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에서 1달러를 쓰면 5센트는 리자청 회장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아시아에서 최고급 호텔체인을 자랑하는 샹그릴라 호텔은 궈허녠의 소유다. 태국의 은행재벌 정우러우는 사회사업가로도 유명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화교라는 것.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권에서나 조직력을 과시했으나 최근엔 유럽, 북미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엔 세계華商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다. 팽창일로에 있는 화교의 힘과 조직력의 핵심, 그리고 이들과 상생할 수 있는 비결을 담았다.
그러나 셰궈민(謝國民)은 달랐다. 그는 태국 최대 기업이자 화교 기업인 정다(正大)그룹(CP그룹) 총수. 정다는 양돈, 양계, 어류양식, 사료 등 농수산업관련 분야에서 세계적인 규모와 경쟁력을 갖춘 그룹이다. 셰궈민은 언젠가 대륙의 문이 열릴 것으로 믿고 대륙 공략을 준비 중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선언 후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 1980년 1000만달러를 들여 광둥(廣東)의 선전(深) 경제특구와 산터우(汕頭) 특구에 미국 기업과 합작으로 사료공장과 대형 양계장을 건립했다. 이때 셰궈민의 손엔 중국 정부가 준 ‘001호 영업허가증’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이를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여겼다.
다시 장면은 바뀌어 1989년 베이징. 대외개방과 대내적인 개혁 움직임으로 봄이 왔는가 싶었는데, 그해 톈안문 사태로 대륙에 엄동이 몰아쳤다. 수천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서방 국가들은 투자를 ‘올 스톱’하고 사태를 관망했다. 일부에서는 자본을 철수하자는 성급한 논의도 나왔다. 이때도 셰궈민은 중국의 개방정책이 후퇴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다시 남보다 한 발짝 앞서 베이징을 방문, 곤경에 처한 베이징 당국에 힘을 실어준다.
당시 그의 동정을 전한 ‘인민일보’를 보자. 12월13일 야오이린 부총리와 회견, 14일 장쩌민 총서기와 회견, 같은 날 양상쿤 국가주석과 회견, 15일 왕전 국가부주석과 회견 후 조어대 국빈관에서 만찬…. 그를 환영하는 데 국가 최고지도자가 총동원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베이징행을 바라는 중국 최고지도부의 다급함과 기대가 그대로 드러났다. 경색된 분위기를 풀어주는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다.
雪中送炭에 감복한 중국 지도자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 최고당국자들에게 앞으로 10년간의 투자계획을 발표했고 장쩌민과 양상쿤은 그의 중국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1990년 4월에도 다시 베이징을 방문,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을 만나 20억달러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힌다. 당연히 그는 다른 기업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중국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중국인이 흔히 쓰는 말로 ‘설중송탄(雪中送炭·눈 속에 땔감을 보낸다, 즉 어려울 때 도와준다)’인 셈이다. 이 모두 그의 원견(遠見)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정다그룹의 중국 투자 규모(계획 포함)는 100억달러에 이르고 투자분야는 농수산업, 자동차부품, 석유화학, 시멘트, 인프라 분야 등으로 다각화됐다. 셰궈민은 리자청(李嘉誠), 궈허녠(郭鶴年)과 더불어 중국에 많이 투자하는 화상(華商)으로 꼽힌다. 셰궈민의 일화는 화교와 중국의 관계, 그리고 화상의 속성, 사업감각, 정보 네트워크 등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화교 사업가가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동남아와 홍콩, 대만이고 최근에는 미국에도 등장하는 추세다. 인구 규모로 보나 자본력으로 보나 중심지는 동남아다. ‘화인경제연감’(2000/2001년판)이 대만 교포사무위원회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전세계 화교(화인)의 인구는 1999년 기준으로 160여 국가(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에 3372만명이다. 1년 전과 비교하면 48만7000명이 늘었다. 인구증가율 1.47%. 이 추세로 인구가 계속 증가한다고 보면 지금은 3700만~4000만명에 육박했을 것이다. 화교의 고향, 즉 원적지는 광둥과 푸젠(福建)이 단연 압도적이고 저장(浙江) 출신이 뒤를 잇는다.
