 다음날은 도시의 남쪽 끝 한적한 숲속에 위치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SORAN) 박물관’을 찾기로 했다. 이 도시의 시작이 궁금해진 까닭이다. 왜 하필이면 이 추운 시베리아 한복판에 연구도시를 세운 것일까.

    박물관 앞에 이르자 ‘이 건물은 아카뎀고로도크 건설을 추진한 주인공인 미하일 라브렌체브 박사가 살던 집을 개조한 것’이라는 표지판이 방문객을 맞는다. 초인종을 누르니 인상 좋은 안내원이 나와 한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설명을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 스탈린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막 벗어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지에 집중되어 있던 기초과학 연구역량을 시베리아로 분산시키기 위해 특단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영토의 불균형 개발을 시정하고 시베리아의 엄청난 천연자원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전진기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에 따라 흐루시초프 정권은 1957년 5월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SOAN SSSR·사회주의 붕괴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SORAN)’로 개칭) 창설에 관하여’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SOAN SSSR이 위치할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의 건설을 확정한다. 이 아이디어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소련 탄도미사일학의 대부 라브렌체브 박사가 SOAN SSSR의 초대의장을 맡으며 건설과정을 진두지휘했다. 박물관의 니콜라이 쉐르딘 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카뎀고로도크와 SOAN SSSR의 창설에는 스탈린 시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흐루시초프 정권의 의도도 담겨 있었어요. 특히 지나친 중앙통제로 기형화된 과학연구를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풀어줄 필요가 있었던 거죠.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아카뎀고로도크 건설과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각 분야 최고수준의 학자들과 청년 연구자들은 보다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안락한 대도시를 버리고 시베리아행 열차를 탄 겁니다.”

    이 시기 아카뎀고로도크의 도시설계 철학을 듣기 위해 만난 김유코(한국명 김유광·70)씨는 일곱 살때 부모를 따라 고향인 안동을 떠나 사할린에 정착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대신 1950년대 후반 아카뎀고로도크가 건설될 무렵 시베리아에 왔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고려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영건설업체 사장이 된 그는 이후 아카뎀고로도크의 주요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 도시의 설계 컨셉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시베리아에 건설된 도시는 모두 계획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 인접지역에 집중돼 있던 인구와 역량을 의도적으로 분산시켜 시베리아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도시들이니까요. 그 중에서도 아카뎀고로도크는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가장 잘 반영한 구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것이죠. 여가시설이 연구단지 안에 모여 있는 것은 저녁 5시가 되어 사람들이 퇴근하자마자 영화나 연극, 음악공연 등을 같은 공간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에 따른 것입니다. 상당히 낭만적인 컨셉트인 셈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생활양식이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 담겨있는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소련의 모든 학문이 그랬듯 건축학도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도구였으니까요.”

    도시를 위해 호수를 만들다

    이러한 컨셉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카뎀고로도크 옆 오브강에 만들어진 엄청난 규모의 저수지(길이 11km, 폭 2km)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나가는 오브강 상류에 세워진 이 저수지는, 일단 아카뎀고로도크에서 사용할 전기도 만들어내지만 연구도시 주민들의 여가생활을 위한 휴양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더 많이 고려됐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언제든 수영과 요트를 즐길 수 있도록 일부러 호수를 만들었다는 것이 김씨의 이야기다.

    이러한 문화시설들은 다른 지역에 근무하고 있던 우수한 과학자들을 이곳으로 유인해오기 위한 ‘당근’이었던 셈이다. 모스크바 인근의 중심지를 버리고 시베리아에 자원하도록 만들 메리트는 풍요로운 자연과 이를 충분히 활용한 여유로운 생활방식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카뎀고로도크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은 졸로토돌린스카야 거리에 다른 러시아 도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단독주택 단지를 조성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시 김유코씨의 설명이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연구단지와 주거단지를 잇는 두 개의 도로. 곧게 뻗은 도로(위)로는 주로 자동차가 다니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은 숲길(아래)을 이용한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시절의 주거형태는 아파트가 원칙이었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벽돌로 쌓아 만든 고급아파트와 시멘트 패널로 조립하듯 지은 일반아파트가 전부였죠. 아카뎀고로도크에 예외적으로 마치 별장처럼 널찍한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을 지은 것은 곳곳에서 저명한 과학자들을 끌어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연구소의 소장급 과학자들은 이런 단독주택을 배정받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단독주택-고급아파트-일반아파트의 구분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외부 인구의 유입과 이에 따른 신형 아파트 건설. 독일제 창호 등 수입자재를 사용해 짓는 새로운 아파트들은 가격이 평당 미화 2000달러 수준이어서 한국의 웬만한 지방도시 아파트 값에 맞먹는다. 최근 1~2년 사이 아카뎀고로도크 여기저기 건설되고 있는 이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보시비르스크 등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신진 기업가들, 이른바 ‘노브이 루스키’들이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컨셉트 또한 예전 같지 못하다. 학자들이 모여 토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식당 겸 카페 ‘석학의 집’은 요금이 지나치게 비싸 진짜 연구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고, 오히려 외부에서 온 비즈니맨들이 단골이다. 발레공연은 열리지 않은 지 오래고 극장 또한 10대 청소년들을 겨냥한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있다. ‘사회주의식 이상생활방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도시는 ‘자본주의식 진짜배기 현실’ 앞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다.

