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역전’은 로또 복권으로만 터뜨리는 게 아니다.
- 요행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밑바닥 인생을 역전시킨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불굴의 의지, 기발한 발상의 전환으로 ‘인생 대역전’을 감행한 사람들의 통쾌한 이야기.
김씨는 어려운 여건을 뚝심으로 헤쳐내고 ‘된장박이 삼겹살’이라는 독특한 아이템으로 성공한 김사장의 인생 역전 스토리에 감명받아 그와는 다른 아이템이지만 와인 삼겹살 전문점을 열어 역시 성공했다. 그는 “김사장은 꿋꿋하게 한 우물만 파서 성공한 사람”이라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웃돕기 약속해야 체인점 허가
김씨에게 성공을 ‘감염’시킨 김진성 사장은 된장박이 삼겹살 전문점 ‘진성집’ 대표다. 김사장은 부인 유미경(41)씨와 2001년 12월 SBS TV의 ‘인생 대역전’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뒤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그뒤 그가 개발한 된장박이 삼겹살을 먹어 보려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김사장의 역전 성공 스토리는 구수한 된장박이 삼겹살과 버무려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SBS의 ‘인생 대역전’은 2000년 10월 첫 방송된 뒤 지난 5월 중순까지 방영된 휴먼 다큐멘터리. 그간 이 프로그램에는 김진성 사장 등 200여 명이 출연해 성공 스토리를 들려줬다. ‘인생 대역전’이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끈 것은 무엇보다 서민들이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이웃들의 평범하지만 눈물겨운 삶을 실감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목욕탕 때밀이, 호떡장수, 야광펜 발명가, 속옷 디자이너, 조기 퇴직 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실패한 인생은 반전을 거듭하다 결국엔 통쾌한 역전 스토리로 귀결된다. 때로는 눈물을 자아내고,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스토리, 마음만 먹으면 큰 돈 없이도 따라해볼 수 있는 성공 노하우 덕분에 많은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모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인생 대역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역대 출연자들이 매월 한 번씩 모여 자신들이 축적한 성공 노하우를 서로 배우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기회도 갖는다. 말하자면 성공을 ‘전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2001년 1월에 출연한 ‘황가네 호떡’ 황호선(47·출연자 모임 회장) 사장은 “역대 출연자들끼리 사업상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으며, 우리의 성공 노하우를 책으로 엮어서 발간할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숱한 좌절을 딛고 선 역전의 용사로, 또 성공의 전도사로 뛰고 있는 출연자들을 만나보니 이들만의 독특한 노하우가 눈에 띈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성공 법칙 넘버 원’은 돈 쓰는 ‘맛’을 알아야 돈을 번다는 것이다.
전국에 400여 개의 호떡 체인점을 낸 황호선 사장은 매달 불우한 이웃에게 무료로 호떡을 나눠준다. 뿐만 아니라 호떡을 팔아 번 돈을 정신지체자 요양원이나 양로원 등에 성금으로 내고 있다. 1997년 우리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로 들어서면서 주변에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이 늘자 황사장은 이익금 일부를 이들을 위해 내놓기 시작했다.
“호떡 장사는 여름이 가장 안 좋아요. 날도 뜨거운데 누가 뜨끈뜨끈한 호떡을 먹겠습니까. 그러니 날이 더워지면 하루에 10만원 매출도 못 올릴 때가 많았어요. 이웃들에게 약속한 성금을 보내야 했는데, 은행 가기가 여간 망설여지지 않더군요. 꼬박 이틀 동안 일해 번 20만원을 한푼도 안남기고 보내려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게 은행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낯익은 창구 아가씨와 눈이 딱 마주친 겁니다. 결국 온라인으로 돈을 부쳤죠. 하지만 송금 영수증을 받아 쥐니 가슴이 뿌듯했어요. 아편을 맞은 기분이 그런 걸까, 돈을 쓴다는 게 그처럼 기분 좋은 일인 줄 그제서야 알았어요.”
황사장은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보낼 때 자동이체를 하지 않고 반드시 직접 송금한다. 그래야 돈 쓰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호떡을 나눠줄 때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챙긴다. 호떡을 받아든 이들의 표정을 보노라면 이게 장사하는 맛이구나 싶기 때문이다.