부자 중의 부자, 리자청
화교의 경제력에 대해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다. 중국 당국은 되도록 작게(경우에 따라선 크게 할 때도 있지만), 구미나 일본의 학자들은 비교적 크게 평가한다. 대만의 ‘전세계 화인경제실력 현상과 전망’이란 보고서를 보면 2000년 해외 화인의 경제력은 대만 전체의 경제 규모와 비슷하다. 화교의 총자산은 1조1588억달러, 화교 기업의 전체 시장가격은 6750억달러, 화교의 연간 총소득은 2700억~3170억달러다. 국내 언론에서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해외화인연구센터의 추정치를 참고해 2조달러로 본다.
화교의 경제력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동남아 화교다. 일본 후지쓰연구소가 몇 해 전 동남아 5개국의 상장주식 중 화교가 보유하는 주식의 점유비율을 조사한 결과 태국은 81%, 싱가포르 81%, 인도네시아 73%, 말레이시아 61%, 필리핀은 50%로 나타났다. 특히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은 인구 구성비에 비춰볼 때 화상의 막강한 자본력이 두드러진다.
전세계 화상 가운데 최고의 부자는 홍콩 허치슨왐포아와 장강실업의 대주주이자 회장인 리자청이다. 그는 1928년 광둥성 차오저우(潮州)부의 산터우에서 태어났다. 세계에서 화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5대 지역에서도 인구나 경제력에서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차오저우방의 세계적인 리더다.
교사 출신인 그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9년 전란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했다. 부친은 리자청이 14세 때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고, 장남인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임시 공원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1945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푼푼이 모은 7000홍콩달러로 조그마한 플라스틱 공장을 열었다. 17세 때였다. 이 회사가 장강공업공사로, 현재 리자청 기업집단의 핵심기업인 장강실업의 모태가 된다. 이 회사가 만든 플라스틱제 완구와 생활용품은 세계적으로 히트해 1957년엔 회사 매출이 1000만홍콩달러 규모에 달했다. 1950년대 후반 유럽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 큰 인기를 얻어 수출량이 급증했다. 덕분에 그는 업계로부터 ‘화왕(花王)’이란 별명을 얻는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958년 홍콩섬의 북단인 북각지역에 토지를 매입, 12층짜리 건물을 지어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1967년 홍콩에서 좌파의 폭동으로 땅값이 폭락하자 싼값에 많은 토지를 매입했다. 1972년 홍콩 주식시장이 최초로 호황기를 맞자 장강공업공사를 상장했고, 주식시장을 통해 조성한 자금을 다시 부동산 투자에 쏟아부었다. 그해 장강의 자산액은 5억3000만달러에 달했고 업계에선 그를 ‘슈퍼맨 리’라 불렀다.
초인적 노력, 미래 안목, 적시 투자
1979년 리자청은 홍콩상하이은행그룹의 허치슨왐포아그룹 주식 22.4%를 취득했고, 1985년엔 영국계 대기업 이화양행이 재정위기에 빠지자 이 기업이 소유한 홍콩전등공사 주식 23%를 확보해 경영에 참여한다. 이어 그는 사업영역을 해외로 확대한다. 1986년 캐나다에 진출, 허스키석유 주식 과반을 확보하며 경영권을 장악했다. 2년 뒤 홍콩의 화교 사업자인 리자오지(李兆基), 정위(鄭裕?)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 세계박람회 개최지 개발권을 확보했다. 유럽의 통신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리자청은 사업범위를 부동산, 항만, 창고, 유통, 통신 분야로 다각화했고 사업지역도 아시아에서 북미주, 유럽, 호주 등 전세계로 확장했다. 중국에도 베이징의 장안가에 ‘동방광장’이란 거대한 건물을 짓는 등 투자를 늘리고 있다. 중국 투자(계획포함)는 200억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리자청 일가의 재산은 91억달러로 세계 화교 중 최고의 거부다. 그는 자신의 초인적인 노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적시 투자, 뛰어난 경영감각으로 세계 최고의 화상으로 부상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의 최대 화교재벌은 린사오량(林紹良) 살림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1916년 푸젠성 하이커우(海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른바 ‘푸젠방’이다. 고향 사숙에서 공부하고 부친이 경영하던 국수가게에서 일하다가 22세 때 고향이 수재에 이어 전란에 휩싸이자 징병될 것을 우려해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숙부가 경영하는 식료품점의 점원으로 4년간 일하고 이후 형제, 친구들과 함께 두부, 콩나물, 의약품, 의류 장사를 하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전란 시기에 장사를 하려면 물품의 안전한 수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 가운데 의약품과 식량을 군에 제공하는 대신, 자기 물건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게끔 군의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절친한 관계를 맺은 군인이 바로 중부 자바섬에 주둔했던 제4군구의 수하르토 중령이었다. 1950년대 초기 중부 자바에서 자카르타로 옮겨온 린사오량은 방직제품을 군대에 납품하기도 하고 자전거 부품에도 손을 댔다.
