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하순 52개 계좌 모두 하나의 계좌로 통합됐다는 것은) 결국 모르고 있었던 13개 계좌의 정체를 모두 파악했다는 뜻이 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북한 검찰은 비자금 계좌의 주인인 박자병이 죽었다 해도 그 합법적인 권리 승계자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근 수개월 사이 북한이 BDA뿐 아니라 다른 해외 계좌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조사를 벌인 일이 있다고 전했다. 평양 당국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무자들의 비자금 계좌가 또 있는지, 있다면 그 돈은 어디서 온 것인지 등에 대한 조사였다는 것. 박자병 총지배인의 횡령을 둘러싼 이러한 과정 때문에 BDA 문제에 대한 북한의 대응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코레스’의 연쇄고리
▼ 4월10일 미국이 BDA 자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조치한 이후에도 북한이 이를 계속 미룬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계좌주가 파악됐다면 얼마든지 인출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간 평양이 그토록 BDA 자금에 집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인데.
“동결만 풀어놓으면 북한이 현금으로 인출할 것이라는 생각은 국제금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나온 것이다. 현금으로 들고 나가는 것은 북한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돈을 다시 어느 해외 은행에든 입금해야 대외결제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요는 돈 자체가 아니라 국제금융망 사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어차피 평양의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쓰고 가는 달러화 현금도 가방에 담아 해외에 반출해 해외 은행에 입금한 후에야 대외결제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달러화 송금은 무조건 미국 은행을 거쳐야만 국제금융망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신환이 될 수 있다. BDA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북한 외교관들이 수십만달러 규모의 달러화 현찰을 들고 다니다가 외국 공항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국내에 쌓인 달러화는 무조건 해외로 갖고 나가서 입금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달러화의 모국인 미국 은행과 ‘코레스 협정(correspondent agreement)’을 맺고 있는 자국 내 은행을 통해 해외 반출이 가능하지만, 북한은 이게 자유롭지 못하다. 테러지원국 지정 등으로 미국 은행에 예금을 상계처리 할 코레스 계좌(correspondent account)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국 내에 모인 달러화 현찰도 제3국 은행으로 가지고 나와서 거기서 계좌를 만들어 그 은행이 미국과 상계처리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국제금융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국경을 넘는 송금을 하려면 양국의 은행이 서로 코레스 협정을 맺어 계좌를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송금’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현찰이 그 나라의 은행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 A은행이 B은행으로 500만달러를 송금한다면, ‘스위프트 시스템(swift system)’이라는 전산망을 통해 A은행에 만들어놓은 B은행 명의의 계좌 잔고를 500만달러 늘리고 B은행에 만들어놓은 A은행 명의의 계좌 잔고를 500만달러 줄이는 식으로 상계처리 하는 것이 ‘송금’이라는 행위의 실체다. 이때 쓰이는 계좌가 코레스 계좌, 이러한 처리를 약속하는 것이 코레스 협정, 이 협정을 맺어놓은 상대 은행을 코레스 은행이라고 부른다.
코레스 협정은 양자협정이므로 원칙적으로는 A은행이 C은행에 돈을 보내려면 두 은행이 서로 협정을 맺어야 한다. 그러나 B은행이 양쪽과 모두 협정을 맺고 있다면 A와 C가 직접 협정을 맺지 않아도 B를 거쳐 송금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세계 각국의 은행들은 거미줄과 같은 협정의 그물망으로 연결돼 웬만한 국가의 웬만한 은행으로는 모두 송금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외국 은행들끼리 오가는 달러화 표시 전신환을 ‘유로달러’라고 한다(1950년대 ‘유럽 은행이 사용하던 달러화 표시예금’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현재 유럽연합의 통화인 ‘유로’와는 관련이 없다). 문제는 달러화 현찰을 전신환으로 만들려면 달러화의 본국인 미국 은행이 그 코레스 연쇄고리의 어느 단계에든 끼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달러화 예금이 어디서 어디로 송금되든, 애초에 그 예금을 가능케 한 물리적인 현찰 자체는 최종적으로 태환(兌換)이 가능한 미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2005년 9월 미 재무부가 자국 은행들에 대해 북한 자금을 중개하는 은행과의 거래를 조심하라는 ‘경계령’을 발동했기 때문에 북한이 현찰 달러화를 얼마 갖고 있든 이를 전신환으로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BDA는 북한이 달러화 현찰을 전신환으로 만드는 주요 해외 은행이었고, 다른 은행들도 BDA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될까봐 달러화가 아닌 북한의 홍콩달러나 유로화의 송금처리조차 꺼리게 됐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돈 2500만달러가 있고 없고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2500만달러를 현찰로 인출할 수 있게 해줬다는 4월10일의 조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북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 국무부든 한국 정부든 언론이든 돈만 인출할 수 있게 해주면 BDA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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