그는 황가네 호떡 체인점 운영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이익금의 10%를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하겠다고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서명하지 않으면 체인점 개설을 허가하지 않는다. 다만 체인점주들이 서명한 뒤 이를 실천에 옮기는 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솔선해서 남을 도와야 돈 버는 맛을 알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황가네 호떡’의 황호선 사장. 전국에 400여 개 체인점을 낸 ‘호떡왕’이다.
박씨는 남편을 조르고 졸라 어렵사리 빚을 얻어 양품점을 냈다. 주로 여성복을 떼다 팔았는데, 손님들 중에는 더러 속옷을 구해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고객들의 특이한 행태를 발견했다. 여성복을 구입한 고객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값을 깎아달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속옷을 구입하는 고객들은 한 번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속옷은 값이 비싸도 깎지 않았고, 몸에 좀 안 맞으면 몸을 옷에 맞춰 입었다. 박씨는 이 점에 착안해 속옷 도매업자로 변신했다.
흰색 속옷이 대부분이던 1980년대에 박씨는 색깔 있는 여성 속옷을 하청 생산해 판매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서울 동대문에 4개 점포를 거느린 속옷 전문 판매점 사장이 됐다.
그렇게 해서 지겨운 가난과 결별했지만, 박사장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긴 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자기 손으로 직접 디자인한 속옷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미쳤냐”며 만류했지만, “허락하지 않으면 이혼하고라도 가겠다”고 버티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였다. 남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여자 혼자 몸으로 이역만리를 향해 떠난다는 것 자체가 여간한 각오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제가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유학에 실패했을 거예요. 유복하게 자랐다면 이탈리아 말을 전혀 못하면서 덜렁 이탈리아로 날아갈 생각도 못했겠죠. 더구나 전공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어학 공부부터 마쳐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유학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저 비장한 각오 하나로 일을 저지른 거죠.”
급한 대로 일상적인 언어 문제는 현지 한국 유학생을 옆에 두고 해결했다. 그후 어학 수업을 병행하면서 3년6개월간 속옷 디자이너 전문가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못 말리는 도전 정신은 식을 줄 몰랐다. 그 무렵 일본에서 맞춤 속옷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공부했다. 옷은 몸에 맞춰 입으면서 왜 속옷은 몸에 맞춰 입지 않을까 하는 오랜 의문을 풀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했는데, 일본 여성들이 맞춤 속옷을 입으며 보정된 몸매로 자신감을 되찾는 것을 목격했다. 무리하게 다이어트하지 않고도 속옷 맞춰 입기로 날씬한 몸매를 만들 수 있다면 여성들에게 그만한 희소식이 없을 터. 예상대로 맞춤 속옷은 국내에서도 빅히트했다.
도전이 생존을 담보한다
박명복 사장은 맞춤 속옷으로 한때 연 120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는데,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부도 위기에 몰렸다. 110여 명이던 직원들을 10명이 될 때까지 내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600여 평 사옥은 지하 40평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렇듯 처참한 실패를 맛봤지만, 이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도 직전 TV 홈쇼핑에 출연해 재기의 기회를 잡은 박사장은 한 세트에 70만원 하는 맞춤 속옷을 12만원대로 낮춰 판매하면서 매출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다시 일어선 박사장은 지난해 50억원대 매출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올해는 15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충남 천안에 5000평의 부지를 매입, 청주대 의상학과 교수팀 및 경희대에서 의류 소재를 연구하는 교수팀과 함께할 연구소를 짓고 있다. 그는 마치 ‘앞으로’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일한다.
“큰아이가 딸, 작은아이가 아들인데, 제가 한창 밖으로 나돌며 일에 미쳐 있을 때 작은아이를 울린 적이 있어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친구들은 부모가 와서 우산을 받쳐들고 하교했는데, 혼자 그 비를 쫄딱 맞고 집에 오니 그렇게 서러웠나 봐요. 하지만 지금은 엄마를 너무도 잘 이해해주는 둘도 없는 후원자가 됐지요. 딸아이는 저처럼 이탈리아에서 속옷 디자인을 공부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요.”
맞춤 속옷 전문업체 ‘미인만들기’의 박명복 사장. 껌을 팔아 끼니를 이을 만큼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이에 농심은 목표 시장을 가정에서 옥외로 바꾸고, 야외 판매처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수기를 공급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더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3∼4분 동안조차도 지루하게 여기는 등 계속 거부반응을 보였다. 고심 끝에 농심은 사발면 뚜껑에 ‘숨은 그림 찾기’를 그려넣는 아이디어를 냈고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서울대 윤석철 교수(경영학)는 “농심이 사발면을 살려낸 과정은 거친 생태계에서 성공적으로 진화해온 적자생존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상식적인 얘기겠지만, 성공하는 사람에겐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꼼꼼히 살펴보면 이들은 그리 어렵지 않은 방법을 통해 성공했다. 그런데도 왜 성공한 사람은 항상 소수일까.
