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호

“내년 봄 금리·인플레이션 안정? 시장의 오판”

깡촌 소년 → 기재부 2인자 → 독립경제학자, 김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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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2-09-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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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피아는 사용해선 안 될 용어

    • 장기금리 향방이 재정정책 결정

    • 관료는 구조가 바뀔 때 주저한다

    • 양극화, 더는 경제학 변방 용어 아냐

    • 정해진 일 하면 평균은 가겠지만…

    8월 4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제1차관. [조영철 기자]

    8월 4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제1차관. [조영철 기자]

    궁벽(窮僻)과 경제관료.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생각한다. 김용범(60) 전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전남 무안군 해제면에서 자랐다. “무안군에서도 가장 끝이고 굉장히 궁벽한 곳”이라고 그는 말했다. 기억에는 고추 따고 마늘 캐고 논에서 거머리에 뜯기던 시절로 남아 있다. 그는 다섯째다. 부모에 관해선 “농사짓던 분들이고 많이 배우지는 못하셨다”고 술회했다. 책 좋아하는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소박한 꿈을 꿨다. ‘농사를 도와주진 못해도 교사는 되겠지.’

    고향을 떠나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린 나이에 “대처(大處)에 가서 문명 한가운데 던져진 충격”을 받았다. 고3 때 5·18을 겪었다. 그는 “인생 내내 붙잡고 살아야 할 고민거리를 갖게 된 시기”라고 회고했다. 사람의 사고는 성장 과정이 만든 산출물이다. “아무래도 전라남도니까 발전이 더뎠다. 정치적 격랑의 한복판에 있는 지역이기도 했고. 균형발전을 위해 공공정책의 역할은 뭘까 고민했다.”

    그 뒤로 2막이 열렸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계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에이스 관료의 징표라는 청와대 파견 근무 경험도 갖췄다. 금융위원회 사무처장과 부위원장을 거쳐 거시경제를 총괄하는 기재부 제1차관이 됐다. 지금은 독립경제학자를 자처한다.

    약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

    부모의 계급이 으레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지금, 그의 성공담은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엔 이런 고전적 신화의 주인공이 차고 넘친다. 거기에 또 하나의 미담만 얹을 목적이면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차적 이유다. 핵심적 이유는 그가 약력(略歷)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양극화 해소는 경제정책에서 주요 목표 중 하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재정의 역할이 중요하다. 관료는 관리에 능하나 위기 때 역동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니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다. 시장이 항상 완벽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상상하는 ‘차갑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경제관료’의 이미지와는 서울과 평양 사이 거리만큼의 간극이 있다.



    스스로 “전형적이지는 않다”고 했는데, 이 말로는 부족하다. 그가 쓴 ‘격변과 균형’에는 비판적 지식인이 썼나 싶은 대목도 등장한다. “부자는 저축을 늘리고 빈자는 빚을 늘렸다. 빚이 늘어나는 경우라도 부자들은 그 빚으로 집과 주식을 사고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내 생활비로 썼다.”

    그렇다고 진보나 비주류라 규정해 버리면 목적지와 반대 방향 지하철을 탄 것 같은 느낌이 인다. 조금 과장하면 그를 만든 8할은 사안을 단선적으로 재단하는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다. “국가부채가 얼마 이하면 괜찮고, 그 이상이면 나라 망한다는 식의 재정 논쟁은 단선적이다.”

    양 갈래 중 하나를 택하는 건 쉽다. 층층이 누적된 한쪽 의견에 적당히 묻어가면 된다. 반대자가 있겠지만 지지자도 많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생각을 고수하면 ‘소신 있다’는 평까지 듣는다. 가령 재정지출에 관해 ‘너는 어느 쪽이냐’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확장 재정이라고 말하거나 건전재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간편한 이분법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좁아 보인다. 전문가의 말조차 정파성의 힘으로 굴절시키는 세태 탓도 있다.