    떠나는 사람들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임금과 날로 열악해지는 도시환경. 이 두 가지는 아카뎀고로도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름아닌 연구인력의 해외유출, 이른바 ‘브레인 드레인(brain-drain) 현상’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세계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진 상당수 연구원들이 근무환경이 좋은 독일로, 미국으로, 일본으로 보따리를 쌌다.

    아카뎀고로도크에는 현재 SORAN 본부와 NGU를 비롯해 핵물리, 반도체, 열역학, 세포유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소가 30여 개 모여 있다. 시베리아 전역을 관장하는 SORAN 소속 연구기관과 과학인력의 50% 가량이 이 작은 도시에 모여있는 셈이다. 1만7000명에 달하는 연구진 가운데 1000명 가량이 박사학위를 갖고 있고 3000명 가량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고급인력이지만, 각 연구소마다 떠나려는 사람들을 붙잡는 일이 지상과제나 다름없다. 7년째 아카뎀고로도크에서 살고 있는 한러과학기술협력센터 박해조 소장의 말이다.

    “어느 연구소에 가도 30대 연구인력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20대 젊은이들이나, 외국으로 떠나기에는 나이가 든 40~50대 중견학자들이 대부분이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구 결과물이 꾸준히 나온다는 점입니다.”

    외국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분위기는 지금 막 공부를 시작한 젊은 세대에서도 어렵잖게 읽을 수 있다. NGU 대학본부 건물 앞에서 만난 연인 커플, 물리학도 로만 로카소프(19)와 신방과 신입생 스베틀라나 미르주이토바(17)는 “아카뎀고로도크와 아름다운 시베리아의 자연을 사랑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별 고민 없이 다른 나라로 떠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렇듯 이곳 주민들의 삶의 질이 열악해진 원인은 연구소의 재정상태 악화였다. 박사급 연구자가 월 미화 200달러 내외의 고정급밖에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임금이 낮은 데다 도시의 생활환경 정비도 재정문제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들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것은 SORAN이지만 도시 전체에 대한 행정권은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에 있다. 아카뎀고로도크는 노보시비르스크시의 소벳스키구 안에 있는 한 구역일 뿐, 행정구역명도 아니고 독립된 자치단체도 아니다. 따라서 도로나 전기, 교통 등의 기반시설 운영 또한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는 SORAN의 전신인 SOAN SSSR이 아카뎀고로도크 내의 행정권을 직접 행사했다. 행정권이 시정부로 이양된 것은, 사회주의 붕괴 후 각 연구소들의 재정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독립적인 도시환경 관리가 불가능해지자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방대한 지역을 관리하는 시정부가 아카뎀고로도크의 생활환경을 예전 수준으로 유지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아카뎀고로도크의 주거 형태들<br>①소장급 연구자용 단독주택 ②새로 지어진 최고급 아파트 ③주거단지의 일반 아파트

    한편 사회주의 시절 100% 중앙정부의 예산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던 연구소들은 이제 절반 이상의 예산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연구원들에게 적은 고정급 외에 충분한 연구비를 지급하려면 프로젝트를 따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양자가속기를 건설해주고 큰돈을 벌어들이는 핵물리연구소 등 ‘돈이 되는’ 아이템을 가진 연구소와 그렇지 못한 연구소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에두아르드 크루글랴코프(65) 박사는 42년째 아카뎀고로도크의 핵물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그가 처음 이 도시에 정착한 것은 건설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1961년. 이 도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브렌체브 초대 SOAN SSSR 의장은, 피끓는 20대의 크루글랴코프에게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는 그는 이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회원이자 몸담고 있는 연구소의 부소장이다. 기자는 그에게 “다른 동료들처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많이 고민했지요. 그렇지만 결국 답은 남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국심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외국의 연구소들은 대부분 직급이나 연봉에 있어 같은 수준의 자국 학자들에 비해 러시아 출신을 낮게 대우합니다.

    동료들이 떠난 이유가 단순히 돈 때문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던 것이었다고 봅니다. 떠난 사람을 탓할 이유도, 남아 있는 사람을 애국자라 부를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크루글랴코프 부소장은 최근 들어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이 모색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긍정적인 것은 아카뎀고로도크가 보유하고 있는 과학기술을 해외에 판매하거나 연구 프로젝트를 받아 수행하는 작업이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 연구소들의 기술수준이 높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과학기술전시장을 만들어 해외 인사들을 초청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 SORAN과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의 공도 크다는 설명이다.