묵 파는 신사
전국에 수많은 묵 장수들이 있지만, 모정식품 이충섭(42) 사장처럼 성공한 묵 장수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사장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연 매출 50억원대의 사업체를 일궈냈다. 이사장에게서 찾을 수 있는 노하우 또한 어찌 보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한때 이사장은 하루 담배 한 갑과 세 끼 식사를 때울 수 있는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한량’이었다. 이렇듯 그가 속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 뒤죽박죽이 됐다. 먹고살겠다고 목욕탕 때밀이도 했고, 부모 집을 담보로 사채를 빌려 사업에 나섰다가 말아먹기도 했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낙담한 그는 매일처럼 술로 소일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사장의 여자친구(지금의 부인)는 친정 부모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덜컥 결혼했다. 그에게 가족을 꾸리게 함으로써 다시 일어설 계기를 만들어줄 요량이었다.
그때부터 이사장은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나섰는데, 하루는 시장에서 묵을 파는 행상을 만나게 됐다. 무슨 까닭에선지 그 행상에 이끌린 이사장은 묵에 관심을 갖게 됐다. 행상을 채근해 도토리묵 쑤는 방법을 청해 듣고 나서 그 길로 묵 장수로 나섰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 어렵사리 묵 만들기에 성공한 이사장은 시장에 묵을 팔러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장엔 무수한 장사치들이 북적이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들과 차별화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발길을 붙잡은 것이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신사 정장을 말끔하게 다려 입고 점잖아 보이는 선글라스를 낀 채 시장터로 향했다. 이런 독특한 옷차림이라면 자신이 파는 묵이 뭔가 달라 보일 뿐 아니라 위생적으로 비쳐져 손님들의 눈길도 끌 수 있겠거니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그의 튀는 행색에 호기심이 발동한 고객들은 그가 가져온 묵을 순식간에 다 팔아줬다. 그는 ‘행상 차별화’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제품 차별화’를 위해 머리를 짜냈다. 그래서 우선 ‘도토리묵’이라는 평범한 제품명부터 차별화하는 묘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묵 장사를 하던 1990년 초에는 진짜 도토리로 쑤는 묵이 흔치 않았다. 대부분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묵을 내놓고는 도토리묵이라고 이름만 붙였을 뿐이었다. 진짜 도토리묵을 만들어 팔던 이사장에겐 이름 때문에 제품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는 게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그는 묵을 파는 틈틈이 전국의 맛 있는 묵집을 찾아헤매다 ‘재롱이’라고 불리는 도토리가 찹쌀처럼 찰진 맛을 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도토리묵에 ‘재롱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다.
“시장에 가면 온통 도토리묵뿐인데 저까지 도토리묵이라고 하면 누가 사가겠냐 싶었어요. 내가 파는 묵이 진짜 도토리묵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믿어주겠어요? 그래서 ‘재롱이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주머니, 재롱이묵 사세요’라고 했더니, 손님들이 관심을 갖고 보더군요. 손님들이 모여들면 그제서야 ‘재롱이는 도토리의 일종인데 아주 찰진 맛을 냅니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손님들은 다른 장사꾼들이 파는 도토리묵과 제가 파는 진짜 도토리묵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재롱이묵이 진짜 도토리묵의 대명사가 되는 거죠.”
이충섭 사장의 차별화 노력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사장은 녹두가 들어간 청포묵, 청포에 치자물을 들인 황포묵, 강원도의 메밀묵 전문점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제조법을 배워 만든 메밀묵 등 30여 종의 묵을 개발해 생산하고 있다. 청포묵의 주 원료인 녹두 전분을 구하기 위해 중국 전역을 뒤져 녹두 전분 공장을 찾아내는가 하면 10여 일 동안 인터넷을 뒤진 끝에 한국에선 이미 대가 끊긴 황포묵 제조 방법을 알아내기도 했다.
이사장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 묵 제조업체를 많이 만들었다”며 “결국 이들과도 내가 만든 묵으로 경쟁해야 하므로 끊임없이 차별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차별화의 차별화
그러나 우리는 ‘차별화’란 말을 얼마나 자주 들어왔던가. 차별화란 게 말이 쉽지,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성공에 이르기까지에는 숱한 걸림돌이 있다. 어떻게 하면 차별화할 수 있을까. 차별화에 다가설 수 있는 ‘공식’ 같은 것은 없을까.