    어려운 건 확장과 건전이라는 양 갈래를 유연히 활용하는 쪽이다. 일단 양 갈래 지지자의 공박에 시달릴 우려가 크다. 그러니 용기도 필요하지만 공박에 맞설 전문성도 갖춰야 한다. ‘묻지마 양 갈래’에 딴소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김 전 차관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또 그는 코로나19 당시 거시경제금융회의 의장이었다. 근래의 인플레이션이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 떼놓고 볼 수 없는 현상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에게 들을 말은 적지 않을 테다.

    그래서 8월 4일 한국금융연구원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길었다. 3시간이 소요됐고 200자 원고지 180매 분량의 녹취가 나왔다. 그를 두고 누군가는 너무 경제관료 같다며 힐난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너무 경제관료 같지 않다며 통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건 그가 34년간 정부에서 일하며 다듬은 관점이 공론의 장에서 다뤄진다면 이 글의 효용가치는 충분하다.

    너무 숨 막히는 현실

    통계청에 따르면 7월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6.3% 오르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1월 이후 23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8월 2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

    통계청에 따르면 7월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6.3% 오르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1월 이후 23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8월 2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

    오일쇼크로 나라가 휘청거리는 혼란을 보며 경제학을 전공했고 공무원이 됐다고 했는데.

    “민심이 흉흉했다. 신문을 일찍부터 읽었는데, 기사 톤이 전반적으로 암울했다. 당시 남덕우(전 국무총리), 김정렴(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경제학 전공자들이 중책을 맡았다. ‘경제학을 한 사람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전면에 있구나’라고 짧은 생각을 했다.”

    1980년대에 행정고시를 준비했는데 눈총 같은 걸 느꼈나.

    “군부독재 시기였으니 정부에 대한 반감 같은 게 있었지. 주위에서 응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 정책가로서 약자와 구조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겠다고 나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흔히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한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뒷물결에 힘이 붙었다. 그가 30대 중반일 때다.

    “외환위기로 선배들이 하던 방식이 일종의 사망선고를 받았다. 나같이 젊은 사람에게도 일할 공간이 많이 주어졌다. 고참 사무관 때 이것저것 제안했는데 다 받아주더라.”

    지금의 행정고시는 이른바 균질화된 엘리트들의 각축장 아닌가.

    “1990년대 외고와 특목고가 생긴 뒤 그 학교 출신이 많아졌다. 경제부처 같은 데는 균질화된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데, 똑똑하고 동기부여도 잘 돼 있다. 다만 내가 농담으로 ‘너희 가계부채와 서민금융 담당하고 있는데, 실제 그걸 알아?’ 그런 이야기도 했다. 금융위나 기재부가 다루는 통계는 하나하나가 사람의 이야기다. (경제관료는) 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똑똑한 친구일수록 어려운 사람과 관련한 부서에 배치했다. 장기연체자 대책이랄지 서민금융 현장 같은 데 참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균질화는 관료 충원뿐 아니라 대학 입학 제도, 더 나아가면 로스쿨 선발 제도까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관료 사회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외고·특목고 출신이 상위 채용 단계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인턴 기회도 부모가 마련해 주고, 커리어도 지도해 주고, 나중에는 부모 인맥도 승계된다고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숨 막히는 현실 아닌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제도는 있어야 한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지만 아주 막막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열심히 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회라는 면에서는 행복한 세대였다.”

    경제학 말고 다른 학문이나 책에 심취한 적은 없나.

    “경제학만큼 역사를 좋아한다. 전공할 생각도 했고. 경제학도 상당히 고도화된 학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건 인류학이나 인간 심성에 관해 다루는 학문이다. 사회학, 정치학도 경제학보다 훨씬 넓게 보고. 복합 위기 국면에서는 경제학만 갖고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 많다.”

    시민으로서의 궁금증은, 기재부 관료들은 폭넓게 보기보다 테크노크라트적인 느낌만 강한 게 아니냐는 건데.

    “경제부처 공무원의 경우 국제기구 경험이 많다. 나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에 있었는데, 대가들이 나오는 세미나가 끝도 없이 열렸다. 5년 동안 100개 이상 들었다. 그런 기회가 있기 때문에 (기재부에도) 다양한 분야에 대해 생각하도록 훈련된 사람이 많다.”

