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포포카페테틀 화산을 배경으로 선 대성당.
1799년 6월5일, 스페인 북서단의 라코루냐 항을 출발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1769~1859)는 베네수엘라의 쿠마나 항에 하선한 직후인 7월16일 유럽의 지인들에게 그곳 사정을 이렇게 알렸다. 훔볼트가 첫 번째 여행지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였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서른 살.
훔볼트는 1769년 9월 프로이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근위 장교였고 어머니는 재력가인 위그노 가문의 딸이었다. 언어학자로, 철학자로 그리고 외교관으로 이름을 날린 빌헬름 폰 훔볼트가 그의 형이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훔볼트는 ‘로빈슨 크루소’나 게오르그 포르스터(1754~95)의 ‘세계 주항기’ 같은 여행 또는 과학서적을 읽으며 호기심을 채웠다. 스무 살이 되던 1789년, 그는 형이 다니던 괴팅겐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어릴 때의 우상이자 항해사 제임스 쿡의 2차 항해(1772)에 참가한 게오르그 포르스터를 만났다.
이듬해에 그는 포르스터와 함께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영국과 혁명 1주년으로 잔뜩 들떠 있던 프랑스를 다녀왔다. 프로이센에선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새로운 세상을 목격한 그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지구와 자연,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그는 대학에서 광물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광산 감독관으로 일했다. 스물셋의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은 대학 성적도 좋았지만 귀족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변국들을 여행하면서 알프스 산지의 암석 구조를 관찰했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읜 이래 엄격한 칼뱅 교도 어머니 밑에서 자란 훔볼트는 27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갑자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주저 없이 광산 감독관직을 사임하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화산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곧바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폼페이 인근의 베수비오 산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가 프로이센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여서 여행은 여의치 않았다.
훔볼트는 여행과 탐험에 필요한 과학 분야 연구의 중심인 파리로 건너갔다. 다행히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양국간 개인의 이동은 막지 않았다. 훔볼트는 파리에서 육분의(六分儀), 기압계 등 관측에 필요한 기자재들을 구입하고 그 사용법을 익혔으며 과학자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중에는 식물학자 아이메 봉플랑(Aime Bonpland·1773~1858)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훔볼트는 뜻밖에도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계일주 탐험항해에 동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비로 추진하던 북아프리카 여행계획도 나폴레옹의 북아프리카 원정과 맞물려 미뤄야 했다.
스페인 왕의 특별한 제안
그러나 훔볼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독일 외교관의 소개로 만난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로부터 엄청난 제안을 받은 것. 훔볼트의 해박한 과학적 지식과 열의에 감탄한 카를로스 4세는 훔볼트에게 자신이 지배하는 모든 영역의 땅과 바다, 하늘, 식물과 동물, 광물을 탐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것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은 이후 300년 동안 한번도 없었던,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과학계에도 미지의 세계였다. 훔볼트는 그때의 심정을 가까운 친구에게 이렇게 전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파타고니아(남미 최남단)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그 길에서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산의 높이를 재고, 광물의 성분도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목표는 자연의 힘 상호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이처럼 오랜 준비와 기다림 끝에 출발한 훔볼트의 첫 항해 기착지가 바로 베네수엘라 카리브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쿠마나였다. 이때 파리에서 알게 된 식물학자 봉플랑도 동행했다.
훔볼트는 쿠마나에서 1년 가까이 머문 다음 오리노코 강을 탐험하기 위해 카라카스로 향했다. 최단 코스가 있는데도 굳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멀리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남미의 관문 아바나의 선택
오리노코 강 상류에서 아마존 강으로 이어지는 곳은 미답지역으로 현지 안내인조차 발을 들여놓기 꺼렸다. 다행히 그 지역을 순례하던 프란체스코 수도원 소속 베르나르도 세아 신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존 강 과 오리노코 강 사이에는 신비의 호수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곳은 엘도라도(El Dorado·황금인간)가 지배한, ‘빌라 임페리얼 데 마노아’라는 황금의 도시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세계의 탐험가들이 그 흔적과 엄청난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누구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훔볼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엘도라도가 있었다는 파리마 호수를 지도에서 삭제하고 대신 카시키에라를 그려 넣었다. 카시키에라는 오리노코 강에서 배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정글인 그곳에서 훔볼트는 다시 카누로 옮겨 타고 100km 떨어진 앙고스투라로 들어갔다. 5개월여 탐험한 끝에 그곳에 도착한 훔볼트와 봉플랑은 그만 열병에 걸려 1개월 넘게 머물러야 했다. 두 사람은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평원을 가로질러 쿠마나 인근의 항구도시 누에바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훔볼트 일행은 또다시 그곳에서 넉 달간 붙들려 있어야 했다. 영국 배가 해안을 봉쇄해 당초 목적지인 쿠바 아바나로 갈 수 없었던 것. 우여곡절 끝에 건어물 운반선을 얻어 타고 아바나에 도착한 것은 1800년 12월19일이었다. 쿠마나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꼬박 1년5개월이 걸린 셈이다.