이에 대해 이사장은 “51%의 긍정과 49%의 부정에서 성공할 수 있는 차별화 전략이 나온다”고 귀띔해준다. 이사장이 ‘올방개묵’이란 제품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사례를 보면서 그가 제시한 ‘차별화 공식’이 유효한지 살펴보자.
색다른 묵을 찾던 이사장은 올방개라는 재료로 묵을 쑬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100% 성공을 확신했다. 올방개묵은 물밤처럼 달고 깔끔한 맛이 나는 데다, 올방개란 말도 새로워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 만하다고 판단했다.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지만 긍정적 기대는 51%로 접어두고, 이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부정적인 49%’가 무엇일지 예상해봤다.
그는 늘 부정적인 49%의 결과를 알아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소비자가 되어보는 방법을 택한다. 올방개묵을 백화점 식품 진열대에 내놓았을 경우를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니 일단 ‘올방개’라는 말이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다양한 종류의 묵들이 놓여 있는데 소비자들이 그 중에서 하필 낯선 이름의 올방개묵에 선뜻 손을 뻗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이사장은 ‘올방개묵’보다 ‘물밤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밤을 연상케 하는 물밤으로 나가면 아무래도 소비자들의 저항이 적을 듯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한번 더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물밤묵’에서 ‘물’을 빼고 ‘밤묵’으로 이름을 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밤으로 묵을 쑤었으리라고 판단한 소비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낯선 제품이지만 손이 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의 판단은 기대 이상이었다. 소비자들은 밤묵을 대량 구입하기 시작했고, 이사장은 밤묵이 어느 정도 알려지자 ‘물밤묵’으로, 그리고 최근엔 다시 ‘올방개묵’으로 이름을 바꿨다. 올방개묵은 이런 과정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알려지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출했다. 이사장은 “내가 세운 계획은 세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49%쯤 갖고 있어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길라씨엔아이’의 김동환 사장. 작은 아이디어에 착안해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1980년대에 양품점에서 속옷으로 아이템을 바꾼 박사장은 새 책을 살 돈이 없어 동네 헌책방을 자주 기웃거렸다. 하루는 속옷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들른 헌책방에서 외국 잡지 몇 권이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에서 나온 패션잡지였는데, 각양 각색의 속옷 모델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속옷이란 ‘삶아 입는 흰옷’ 정도로 여기던 시절이라 그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후 박사장은 색깔을 입힌 속옷을 그려 제조공장에 보여주고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제조업체에선 ‘누가 이렇게 남사스런 속옷을 입겠냐’며 박사장을 말렸지만, 그는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그가 만드는 속옷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옛 성현들은 “찾고 찾으면 보이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말한다. 박사장의 일화는 돈 되는 정보를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가르쳐준다. 헌책방에는 예전에 유행하던 제품이나 컨셉트 또는 경기 붐을 일으킨 역사적 사료들을 담은 책들이 있다. 가끔 헌책방에 들러 옛날 책을 뒤적이다 보면 오늘날 유행시킬 수 있는,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행운의 열쇠가 눈에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박사장이 헌책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전문성을 갖고 뛰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배울 점을 찾는다.
어두운 곳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야광펜을 개발, 연 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길라씨엔아이’ 김동환(47) 사장도 어디서든 배움을 청하는 사업가다. 요즘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1주일에 한 번씩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헤겔철학을 수강한다. 동아문화센터에선 심리학개론을 공부한다. 그가 철학과 심리학 공부에 빠져든 것은 ‘사업은 인간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김사장이 회사에서 실천하는 것이 있다. 그는 직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털어놓으면 1만원을 상금으로 준다.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드러내기 싫어한다. 숨기는 것이 본성이다. 김사장 자신도 실수투성이 인간이었고, 실수를 저지르고도 숨기기에 급급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실수를 마치 무슨 페스티벌처럼 사내 행사로 정착시킨 데는 이유가 있다.
김동환 사장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서른한 살 때 상경했다. 서울에서 일찍 자리를 잡은 친구의 소개로 가스총 판매업에 뛰어들었고, 심야 시장을 공략한 결과 쏠쏠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심야에는 늘 범죄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이런 두려움을 이용한 그의 시장 공략은 주효했다. 가스총 판매를 시작으로 김사장은 경찰들이 사용하는 장비 시장에 눈을 떴고 이후 수갑, 방범조끼 등을 직접 연구, 개발해 판매했다. 경찰이 공무 중에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의 연구 대상이 됐다.
