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제주의 딸’ 고두심 “개척 정신 강한 제주人, 강인할 수밖에요”

[인터뷰] 국민 배우 고두심의 제주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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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05-30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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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섬을 떠나는 순간, ‘그 섬 출신’이라는 말은 비주류의 인장(印章)이 됐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배우 고두심은 브라운관의 뒤편에서 섬사람의 운명을 온몸으로 감내했다. 

    “아무래도 섬에서 육지로 와 뿌리내리려니 힘든 점이 많았죠. 제가 방송 생활을 시작할 때 아무리 동서남북을 다 쳐다봐도 제주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그래서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어떻게든지 살아남아야 했고, 뿌리내려야 했고, 제 자신을 곧추세워야 했죠. 제주 출신으로 중앙에서, 더 나아가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런 정신을 갖고 있을 거예요.”

    “제주 하면 고두심 얼굴 떠오른다 해요”

    고두심은 1951년 제주시 남문동(지금의 중앙로)에서 태어나 제주여중·여고를 졸업했다. 중앙로는 제주의 원도심이다. 한때 이곳에는 도청과 교육청, 각급 학교와 상업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뒤 대부분 시설이 신도심으로 옮겨갔다. ‘국민배우’가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는 쇠락의 운명에 직면했다.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시대가 바뀌고, 기존 도심만 개발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은 새로 개발된 데로 눈을 돌리게 되죠. 아쉬움이 없지는 않죠. 원도심이 잘 보존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고두심은 1972년 MBC 공채 5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올해로 연기 인생 48년째를 맞았다. 그는 방송 3사(KBS, MBC, SBS) 연기대상을 모두 수상한 배우이기도 하다. 



    - 고향 제주는 ‘배우 고두심의 연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아무래도 자연에서 살았던 경험 덕에 내 연기도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연기가 인위적이지 않고 계산돼 보이지도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거든요.” 

    - 배우님 연기평 중에는 ‘편안하다’는 평가가 많죠.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이에요.” 

    - 고향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는 거네요. 

    “아휴 그럼요. 많이 끼쳤죠. 일단 건강하잖아요(웃음).” 

    - ‘제주의 딸’이라는 표현이 부담스럽지는 않던가요. 

    “많이 부담스럽죠. 제주도 하면 고두심 얼굴이 떠오른다고 해요. 어깨가 무겁죠. 저를 보면서 ‘제주 사람은 저럴 것’이라고 생각하시니까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 모교인 제주여중·여고에 장학금도 기탁하셨는데요. 

    “학교 다닐 때 장학금을 못 받아봤어요. 커서 돈 많이 벌면 얼마가 됐건 장학금을 주는 사람이라도 돼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어요. 기회가 됐으니 다행이죠.” 


    김만덕 할머니의 초상화와 김만덕 객주터. 김만덕기념사업회는 2월 27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대구시민에게 사랑의 쌀을 전달한다고 밝혔다(왼쪽부터). [김만덕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캡쳐]

    김만덕 할머니의 초상화와 김만덕 객주터. 김만덕기념사업회는 2월 27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대구시민에게 사랑의 쌀을 전달한다고 밝혔다(왼쪽부터). [김만덕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캡쳐]

    고두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조선 정조 시대의 인물인 김만덕이다. 객주업 등으로 부를 축적해 거상(巨商) 반열에 오른 김만덕은 정조 18년(1794)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해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을 구했다. 고두심은 사단법인 김만덕기념사업회의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김만덕기념사업회 활동도 오랫동안 해오셨습니다. 

    “제주뿐 아니라 타 도(道)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분이에요. 김만덕 할머니가 400년 전 인물입니다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살다 가야 하는 모범을 보여주신 어른이에요. 그분의 정신이 너무나 좋아서 사업회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 오래전 드라마에서도 김만덕 할머니 역할을 하셨잖아요. 

    “네. 1976년 MBC 드라마 ‘정화’였어요. 얼굴에 아무리 주름을 만들어도 안 되는 나이(25세)였는데 김만덕 할머니 역할을 했으니 어려움이 있었죠. 그나마 제 목소리가 저음이잖아요. 저음으로 연기하니 시청자께서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고두심은 기부 문화와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김만덕 할머니를 5만 원권 화폐의 인물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바람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 김만덕 할머니 영정 사진도 없는데 어떻게 화폐에 올릴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뒤 영정 사진도 만들고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면 김만덕 할머니처럼 써야 하는 거잖아요.” 

    - 배우님 연기를 통해 육지에도 김만덕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점이 뿌듯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제주가 도세(道勢)가 강하지 않고, 사람도 많지 않아요. 살아가기에도 너무 힘이 드니까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홍보하는 일에 적극 나설 수 없었어요. 저는 지금도 김만덕 할머니를 화폐 인물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거상 김만덕의 삶은 어쩌면 제주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선조들은 너무 척박한 곳에서 생활해 오셨어요. 지금도 제주에는 해녀들이 있잖아요. 그만큼 제주는 굉장히 강인한 정신과 육체노동이 어우러져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에요. 김만덕 할머니가 제주에 계셨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지, 온실에서 곱게 자랐으면 아마 그런 삶은 꿈에도 못 꿨을 수 있어요.”

    “떠나봐야 제주 좋다는 걸 알게 돼요”

    - 제주의 인구가 급속히 늘었습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 텐데요. 

    “글쎄요, 제주도가 제주 사람만 사는 데가 아니니 누구든 와서 살 수 있죠. 제주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은 토박이들의 정신도 한번 공부해 보시면 좋겠어요. 제주를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머무르셨으면 좋겠고요. 잠깐 왔다가 ‘고향도 아닌데 뭐’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거죠. ‘1~2년 있다 가는 건데’ 라기보다는 ‘1~2년 있다 가더라도 이곳은 우리나라의 보물이기 때문에 나도 지키고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 그게 제주를 아끼는 길이니까요. 

    “그렇죠. 그게 아쉬운 점이에요.” 

    - 청년들에게 제주의 어른으로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제주도 분들은 그 척박한 곳에서 스스로를 곧추세워서 살아왔어요. 여러분의 부모님을 생각해도 그렇고, 선대도 마찬가지였죠. 사실 떠나봐야 제주가 정말 좋다는 것을 알게 돼요. 떠나지 않았을 땐 몰라요. 공기 좋고 물 좋고. 그런데 밖에 나와 생활하다 보면 힘든 점이 있죠. 그래서 제주 사람 누구든지 애향심(愛鄕心)은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을 거예요. 

    하나 아쉬운 점은, 생각하던 방향과 달리 제주가 변화하는 거죠. 그런 게 안타깝고, 아쉽고, 불안한 점은 없잖아 있으실 거예요. 그래도 조금 더 애착심을 갖고 목소리도 좀 높여주시면 제주가 우리가 어릴 적 보던 곳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주 분들은 청정 지역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정신도 맑고 개척 정신도 강하니 다 잘 살고 계실 거예요. 늘 고향을 바라보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자체로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제주에 대한 홍보가 될 거예요. 늘 건강하시고요.”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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