아바나는 아메리카의 관문이자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훔볼트는 거기서 다음 진로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북아메리카를 탐사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남아메리카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 훔볼트는 베네수엘라 탐사 길에 채집한 식물 표본 등 6만점에 이르는 수집품을 세 꾸러미로 나눠 하나는 영국을 경유해 독일로, 다른 하나는 스페인의 카디스를 경유해 프랑스로로 가는 배편에 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아바나에 그대로 남겨뒀다. 운반 도중 예기치 않은 사고와 분실에 대비한 조치였다. 실제로 프랑스행 수집품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좌초되면서 수장됐고, 독일행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이 폭격당하는 와중에 사라졌다.
1801년 3월8일 훔볼트 일행이 도착한 곳은 누에바 그라나다왕국(지금의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였다. 최종 목적지로 잡은 페루 리마와의 사이에는 거대한 안데스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다. 안데스 산맥은 아마존 강의 원천. 그는 그곳에서 아마존 강 이북의 남아메리카를 관찰해 그 지도를 완성하고 싶었다.
훔볼트는 카르타헤나에서 조그만 배를 타고 막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도 그는 고도를 측정하고 대기의 성분을 분석했으며 강 지도를 그려 나갔다.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서 하선한 그들은 다시 산길을 헤치며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해발 2850m의 보고타를 향해 올라갔다. 제대로 된 길도 없을 뿐 아니라 봉플랑이 말라리아에 걸려 힘든 행군이 이어졌다.
남아메리카 탐험에서 돌아온 직후인 1806년에 그려진 훔볼트 초상.
1801년 9월, 그들은 에콰도르의 키토를 향해 남하했다. 안데스 산맥에서 가장 험난하다는 킨디오 고개를 넘는 데만 12일이 걸렸다. 연일 내리는 비와 대나무로 덮인 습지, 울퉁불퉁한 길로 신발이 찢겨 맨발로 걸어야 했다.
1802년 새해 첫날 적도를 통과하면서 그곳의 식물과 암석을 채집했다. 그후 반년 가까이 해발 2700m에 자리잡은 도시 키토를 거점으로 주변 산의 위치와 고도, 화산지형과 암석 성분을 조사했다.
키토를 출발한 지 2주 후 훔볼트는 안데스 산맥의 최고봉 침보라소에 도전한다. 일행이 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5907m까지 오르자 지원병 노릇을 하던 인디헤나(남미의 인디언)들은 더는 오르지 못하겠다며 내려갔다. 그곳의 산소량은 산 아래의 20%에 채 미치지 못했다. 좀더 오르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에 눈까지 펑펑 내리기 시작해 결국 등정을 멈춰야 했다. 며칠 전 굴러떨어지면서 다리를 다치고, 악천후까지 겹친 상황에서도 훔볼트는 고산병 증세를 연구하는 한편 침보라소의 표고를 측정했다. 그가 측정한 높이는 6367m. 그때까지 알려진 6270m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현재의 표준높이는 6267m).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럽 전역은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성과’라며 떠들썩했다. 히말라야 산맥의 에베레스트(8848m)의 높이가 알려지기 전이었기에 훔볼트는 세계 최고봉을 측정하고 가장 높이 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등산 기록은 이후 30년간 깨지지 않았다.
美 제퍼슨 대통령과의 인연
훔볼트는 침보라소에서 내려온 뒤 에콰도르의 성곽도시 쿠엥카와 말라리아 특효약의 원료가 되는 기나나무 서식지로 유명한 로하, 태평양 연안의 트루히요, 아마존 상류의 마라뇬 강, 잉카제국 제2의 왕도이던 카하마르카 등을 거쳐 1802년 10월23일 태평양 연안의 항구도시 리마에 닿았다. 이 코스는 오래 전 잉카인들이 다니던 행로로 훔볼트는 여러 차례 이 행로를 따라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했다. 그가 남긴 노트에는 인디헤나와 야마(낙타과의 짐승), 지진과 쓰나미, 광산, 천연두 백신, 잉카인이 비료로 사용하던 바다새의 배설물 등에 대해 적혀 있다.