실수가 터뜨린 대박
하루는 김사장이 밤에 운전을 하다 신호를 위반해 교통경찰로부터 딱지를 떼이게 됐는데, 사방이 캄캄한 탓에 경찰관은 조그마한 플래시를 입에 물고 힘겹게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김사장은 밤에도 불을 켜지 않고 쓸 수 있는 펜을 만들면 힘들지 않게 딱지를 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는 “그게 무슨 수요가 있겠냐”는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 2년 동안 꼬박 야광펜 개발에 매달렸고, 개발비만 5억원을 투입했다. 결국 불을 켜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는 펜을 개발, 첫 해에 경찰청에 13만개를 납품하고 일본에도 50만개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일본에 수출한 야광펜은 고객의 클레임으로 전량 반품됐고 회사는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이는 당시 한 직원이 실수로 불량제품을 납품했기 때문인데, 그 직원은 일본에 납품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지만 실수한 것이 발각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고, 그 때문에 커다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때 이후로 김사장은 사내에 실수를 용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자신의 실수를 발표할 때 어색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만원의 상금을 주는 등 매달 ‘실수 페스티벌’을 열었다. 사업은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이런 점에서 일리가 있다.
이처럼 실수를 용납하는 분위기를 정착시킨 덕분에 그는 지난해 ‘대박’을 터뜨렸다. 회사 직원이 형광펜과 위조지폐 감별펜을 갖고 놀다가 둘을 연결시킨 결과 이상한 광선이 나오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당시 그 직원은 이를 실수 사례로 발표했는데, 김사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야, 이거 대박이야!”라고 외쳤다.
이 실수는 ‘라이트 스틱(light stick)’이라는 인기 상품으로 개발됐고, 지난해 여름 월드컵대회 때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팔렸다. 그때 이후 콘서트가 열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김사장이 개발한 라이트 스틱이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다.
이 스틱이 개발되기 전에는 중간 부분을 꺾어야 빛을 발하는 가느다란 야광 스틱이 주로 팔렸다. 하지만 라이트 스틱이 발매된 뒤 이 야광 스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예전 스틱은 한 번 쓰면 버려야 했지만, 라이트 스틱은 건전지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남이 벌어다 줘야 제대로 많이 벌 수 있다. 김사장이 라이트 스틱을 개발해 떼돈을 번 것도 이처럼 직원의 재치 있는 실수 덕분이었다.
직원들에게 배운다
황가네 호떡 황호선 사장도 이에 동의한다. 그 역시 직원들의 ‘실수 아닌 실수’에서 중요한 사업 성공 노하우를 깨달은 바 있기 때문.
지난해 황사장네 직원 한 사람이 경기도 일산의 지하철 3호선 마두역에 황가네 호떡 프랜차이즈를 한 곳 개설해줬다. 이를 전해들은 황사장은 담당직원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두역 주변은 유동인구가 적을 뿐더러, 가게 주인이 부동산 소개소의 구석자리 한켠을 빌려 호떡 장사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직원의 결정을 존중해주기로 하고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냈다.
하지만 결과는 황사장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인근 아파트에서 쏟아져나온 일명 ‘유모차 부대’가 줄을 지어 호떡을 사가는 등 평소 눈에 띄지 않던 소비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사장은 “호떡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지역은 20∼30평형대 아파트가 몰려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됐다. 순전히 직원의 ‘실수’ 덕분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황사장은 직원들과 함께 배우면서 사업 노하우를 쌓아간다. 눈요깃거리가 많은 재래시장에는 황가네 호떡 체인점을 개설하지 않는다는 점도 황사장이 직원들로부터 배운 노하우다. 성공하려면 자신의 머리뿐 아니라 남의 머리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밑바닥 체험의 교훈
된장박이 삼겹살 전문점 진성집의 김진성 사장은 직접 경영하는 서울 잠원동 가게에서만 연간 7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물론 이는 15개 체인점에 공급하는 된장박이 삼겹살과 소스에서 나오는 매출을 제외한 금액이다. 그가 개발한 된장박이 삼겹살 제조법은 특허를 받아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가 보유한 특허의 가치, 직영점 매출, 그리고 체인점에 공급하는 음식 재료값까지 합하면 웬만한 우량 중소기업 매출과 맞먹을 것이다.