권력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오랜 친구 린사오량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다. 살림그룹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밀가루의 독점 가공판매와 정향을 독점 수입하도록 한 것이다. 밀가루는 2억명 인도네시아인의 주식이고, 정향은 담배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멘트회사를 건립, 국내 시멘트 수요의 40%를 담당했다. 주로 인도네시아 국민의 의식주와 관련된 산업으로 큰돈을 거머쥐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홍콩에서 금융회사를 인수, 제일태평금융공사로 개명했다.
다시 이를 제일태평그룹으로 확장해 금융업과 함께 전세계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선다. 살림그룹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기 전 계열사가 640여 개에 연간 매출액이 200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샹그릴라 호텔주 궈허녠
그러나 수하르토의 하야와 금융위기로 급격하게 위축된다.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그는 동남아에서 최고 거부의 반열에 올라 그 일가의 재산은 60억달러에 이르렀으나 금융위기 후 10억달러대로 내려앉았다. 전형적인 정상(政商)의 길을 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간판 화교기업인은 궈허녠이다. 전세계 설탕 공급량의 10%를 좌우하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설탕왕(糖王)’. 그의 사업은 설탕에서 일어나 다각화됐다. 그는 리자청이나 린사오량과는 달리 화교 2세 창업자다. 1923년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푸젠 푸저우(福州) 출신이다. 그는 앞서 예로 든 거대 화교재벌과는 달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 그와 그의 형은 조호르바루에 있는 영어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싱가포르의 레이플스대에서도 공부했다. 덕분에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말레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교유의 폭도 무척 넓어 사업을 벌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와 형제들이 처음 세운 회사는 동승(東升)공사로 조호르바루의 자그마한 식품가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주로 쌀과 설탕, 밀가루 등을 팔았다. 전후에 이 회사는 해체되고 1949년 콸라룸푸르에 궈씨형제유한공사를 설립했다. 회사 설립 후 10년이 지나면서 말레이시아에 설탕소비가 급증하자 그는 이전의 쌀, 설탕, 밀가루의 매매에서 사탕수수의 생산과 설탕의 제조로 방향을 전환했고 동시에 국제적인 설탕 교역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설탕에 이어 손을 댄 것이 밀가루다. 1962년 설립한 밀가루 공장은 1990년대 중반에 생산능력이 20만t을 넘어서 국내 수요의 40%를 감당했고 국내 사료시장의 20%를 차지했다. 궈씨형제그룹이 설탕으로 기초를 다졌다면 지금은 호텔업과 부동산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궈허녠은 싱가포르에 관광호텔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1967년 친구에게서 12.5에이커의 특급 요지를 아주 저렴하게 사들여 5성급 호텔을 지었다. 이어 동남아 주요 도시와 중국 대륙의 주요 도시에 ‘샹그릴라’ 브랜드의 호텔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그의 대(對)중국 투자액은 50억달러를 상회한다. 1970년대 말 본거지를 말레이시아에서 홍콩으로 옮겨 지주회사인 가리(嘉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를 통해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 중국의 100개가 넘는 자회사를 관리한다. 동남아에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그의 재산은 60억달러에 달했으나 2000년 46억달러로 줄었다.