    기재부 관료 하면 차갑거나 보수적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그럼 이것은 허상인가.

    “허상은 아니지. 회사에서도 재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대부분 깐깐하잖나. 그리고 외환위기를 겪었다.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는 재무와 재정을 책임진 부처의 실패지. (기재부에서는)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인식이 뇌리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 깐깐하고 냉정해 보이고, (무언가) 지키는 이미지가 있다. 사람들까지 그렇지는 않다.”

    명분으로서의 건전재정과 현실

    차가움, 보수성과 함께 경제관료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모피아다. 옛 재무부의 영어 약자인 ‘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의 합성어다. 모피아에 대한 반감은, 조금 부풀리면 좌우를 막론하고 널따랗게 퍼져 있다.

    모피아라는 단어가 나온 이유는 경제관료들이 퇴직 후 로펌에 가는 등 전관예우라고 볼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 아닌가.

    “나는 모피아라는 용어는 사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그룹을 범죄자에 빗댄다는 건, 뭐랄까 좀 슬픈 일이다. 언론에서 그렇게 특징을 잡아낼 만한 부정적 요인이 과거에 있었을 테고, 나도 그 그룹에 속해 있으니 되돌아볼 부분이다. 공직에서 물러난 사람들의 전문성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공직자들이) 로펌 가면 어려운 일을 마치 좀 특별한 방법을 통해 해결한다는 인상을 갖는데, 꼭 그렇다기보다 금융사나 기업이 한국서 사업할 때 마주하는 복잡한 규제와 규율이 많다. 그로 인한 어려움을 도와준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재정의 역할을 강조해 온 몇 안 되는 기재부 관료로 분류된다.

    “낙후된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균형발전에서 재정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일찍부터 주목했다. 또 재무부 사무관으로 처음 배속된 과가 국고국 국고과였고 3년 10개월 일했다. 과장 때 정책금융 쪽을 많이 했는데, 재정의 조력을 받아야 하는 업무였지. 가계부채를 담당하는 국장을 하면서 국가부채와 가계부채가 연동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은 가계부채규모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보다 훨씬 크지만 국가부채 규모는 현저히 양호하다. 국가재정의 양호함이 어떤 면에선 (가계에 대한) 재정의 과소공급이라 볼 수 있다. 재정이 적정 크기로 담당해야 할 영역까지 가난한 1~2분위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하려다 보니 가계부채가 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재부 1차관이 돼서도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그의 주장에는 전제가 있다. 재정건전성에 부담을 주는 요인에 대해 구조개혁을 선행해야 한다는 거다. 그는 저부담-고복지의 국민연금을 중부담-중복지 수준으로 개혁하고, 재정준칙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1~2분위 가구를 고려해 재정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가 곱씹어볼 만하다. 재정에 관한 한 그의 이해는 깊고, 구사하는 논리는 설득력 있다.

    그를 만나기 사흘 전,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 예산은 건전재정 기조로 전환해 역대 최고 수준의 지출 구조조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복합위기 상황에서 때 이른 건전재정 기조는 서민에게 부메랑이 되지 않겠나.

    “윤석열 정부가 건전재정에 방점을 두는 건 보수 기조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한데 지금 복합위기 한가운데로 향해 가고 있고 단기간에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서민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2022~2023년 국면에서는 재정의 역할이 평상시보다 커져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기준 중위소득을 예로 들었다. 기준 중위소득은 국민 가구소득의 중간값이다. 이는 76개 복지사업의 수급자 선정 기준으로 쓰인다.