김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밑천은 기초부터 다져준 ‘바닥 생활’이었다. 밑바닥 체험을 뼈저리게 해본 사람만이 아는 노하우가 있다. 그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돈은 돈이 아니다’는 진리다. 밑바닥 생활은 기초를 쌓는 과정이며,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완벽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게 된다.
기업체에 취직한 친구들이 대리나 과장 직급으로 회사에서 중추 기능을 할 무렵 김사장은 전재산 1억원을 주식 투자로 날리고 ‘가망 없는’ 인생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옷 장사로 1억원을 모아 좀더 큰 점포로 이전하려던 그는 1988년 증권사에 다니던 후배를 만났다. 주식 투자 붐이 일던 무렵이었다. 주식에 투자하면 5배가 넘는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후배의 말에 현혹돼 1억원을 고스란히 맡겼고, 그후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그가 가진 주식은 휴짓조각이 됐다.
사업 밑천이 바닥나 더는 사업을 벌일 의욕조차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아버지도 곧 그의 행적을 알게 됐고 결국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기를 다짐하는 편지를 보내자 아버지는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줬다.
고민 끝에 여차저차 해서 삽겹살 전문점을 내긴 했지만, 그는 처음 만져보는 돼지고기를 손님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는 데 거듭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군 복무 시절 선임하사 몰래 생닭 한 마리를 들여와 된장에 2∼3일 동안 박아놓았다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선임하사의 눈을 피해 닭을 숨겨놓는다는 것이 그만 된장 속에 넣어둔 것이었는데, 된장에 푹 전 닭고기 맛이 여간 구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사장은 그 길로 삼겹살을 된장에 넣고 숙성시키기 시작했다.
두 달여 동안 된장의 농도와 짠맛을 조절하고 요리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는 등 다각도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만의 노하우가 담긴 된장박이 삼겹살을 내놓게 됐다. 2001년 ‘인생 대역전’에 출연할 때만 해도 4개에 불과하던 체인점이 지금은 15개로 늘었고, 그가 직접경영하는 잠원동 본점의 매상도 연간 6억원에서 7억2000만원으로 증가했다.
삼겹살 체인점이라면 그저 본점에서 고기를 공급받아 손님들에게 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체인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점주의 노력이 불가결한 요소다. 체인점 경영에서 성공할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은 운영 초기부터 드러난다는 게 김사장의 말이다.
‘눈앞의 돈’에 현혹되지 말라
“저희는 체인점을 개설해준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점주들을 교육시킵니다. 된장박이 삼겹살을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은지, 불의 세기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양념 소스는 어떻게 만드는지 등등을 가르쳐주죠. 체인점주들은 대개 가게만 내면 손님들이 몰려들고 당장 돈을 벌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니 굳이 본점에서 실시하는 교육이 필요없다고 느낄 수도 있죠.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돈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준비’가 가능하도록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손님들이 떨어져요. 하루 매상 날리는 걸 아까워하지 말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연구를 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김사장은 “실패하는 음식점 주인들의 전형은 자신이 내놓은 메뉴를 지키지 못하고 남의 음식점 메뉴를 곁눈질하는 부류”라고 귀띔한다. 예를 들면 해장국 전문점을 내걸고 장사를 하다가 잘 안된다 싶으면 슬그머니 옆집 삼겹살 메뉴를 올리는 식이다. 그래도 매상이 변변치 않아 보이면 다시 두부 메뉴가 첨가된다. 이런 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메뉴는 희석되고 계속 남의 메뉴만 덧붙여진다. 본(本) 요리 외에 이런저런 음식을 여럿 구색으로 내놓는 식당은 “우리집은 장사 안 돼요”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김사장은 “일단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기 위해 전념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2년여 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SBS ‘인생 대역전’은 지난 5월 중순 종방됐다. 출연자가 200여 명을 넘기면서 시청률이 조금씩 떨어진 게 종방 이유였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지난 프로그램을 다시 보려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의 서민들이 꿋꿋하게 역경을 이겨내는 장면을 보면 나도 힘을 얻는다”는 류의 시청자 의견이 지금도 방송국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서울 일부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인생 대역전’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한다. ‘인생대역전’을 보고 재기에 성공한 사람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우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전병래 PD는 “이들의 성공기를 제작하면서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냐는 의문을 자주 던지게 됐다”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배운 점이 많았다”고 흐뭇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