그는 양보하고 화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투자하기를 좋아한다. 여기엔 말레이 기업가나 관료 친구, 리자청·린사오량과 같은 화교 친구들이 모두 포함된다.
항상 10분 빠른 전자시계
화교 거상 3명의 성장과정을 짧게 살펴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의 가게 종업원 혹은 구멍가게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힘과 노력 외에 기댈 곳이 없었고 거의 초인적으로 노력했다. 리자청은 어린 시절부터 판매에 능했던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판매의 신’이라 불리는 하라 잇베이(原一平)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는 기자를 연단에 올라오게 한 후 자신의 양말을 벗고는 발바닥을 만져보라고 했다. 발바닥을 만져본 기자가 깜짝 놀랐다. 사람의 발바닥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두꺼웠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누구보다 많이 걷고 뛰어다니다 보니 발바닥이 이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 찻집의 급사로 일할 때 주둥이가 길쭉한 주전자를 들고 뛰어다니며 하루 10시간이 넘게 일했고, 찻집에서 나와 판매원으로 일할 때는 20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그의 고용주는 매년 말 영업실적을 따져 사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1위인 리자청의 보너스는 2위보다 7배나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양복은 십수년이 지난 것이 보통이고 구두도 절반은 낡아서 수선해가며 신는다. 손목에 차는 전자시계는 언제나 10분 빠르게 맞춰놓는다.
화상은 사업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투자에 앞서 여러모로 연구하고 검토한다. 그러나 사업은 흥하기도 하지만 망하는 경우도 많다. 실패해도 이들은 곧바로 꿋꿋하게 일어난다. 어제까지 재벌기업의 총수였더라도 오늘 망하면 행상이라도 나선다.
화상 스리화(施利華)가 바로 그런 예다. 그는 태국 방콕에서 대기업을 이끌던 총수였으나 동남아 금융위기로 완전히 몰락했다. 그는 “나는 이제 대기업 총수가 아니다. 가진 거라곤 빚밖에 없다. 그러나 난 반드시 살아나겠다”며 재기에 나선다.
그가 선택한 것은 샌드위치 행상이었다. 머리에 흰 위생모자를 쓰고 가슴에 샌드위치 상자를 안고 방콕 거리를 누볐다. 하루 7시간씩 거리에서 목이 쉬도록 샌드위치를 팔았으나 판매량은 하루 10~20개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국인의 주식은 쌀이나 쌀로 만든 면이어서 서양풍의 샌드위치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밀고나갔다. “빨리 와서 사세요. 맛이 없으면 돈 받지 않습니다”라며 끊임없이 외치고 다녔다. 그 결과 ‘스리화 샌드위치’ 브랜드가 태국 전역으로 널리 알려져 재기의 길을 다질 수 있었다.
중국인이 자주 쓰는 말에 ‘집에서는 부모에 의지하고, 바깥에서는 친구에 의지한다(在家父母, 出外朋友)’는 말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의 도움과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것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성장한 화교 거상이 앞서 언급한 궈허녠이다. ‘궈허녠 경영’의 가장 큰 특징은 혼자 사업을 하는 법이 거의 없고 다른 사람과 즐겨 합작한다는 것. 이때 그가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욕심부리지 않는다(不貪)’는 것. 그는 자주 “좀 손해 보더라도 결코 욕심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금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많은 동남아 기업인이 그와 합작하기를 원하고, 합작한 이들은 큰 문제 없이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말에 신뢰 없고 義 잊으면 퇴출
홍콩 샹그릴라 호텔의 풀장. 전세계 샹그릴라 체인의 소유주는 말레이시아 화교다.
이와는 달리 거주국 정치권력과의 거래를 통해 사업 편의나 자금 조달 등에서 우대를 받는 화교 기업도 적지 않다. 그 대가로 정치자금이나 주식을 제공한다. 인도네시아의 린사오량과 수하르토의 관계, 그리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 화교 기업인의 유착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국내 정세의 변화로 인해 기업 경영에 큰 타격을 입고 심지어 도산하기도 했다. 정치와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는 얘기다.