    “기준 중위소득이 5.47% 인상됐다. 문재인 정부 때도 진보 쪽에서 강하게 주장했지만 많이 못 올렸는데, 역설적으로 윤석열 정부 초기에 (문재인 정부에 비해) 두 배 이상 올렸다. 7000억~8000억 원의 재정이 추가 소요되는데도 해냈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본다. 건전재정만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런 결정을 못 했겠지. 명분으로서의 건전재정을 가벼이 볼 건 아니지만, 거기에 딱 얽매여 ‘재정을 이 이상 쓸 수 없다’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금리는 한참 오를 것이다

    김용범 전 차관은 “금리는 한참 오를 것이고, 인플레이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영철 기자]

    김용범 전 차관은 “금리는 한참 오를 것이고, 인플레이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조영철 기자]

    보수 논객들은 문재인 정부가 선심성으로 재정을 풀어 재정수지가 악화했다고 공세를 폈다. 당시 기재부 핵심 고위직에 있었는데.

    “재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모든 논의를 환영한다. 조금 자극적인 공세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 단,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구조와 장기금리는 어떻게 될 것이냐, 연금개혁을 할 수 있느냐, 외국 투자자는 우리 재정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 등 여러 항목을 반영해 입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지금은 마치 정치 구호처럼 돼 있다.”

    그는 판이 달라졌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코로나19는 경제와 금융시장에 전례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뜻이다.

    “한국만 인플레이션 잡는 데 실패한 게 아니다. 전 세계가 마찬가지 상황이다. 분명 금리는 올라간다. 그럴 때 감내 가능한 국가부채의 비율이 높아질 수도 있고 혹은 낮아질 수도 있다. 장기금리의 향방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가 재정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나. 글로벌 시장에선 내년 봄이 되면 금리가 낮아진다고 본다. 나는 시장이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금리는 한참 오를 것이고, 인플레이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2~3년에 한정된 환경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라는 게 내가 신뢰하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다.”

    지난 대선에서 야당(현 여당)은 비상시국에 ‘대통령긴급재정명령’ 권한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이건 세게 써도 된다. 긴급재정명령은 금융실명제나 사채 동결처럼 새어 나가면 정책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경우에 한해 필요했다. 재정이 그럴 필요가 있나? 국회 논의 과정이 머리 아프고 예산 관료와 재정 당국이 뜻대로 안 움직이니 자신들이 다하겠다는 것 아닌가. 난센스다. 골치 아픈 관료들 목소리 듣기 싫어 여야가 긴급재정명령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중독된다.”

    확장 재정을 한다 해도, 어느 수준의 확장이 ‘적정선’이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출이 ‘생산적’인지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몫은 관료가 아니라 정치에 있지 않나.

    “예산안은 관료가 짜지만 예산이 국회에서 논의돼 법률이 되니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정치가 현장에 더 가깝다.”

    유권자들을 만나니까….

    “관료보다 현장 목소리에 훨씬 민감하지. 관료가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다. 국가 거버넌스 차원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그러면 대통령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나는 재정정책의 상당 부분에서 대통령의 톱다운(하향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보텀업(상향식)으로 관료가 가져온 안을 두고 복잡하다 생각해서 문제 제기 없이 의존할 수는 없다. 관료는 현상을 관리하는 역할은 잘하지만 구조가 바뀌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주저한다. 그렇게까지 역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정치 쪽에서 인풋(input)할 수 있다.”

    미증유, 충격, 공포

    그가 공직 인생 말미에 경험한 코로나19는 미증유의 사태였다. 충격, 공포, 공황. 그가 사태를 복기하며 주로 쓴 단어다.

    코로나19가 금융시장 붕괴까지 초래할 만한 위기였나.

    “대공황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미국이 왜 우리를 포함해 9개국과 통화스와프를 동시에 체결했을까. 산타클로스도 아닌데. 그만한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신이 나와 V자 반등에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론 과잉 대응이 됐다. 1년 만에 백신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위기 때 컴프레서 쓰듯 양적완화를 했는데도 잠잠하던 시장이 이제 와서 갑자기 튀어 오른 결과라 봐야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재무부 동의하에 회사채, 기업어음까지 전방위적으로 매입했다. 미 당국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교훈을 얻은 건가.