훔볼트는 리마에서 300마일 정도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 루트를 택했다. 멕시코로 가기 위해서였다. 1802년 크리스마스 이브, 리마의 외항 카야오에서 배를 탄 훔볼트 일행은 에콰도르 과야킬까지 해수 온도와 해류의 이동을 관찰하면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훔볼트는 해류의 안쪽과 바깥쪽의 온도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그것이 페루 내륙지역을 건조하게 만드는 이유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이 지역의 해류를 ‘훔볼트 해류’라고 부른다.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금의 멕시코) 서해안의 항구도시(지금은 휴양도시로 더 알려져 있다) 아카풀코에 도착한 훔볼트 일행은 노새 21마리를 끌고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멕시코 만 연안의 베라크루스로 이동하면서 멕시코 지형 단면도와 멕시코 지도를 그렸다. 그 지도에는 312개의 광산과 원주민 거주지, 캘리포니아로 이르는 길 등이 자세히 표시돼 있다.
유럽의 여느 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멕시코시티에서 그는 멕시코 지식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멕시코를 방문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훔볼트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이때 훔볼트가 멕시코의 자연과 인구, 원주민 거주지, 농업, 광산업, 제조업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정리해놓은 것이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다.
훔볼트가 2차 남미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수집품을 남겨둔 쿠바 아바나로 되돌아간 것은 1804년 3월19일이다. 그곳에서 두 달 가까이 지체한 그는 곧바로 유럽으로 가지 않고 미국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그는 그곳 과학자들을 만난 후 곧바로 워싱턴으로 달려가 제퍼슨 대통령 관저를 방문했다. 제퍼슨은 그를 환영하면서 사저나 만찬에 자주 초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1 화산 활동을 멈춘지 얼마되지 않은 멕시코의 활화산 중 하나. <br>2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 요즘도 작은 배만 겨우 다닌다. <br>3 콜롬비아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
훔볼트는 1804년 6월30일 유럽으로 출발하는 라파보리토 호에 몸을 실었고, 프랑스 서해안의 항구도시 보르도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1일이었다. 스페인 라코루냐를 출발한 날로부터 계산하면 5년2개월이 걸린 셈이다.
19세기 최고의 ‘과학적 여행가’
파리에선 성대한 환영행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온 영웅’이 가지고 온 수집품과 스케치들이 공개되자 관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35세의 훔볼트는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마침 열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초청됐다. 프랑스 황제는 프로이센 출신의 그를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그때 훔볼트를 처음 만난 나폴레옹은 “당신은 식물학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황후도 그에 관심이 많답니다”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훔볼트는 동지인 봉플랑을 황제에게 소개했다. 그 덕분에 조세핀 황후의 개인 식물원 원장으로 일하게 된 봉플랑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자 남아메리카로 건너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곳은 우루과이와 브라질 국경지대의 어느 진흙집이었다.
훔볼트는 프랑스 주재 외교관으로 파리에 20년 가까이 살았다. 그러고는 1829년 꿈꾸던 아시아 여행길에 올랐다. 러시아 차르(황제)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그 길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랄산맥 일대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다니면서 기후의 변화를 조사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훔볼트는 베를린에 정착했다. 프로이센 왕이 궁정 고문으로 그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후로 30년간 베를린에 머물다 1859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를린의 테겔 공원 내 숲 속에 마련됐다.
그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찰스 다윈은 그가 죽은 바로 그해에 진화론의 출발점이 된 ‘종(種)의 기원’을 출간했고, 루이 파스퇴르는 저온살균법을 개발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869년 9월14일에는 여러 나라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뉴욕시에서는 2만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고, 보스턴에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강연회가 열렸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과학적 여행가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그가 발견한 지역과 강, 산, 해류 등에 붙여졌고, 그를 기리는 도시 또한 그의 이름을 빌렸다. 심지어 달에 있는 바다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지리학은 모든 과학의 어머니
훔볼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5년간에 걸친 열대 아메리카 대륙 탐험조사다. 그가 이룩한 신대륙의 과학적 발견은 30권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로 정리돼 있다. 말년에 쓰기 시작한 5권짜리 대작 ‘코스모스(우주)’는 미완성으로 끝났으나 여러 언어로 번역돼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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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최대 공적은 지리학 분야에 있다. 지리학이란 모든 과학의 어머니로서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그 이전의 지리학자들은 지구 표면과 지역적 특성을 다루는 데 그쳤지만 그의 등장으로 지리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는 ‘코스모스’에서 지리학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설파했다.
“지리학은 여러 현상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인식하고, 사고(思考)활동과 관찰과의 결합을 통해 현상에 내재하는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