화상에게 또 하나 경영상의 중요 항목은 신뢰다. 말에 신뢰가 없고, 이익을 보기 위해 의를 잊으면(言而無信 見利忘義) 화교 사업가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리자청은 “신용과 명예가 사업가의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고 했다.
태국의 은행재벌이자 사회사업가인 정우러우(鄭午樓)는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 근검해야 하고, 둘째 충성해야 하며, 셋째 신용을 지켜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 궈허녠은 “사업에서 욕심내지 않고, 속이지 않고, 지름길을 찾지 않았고, 관시(關係)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했다.
화교들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가족이 경영한다. 조그만 상점도 그렇고 대기업으로 성장해도 가족경영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다. 가업이 커지면 동향인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요직에 앉힌다.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한다 해도 가족경영 원칙엔 흔들림이 없다.
동남아 화교의 80% 이상은 중국의 동남 연안 지역인 광둥성과 푸젠성에서 건너온 후예들이다. 푸젠과 광둥은 당나라 때부터 남양(중국은 지금도 동남아를 이렇게 부르곤 한다)과 교류가 있었다. 계절풍을 타고 마닐라나 말라카 자바섬의 여러 지역과 교류한 내용이 역사서에 많이 나온다. 남양 지역은 그렇듯 낯선 땅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동남아에 나가 자리잡은 친족이나 동향인은 “이곳엔 비옥한 땅이 넘쳐나고 노동력도 많이 필요하다”며 이민자를 끌어들였다. 아편전쟁 이후 해외 이주가 자유화하면서 이민자는 급격히 늘어난다.
화교 네트워크의 핵심, 사묘(寺廟)
동남아에선 인력 수요가 많았다. 식민도시도 건설해야 했고 광산개발, 농장개발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그러나 토착민은 숫자도 적고 대부분 농민으로 땅에 묶여 있어서 자연히 값싸고 성실한 중국 노동력에 주목하게 됐다. 중국의 지방 역사서를 보면 전체 주민의 절반 이 해외 이민을 떠난 마을이 적지 않다.
중국인은 동남아로 이주하면 현지에 동향인을 중심으로 사묘(寺廟)를 짓는다. 이곳에 모여 생업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고향에서 모시고 온 토착신에게 경배도 드린다. 이역의 고달픈 삶을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묘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 기능도 보태졌다.
사묘는 같은 방언을 사용하는 동향인마다 따로 건립했다. 커자(客家)는 커자의 사묘를, 차오저우 사람은 차오저우인의 사묘를 건립해 동향인과 교류한 것. 이들 사묘가 이후 회관, 동향회 등 지연단체, 씨종친회 등 혈연조직, 목재조합, 철물조합 같은 업연(業緣)조직으로 분화, 개편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는 지연조직. 화교는 이렇듯 다양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단결해 협력·합작관계를 만들며 경제력을 키워갔다.
동남아 지역의 대표적인 지연조직으로 5대방이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차오저우 일대 출신의 차오저우방, 광둥성 출신의 광부방, 푸젠지역 출신의 푸젠방, 하이난다오(海南島) 출신의 하이난방, 그리고 광둥 푸젠 장시(江西) 3개 성의 접경지역에 주로 몰려 살던 커자인의 커자방이 그것이다. 5대방 중 경제력이 가장 센 것이 차오저우방과 푸젠방이다. 차오저우방은 태국에서, 푸젠방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에서 우세를 보인다.