    “2008~2009년에는 연준과 재무부가 많이 티격태격했다. 의회는 의회대로 시급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도 첨예했다. 2020년에는 빛의 속도로 합의했다. 과거 금융위기 당시 타이밍을 놓쳐 멀쩡한 기업 몇 개를 놓쳤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초기에 시장의 우려를 압도할 만한 대규모 정책 패키지를 내놓는 게 더 싸게 든다는 행동 원칙을 배운 것이다.”

    책에 기재부가 “재정정책 논쟁에서 대체로 예산 기능에 몰두해 거시경제정책의 큰 틀에서 동 사안을 바라보고 외부와 소통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썼던데.

    “기재부는 부총리 부처다. 예산뿐 아니라 거시경제, 정책 조율, 장기 전략도 담당한다. 왜 다른 나라처럼 (국가채무비율) 90~100%로 갈 수 없는지, 왜 우리에게 국가 신용등급이 중요한지 등 차분히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재정을 얼마 써서 위험하다’는 말은 충실히 했지만,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여기가 기재부 나라냐’라는 표현도 나왔는데,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다고 본다. 나도 일원이었으니 자책과 반성을 한 거다.”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3%로 1998년 11월(6.8%) 이후 가장 높았다. 넓은 렌즈로 보자. 모건스탠리 출신인 찰스 굿하트와 마노즈 프라단은 ‘인구 대역전’에서 향후 30년 이내에 인구구조 변화와 역세계화로 ‘장기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 등 노동인구가 급증했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도 활발했다. 탈냉전 이후 저임금 노동시장을 갖춘 중국과 동유럽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편입됐다. 이에 낮은 물가와 이자율이 유지됐다. 오늘날 중국은 초기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대다수 선진국은 고령화 압박에 직면했다. 그러면 물가는 올라간다. 김 전 차관의 책에도 ‘인구 대역전’의 논지가 소개돼 있다. 바이러스와는 별개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대비해야 하는가.

    장기 인플레이션 시대에 접어든다는 주장을 소개했더라.

    “단기적으로는 팬데믹, 수요 팽창과 공급 교란, 에너지 가격, 임금인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인플레이션이 고공행진하는 큰 요인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최근 30년은 젊은 인구가 무한히 공급되던 세계화 시대였다. 중국, 동유럽, 인도가 세계 교역 질서에 편입돼 경제학적으로는 총공급 곡선이 바깥으로 엄청나게 이동했다. 지금은 세계화가 퇴조하고 한국을 포함해 인구가 고령화하고 있다. 최근 30년간 물건을 싸게 만들어서 디플레이션을 조성했던 트렌드가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에는 장기 추세 역시 밑에 좀 깔려 있는 것 같다.”

    시민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뉴노멀(New Normal)인가.

    “그런 셈이지. 세계적으로 공급망이 통일되지 않고 진영별로 나누고 있다. 경제블록이 다시 등장했다. 가장 효율적일지라도 못 믿을 곳에 공장을 짓지도 않고 공급 계약도 맺지 않는다. 물건 가격이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미·중 갈등은 한바탕으로 지나갈 것 같지 않다. 이건 인플레이션(의 요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경제정책을 펼칠 때 양극화 해소를 주요 기준으로 고려해야 하나.

    “엄청나게 중요하다. 양극화가 심한 나라는 수요 진작이 안 돼 성장이 어렵다. 이제는 경제관료도 공부해서 이 주제를 더 넓게 살펴야 한다. 최근 각국 중앙은행이나 IMF 총재 등의 연설을 보면 양극화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많이 등장한다. 마치 정치인처럼 말한다. 왜? 자기들이 편 정책이 양극화를 악화시켜 대중의 반발이 커진 이유도 있고, 또 자기들이 봐도 문제거든. 양극화는 더는 (경제학) 변방에 있는 정치적 용어가 아니다.”

    국가채무 비율은 국가부채가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는 부채는 그대로여도 GDP가 줄면 국가채무비율은 높아진다. 김 전 차관은 책에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의 주장을 이렇게 소개한다.

    “실러는 예산을 펑펑 써서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지기보다 경기침체로 분모인 GDP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국가채무 비율이 높아지는 역인과관계가 더 명백한 경우가 많다고 강조한다.”