    일부 연구소들이 수익창출에 성공하고 SORAN의 재정상태가 전에 비해 양호해지면서, 열악해진 아카뎀고로도크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들이 추진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 지역의 행정권을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로부터 SORAN으로 환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계획은 ‘아카뎀고로도크에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수가 인구 100만의 대도시 노보시비르스크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실제로 아카뎀고로도크의 인프라 정비에 쓰이는 돈이 많지 않다’는 주민들의 불만을 배경에 깔고 있다. NGU 대학본부에서 18년째 근무하고 있는 게오르기 밀렌코프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에는 그 흔한 도둑질이나 소매치기 사건 하나 없었어요. 연구소 사람들이 아니면 아카뎀고로도크에 못 살던 시절이니까 다들 신분이 확실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거든요. 연구단지에는 아예 경찰서도 없어요, 순찰을 도는 일도 거의 없고. 그만큼 안전한 도시였다는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들어와 살잖아요. 돈으로 치장한 고층 아파트도 짓고. 그러다 보니 도시가 엉망이 되어가요.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는 낫다고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형편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숲길을 산책하다 웬 남자들한테 가방을 뺏겼다니까요. 이럴 거면 차라리 예전처럼 독립하는 게 낫다는 거죠.”

    시 당국으로서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카뎀고로도크의 도시관리나 치안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노보시비르스크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훨씬 뛰어난 수준인 것이 사실. 아카뎀고로도크 주민들의 불만이 높다 해도 훨씬 열악한 다른 지역을 놔두고 여기에만 행정력을 집중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반문이다(노보시비르스크 시장 인터뷰 상자기사 참조).

    시 당국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SORAN은 자체적으로 도시 인프라에 손을 대는 방식으로 자치행정권 환수의 명분을 쌓아가고 있다. 앞에서 기자가 만났던, 아카뎀고로도크 연구단지 지역의 조경을 관리하는 20여 명의 인력은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가 아니라 SORAN으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 최근 들어 새로 포장한 도로들 역시 상당수는 SORAN이 자체예산을 집행한 사업이었다.

    그나마 아카뎀고로도크 연구단지가 노보시비르스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말끔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노력 때문이라는 것이 SORAN측의 주장이다. 아카뎀고로도크의 연구소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수익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 도시와 러시아의 자연과학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라고 겐나디 쿨리파노프 SORAN 부의장은 말한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이 돈에 봉사하는 것이 기쁠 리는 없죠.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회주의 시절에 사회주의 과학이 생존하는 법칙이 있다면, 지금은 자본주의에서 과학이 생존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연구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아카뎀고로도크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옛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이 도시를 되살려내기 위해 우리는 외국에서 온 바이어들을 만나고 우리가 가진 기술을 홍보합니다. 이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자랑스럽습니다.”

    ‘녹색 바다’로 데려다줄 ‘노란 잠수함’

    시베리아의 여름은 낮이 무척 길다. 새벽 5시에 솟아오르는 태양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진다. 위도상으로 한국보다 북쪽에 있기도 하지만 주변에 산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녁 9시, 아직 대낮같이 환한 거리를 걷다 만난 대학생들에게 “젊은이들이 가장 자주 찾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물었더니 ‘뉴욕 피자’라는 가게를 알려준다.

    한국의 패스트푸드점과 비슷한 알록달록한 가게 안에는 메뉴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어가 하나도 없다. 벽에 걸린 액자에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재클린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가게 안 젊은이들도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이다.

    계속 미국 팝송이 나오던 스피커에서 비틀스의 ‘노란 잠수함(Yellow Sub- marine)’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홀 안의 사람들이 모두들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남의 나라 말로 된 가사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태양을 향해 항해했지, 녹색의 바다를 발견할 때까지. 파도 밑에 살고 있었던 거야, 우리의 노란 잠수함 속에서. 우리는 모두 노란 잠수함 속에 살고 있지. 노란 잠수함, 노란 잠수함…’

    세계 최고 과학도시의 미래를 책임질 수재그룹이라는 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녹색의 바다는 과연 어디일까. 그들에게 아카뎀고로도크는 ‘풍요롭고 부유한 외국’이라는 녹색 바다로 데려다줄 노란 잠수함일까. 아니면 조국 러시아를 더 나은 미래와 번영의 녹색 바다로 이끌어줄 견인차일까. 과연 이들도 쿨리파노프 부의장 같은 기성세대와 똑같은 희망을 품고 있을까.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의 푸른 눈동자가 무엇을 꿈꾸는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었지만 밖은 여전히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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