태국의 차오저우방은 쌀과 관련된 분야에서 역량을 키웠다. 그들은 쌀 경작을 제외한 전 분야, 즉 수매 운반 가공 포장 저장 수출에 이르기까지를 동향인이 모두 장악해 다른 방에서 쌀 관련 산업에 진출할 엄두를 못 내게 했다. 1930년 네덜란드 식민당국의 통계를 보면 인도네시아 화교의 출신지역과 직업과의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푸젠 출신의 다수인 57.7%는 상업에 종사하고, 커자 출신은 광산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이 35.8%를 차지해 비율이 가장 높은 직업군으로 나타났다. 차오저우 출신은 고무나 향료 같은 농산물 원료 생산에 48.2%가 종사했으며 광부방의 42.7%는 수공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계 실시간 연결망
화교 이민자가 동남아에 정착할 때는 거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시장통에 좌판을 벌이거나 행상으로 나선다. 그렇게 몇 년간의 노력으로 돈이 모이면 작은 가게를 내는데,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자신의 간판을 내걸면 화교사회에서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조금씩 가게 규모를 키우면서 소매에서 도매로 올라서면 화교사회의 유력자가 되고 동향인이나 친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이러한 패턴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남아 각국이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거대 화상자본이 제조업으로 전환했으나, 상업·부동산업·금융업 위주의 화교경제 저변은 그대로다. 화교자본의 상업자본적 특성을 보여주는 면모다.
화상에게 합작은 거액의 자본을 조달하는 수단이지만, 위험의 분산과 정보의 획득을 쉽게 해 사업을 더욱 안정적으로 해 나가는 수단이기도 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화상의 비즈니스 네트워크는 동남아 국가의 동향 조직에 의존하는 데 머물렀다. 그러다 1970년대 동남아의 화상 네트워크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연대가 형성됐고 198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 동남아에 거주하던 화교가 북미와 유럽으로 이민길에 나선다. 그 결과 화교 네트워크가 북미주와 유럽, 동남아시아를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1990년대 이후 화인 네트워크는 한 단계 더 발전해 동남아의 화교 자본과 사업 노하우에 북미 화교의 하이테크 기술을 결합하여 중국이나 제3국에 함께 진출하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회랑을 형성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요즘 전세계 각지의 화교의 네트워크는 인터넷을 통해 24시간 실시간으로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싱가포르 화교총상회가 운영하는 전자 화교 네트워크다. 기업 이름만 클릭하면 주소와 생산품목, 판매현황을 한번에 알 수 있다. 그만큼 화상의 협력속도가 빨라지게 된 것이다.
홍콩 융팡(永芳)그룹 회장으로 커자 문화의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야오메이랑(姚美良)은 구소련의 저명한 경제학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만약 우리에게도 당신들 같은 해외 러시아인이 있었다면 우리의 경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메가 트렌드’의 저자 존 나이스비트도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개혁과 외자 유치에 대해 비교한 후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상당한 정도 해외 화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러시아는 해외 화인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고 했다. 개혁개방 후 중국의 변화된 경제가 해외 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개혁개방 후 대중국 투자규모는 줄잡아 6000억달러 선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일부에서는 70%까지도 봄)은 세계 각지의 화상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산된다.
화상이 중국으로 몰려가는 것은 물론 먹을 떡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땅인 데다 네트워크가 중국대륙에도 형성돼 있기에 사업정보의 취득과 리스크 관리에도 유리하다. 화상의 해외투자는 유통이나 금융 등 주로 상업분야에 치중됐고 자본의 회수기간이 긴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꺼리는 편이었으나 요즘은 부동산, 특히 도시개발과 고속도로, 발전소 건설 등 자본회수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에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자연히 수억에서 수십억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도 나온다.
태자당과 화교의 결합
중국에 화상 자본의 자국 진출은 단순한 자본투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계은행의 ‘2020년 중국’ 보고서는 “해외 화인은 대륙에 돈뿐 아니라 갖가지 비즈니스 지식과 최신 노동력 밀집형 기술, 경영관리기법 및 신경제사상까지 갖고 들어온다”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적 경제운용 경험이 없던 중국으로서는 돈보다도 이런 노하우가 더 소중할 것이다.
또한 화교는 본격적인 중국 투자에 앞서 고향에 학교나 병원을 짓고 길을 닦아주고 다리를 놓는 등 기부를 많이 한다. 성공한 기업가로서 고향에 기여한다는 측면이 크다. 또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홍보 효과가 있고 중국 당국과 관계를 맺는 데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투자에 앞선 이 같은 선행투자를 중국에선 ‘감정투자’라고 부른다.