    실러의 주장대로라면 위기 때는 재정투자를 해서라도 성장률을 유지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그렇게도 볼 수 있지. 구두쇠처럼 재정긴축을 해도 수요가 사라져 GDP가 줄면 결국 국가채무 비율이 올라가는 셈이다. 분모(GDP)를 지키기 위해 막 쓰자는 건 아니지만, 성장이 꺼지지 않게 돈을 쓰는 건 의미 있는 지출이라는 뜻이다. 도로 만들고 공장 짓는 것만 성장이 아니다. 소비 여력을 보충해 주는 것도 성장이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채무 비율이 망가진 이유는, 물론 흥청망청 지출해서기도 하지만 GDP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졌거나 스페인이나 그리스처럼 금융위기가 와서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지 못해 국가채무 비율이 확 올라간 경우가 그렇다. 국가채무 비율만 잘 관리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전략 담당하는 부처는 달라야 한다

    금융위 부위원장 당시 가상자산 거래소 실명확인 입출금 서비스를 도입하는 정책을 고안했다.

    “2017년 청와대에 정보 라인을 통해 ‘가상화폐가 바다이야기처럼 큰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보고가 많이 올라갔다. 이후 거래소 폐쇄 쪽으로 거의 결론이 났다더라. 그때 한 온건론자가 ‘폐쇄 전에 금융위와 과학기술정통부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니냐’ 했다고 한다. 주말에 대형 서점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사고 (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도 읽었다. 금융감독원을 포함해 이 문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모아 끝장 토론을 서너 차례 했다. 들여다보니 급소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가상계좌(집금계좌)를 통해 거래한다는 거다. 폐쇄 대신 실명 계좌로 거래하는 쪽으로 결론 내고 보고서를 써서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던 국장에게 보냈다.”

    청와대 회의는 거래소 폐쇄로 잠정 결론이 나 있는 상태에서 열리기로 한 터였다. 한데 금융위가 ‘유지안’을 가져갔으니 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쉬이 짐작이 간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건 청와대에 파견된 국장이었다.

    “회의에 가보니 국장이 보고서를 인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이 잘 안되면 나중에 책임질 수 있으니 기록 남기지 말라는 거지. 결국 읽었는데, (청와대 수석들이) 갑론을박했다. ‘거래가 얼마나 줄어드나’라고 묻기에 ‘몇 퍼센트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30년 금융 경험상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내 감으로는 어디로 치고 들어가야 하는지 파악한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는 버럭 화를 내더라. 이 안을 왜 이제 가져왔냐고.(웃음) 이틀 지나 (윗선에) 우리 안이 보고됐다고 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28일에 발표됐다.”

    그 뒤 가상자산 거래량이 크게 줄었다. ‘검은 자금’이 많았다는 건가.

    “안 그러면 이상한 거 아닌가? 혼자 수십 개 계좌를 만들 수 있는데. 코스닥 육성 방안, 안심전환대출 등 큰 히트를 친 정책을 많이 냈지만, 이번처럼 극적으로 효과가 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정부가 우리 일이 아니라고 가만히 두면 그렇게 검은 돈이 들어온다. 마치 서부 개척 시대에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처럼 되는 거다.”

    나와서 관료 사회를 보니 어떤가.

    “편한 구간은 지나왔고 앞으로는 험로다. 그간 쓴 정책과 접근법의 설명력이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공무원 조직에도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점심 먹고 1시 반까지 들어오라는 것만큼 말이 안 되는 규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에 민간을 만나 홍보도 하고 아이디어도 듣는다. 내가 했던 정책의 90%는 남과 이야기를 통해 얻은 영감에서 나왔다. 관료 조직이 다양한 의견을 듣는 메커니즘을 갖춰야 한다. 세종시에 있어 민간과의 교류가 줄어든 탓도 있다. 매주 정해진 일을 하면 평균은 간다. 열심히 일한다는 자기만족도 들고. 그렇지만 바뀐 구조를 볼 수가 없다. 적어도 전략을 담당하는 부처는 달라야 하지 않겠나.”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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