화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중국 기업에도 필요한 일이다. 중국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전세계에 포진한 화상이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대외투자 규모는 55억달러인데 이중 많은 부분이 화상 본거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화상과 중국 기업은 이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받는 관계가 아니라 호혜적인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태자당’과 화상의 결합이다. 태자당이란 당·군·정부 고관의 자제로 정계와 재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태자당은 대륙은 물론이고 홍콩에서도 대규모 기업 매수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화교재벌은 중국대륙에 투자하면서 태자당의 도움을 받고, 태자당은 홍콩이나 제3국에서 화상의 도움을 받는다. 태자당의 대표주자는 덩샤오핑 패밀리로 덩의 차남 즈팡, 장녀 린, 3녀 룽과, 군의 원로이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왕전의 아들 쥔, 덩샤오핑에 필적할 만한 영향력을 지녔던 천윈의 장녀 천웨이리도 태자당의 대표적 일원이다.
스태프 경영 No, 황제 경영 Yes
세계 이동통신 시장에서 3세대(3G) 방식이 막 태동하던 2003년 하반기. 한국의 LG전자는 유럽 차세대 휴대전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유럽지역에서 3G 서비스 면허를 확보한 리자청의 허치슨왐포아와 물밑 접촉을 벌였다.
허치슨왐포아는 51개국에 20만명의 직원을 둔 다국적기업으로 유럽 통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하고 합작해야 할 대상이었다. 허치슨왐포아는 조직과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고, LG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제품은 있었으나 조직과 유통망이 없었다. 서로 협력할 이유가 충분했다.
LG전자가 허치슨왐포아와 협상을 벌이면서 놀란 게 있다. LG측에선 회사 고위책임자가 협상에 나서기도 하고 실무책임자가 나서기도 했지만, 상대방 협상 테이블에는 늘 최고경영자급이 참석하거나 아니면 최고경영자급과 핫라인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중요 사항은 회사의 최고위층이 직접 결정하는 ‘황제 경영’의 전형이었다. LG 관계자의 말이다.
“화상 기업이 가족경영을 중시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중요한 현안에는 반드시 오너가 결정권을 행사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스태프가 조직을 움직이는 시스템보다 의사결정이 무척 빨랐어요. 덕분에 협상 개시부터 제품을 공급하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 기업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유통망을 꿰고 있는 지역밀착형 통상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점일 것이다. 호주의 양모를 예를 들어보자. 호주 양모는 최상위에서 최하위까지 600여 등급으로 나뉜다. 모직회사 구매부에서 현지에 직원을 몇 년간 파견해본들 양모 품질에 대한 전문용어 몇 마디 배우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런데 호주인은 양모관련 업무를 시작하면 30~40년간 노하우를 쌓아 최고 수준의 전문가가 된다. 이런 전문가에겐 양모의 질이나 생산량, 가격추이 등에 대한 예측능력이 있기에 시장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교도 마찬가지다.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몇 대에 걸쳐 한 곳에 살기 때문에 지역 제반 사정에 정통하고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다. 특히 각종 사회·경제 제도상의 제약과 법규상의 미비점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잘 안다. 또한 가족관계의 확대판이라 할 끈끈한 동족 네트워크가 있다.
화교 네트워크를 뚫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우위에 있는 부분을 그들의 장점과 결합하면 된다. 우리의 앞선 기술력과 제품력을 갖고 동남아로, 제3세계로 들어가 화교들과 손잡아야 한다. 화상 대부분은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합작하면서 자기 욕심만 차리면 결국 사업이 실패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화교 기업은 특히 시장경제가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기업경영, 자금운용, 투자 리스크 평가 및 분산 노하우에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중국이나 동남아에 진출할 때 화교 기업을 활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상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메리트다. 화상과 협력하면서 신뢰를 얻으면 그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고 다른 제3국에서의 사업도 매끄럽게 추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