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현대 사태는 미국과 한나라당 검은손 뻗친 것”
- 김윤규 ‘퇴출’ 직후 美, 대북 금융제재
- 현대아산 대북송금 라인, 마카오에서 오스트리아 계좌로 바꿔
- 北 민경련, 중국은행 단둥지점 ‘광명성’ 계좌로 남한 기업 자금거래 통합
- 김윤규 전 사장 “그런 질문 하시면 전화 끊겠습니다.”
아직은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설(說)’에 불과하지만 현대 파문과 미국의 제재 시점이 공교롭게 맞아떨어질 뿐 아니라 당시 북한이 보인 반응 등을 감안할 때 두 사건 간에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불법 해외자금 세탁창구인 마카오 계좌를 조사하면서 현대 김윤규 전 사장이 북한의 자금세탁 과정에 일정한 몫을 한 단서를 확보했고, 이를 근거로 우리 정부와 현대측에 압력을 행사했으리라는 게 소문의 골자다. 일각에서는 김 전 사장이 모 종교단체의 자금을 세탁해 북한에 전달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현대그룹의 내사(內査) 결과가 그간 김 전 사장의 대북사업 공로를 감안할 때 퇴출시킬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이런 추측을 부채질했다. 현대가 확인한 김 전 사장의 유용액은 11억2000만원이다.
현대 자금 겨냥한 ‘닉시 보고서’
소문의 진원지는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지난 10월20일 “금강산 관광사업 등 현대그룹과 벌여온 모든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발표한 대변인 담화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다.
‘이번 현대 사태에는 미국과 한나라당의 검은손이 깊숙이 뻗치고 있다는 설도 떠돌고 있다. 미국은 최근 여러 차례 북남경제협력관계가 너무 앞서 나간다고 트집을 걸면서 ‘속도조절’이니 ‘핵문제와의 병행추진’이니 하고 압력을 가했다. 현대의 현 상층과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와의 근친관계로 볼 때 남조선에서 떠도는 그들 사이의 밀약설도 전혀 무근거하다고만 볼 수 없다.’
여기서 ‘현대의 현 상층과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의 근친관계’는 현정은 회장과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의 모친 김문희 여사가 김 의원의 큰누나여서 두 사람은 조카-외삼촌 사이다. 북한이 이런 관계까지 파악한 것을 보면 상당기간 관련자료를 수집했고 담화 발표까지 심사숙고한 듯하다.
현대아산 관계자 및 금강산 관광사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대가 김윤규 전 사장에 대한 비리 첩보를 입수하고 내부적으로 정리작업에 들어간 것은 2005년 2월초다. 김 전 사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특혜를 준 금강산 제2온정각(면세점)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중단된 것도 그 무렵이다. 현대아산 한 관계자는 “김 전 사장이 금강산 관광사업과 관련해 아들 및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특혜를 줬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회사 안팎에 나돌았기 때문에 현 회장이 마음만 먹었으면 조용히 정리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한편 그 무렵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반도 담당 래리 닉시 연구원은 “현대의 자금이 북한 고농축 우라늄(HEU) 무기 프로그램 진행을 가속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시 보고서’를 발표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등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현대측 자금이 김정일이 직접 관장하는 북한 노동당 ‘39호실’로 유입돼, 김정일 개인 비자금과 대량살상무기, 미사일 부품 등을 구입하는 데 쓰인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자금거래 창구로 북한의 마카오 계좌를 주목했다. 북한의 해외자금 통로가 마카오 계좌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2003년에는 ‘대북송금 의혹사건’ 특검팀에 의해 현대그룹이 외환은행을 통해 환전한 자금 2235억원을 중국은행(Bank of China) 마카오지점 3개 계좌로 송금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현대가 김 전 사장의 비리혐의 내사에 착수한 것은 2005년 6월말부터 7월초다. 김 전 사장의 노력으로 7월16일 김정일 위원장과 현 회장의 면담이 극적으로 성사되면서 현대 안팎에서는 김 전 사장의 비리 문제도 적당한 선에서 정리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더욱이 북-미간 합의로 7월26일 제4차 6자회담이 1년 만에 재개된 마당에 김 전 사장 문제로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있겠냐는 시각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현 회장은 8월초 김 전 사장의 내사 사실과 일부 비리혐의가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김 전 사장을 향해 ‘칼’을 뽑았다. 김 전 사장의 자진사퇴 형식으로 처리됐지만 사실상 퇴출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북한은 깊은 유감을 표명하면서 8월25일, 현대에 9월부터 금강산 관광객 숫자를 하루 1000명에서 600명으로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한편 9월3일 현대아산 임원 두 사람을 개성으로 불러 김 전 사장의 업무복귀를 요구했다. 물론 현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29~30일로 예정됐던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연기됐을 즈음의 일이다.
인출 사태에 무릎 꿇은 델타아시아
9월초, 이번에는 미국 쪽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미 재무부가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와 마약거래, 불법자금 세탁 등을 차단하기 위해 마카오 내 은행 3곳에 대한 집중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상 은행은 중국은행, 청싱(誠興)은행, 델타아시아은행.
미 재무부는 뒤이어 9월15일 북한이 마카오에서 운영해온 ‘조광무역’이 델타아시아은행을 통해 위조달러를 유통시키고 불법자금을 세탁하는 등 자금을 조달해왔다고 발표한다. 결국 “북한과의 거래에 불법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던 델타아시아은행은 미국의 발표로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하자 20일 북한과의 거래를 잠정 중단했다. 이때는 13일 시작된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19일 발표할 6개항의 공동성명 내용을 놓고 미국과 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다.
공교롭게 4차 6자회담을 전후로 현대는 마카오 내 북한 계좌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전 사장을 퇴출시켜 북한을 자극했고, 미 재무부는 이 계좌에 대한 제재조치를 통해 북한을 압박한 것이다. 이 시기에 평양을 다녀온 한 대북 사업가는 “당시 북한의 회담 연기가 6자회담 의제와 무관한 현대 사태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현대 사태에 대해 유난히 불쾌해했다”면서 “현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직후 김 전 사장을 내친 것을 북한에서는 하늘과 같은 김 위원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북한 일각에서는 현대 사태를 미 재무부의 마카오 계좌 제재조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마카오 소재 은행의 북한 계좌에 대한 미국의 제재로 인해 대북사업을 하는 남한 기업들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 남한 기업이 델타아시아은행 계좌를 통해 북한에 송금해왔기 때문이다.
“북한, 뭔가 오해하는 것 같다”
개성공단을 방문한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오른쪽)과 김윤규 부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 회사 관계자는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불법자금 흐름과 세탁과정을 현대의 대북송금라인을 통해 파악한 것으로 보는 듯했다. 그래서 남한 기업의 모든 송금계좌를 하나로 통폐합하고 민경련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현대아산도 그간 델타아시아은행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대체계좌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현대아산 관계자는 “대북송금에 이용한 계좌가 마카오 소재 은행계좌인 것은 맞지만, 델타아시아은행이 아닌 중국은행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제재와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10월부터는 오스트리아의 다른 은행계좌로 송금하고 있다”면서 “더 이상은 어떤 내용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현정은 회장은 10월20일 북한의 현대그룹 관련사업 전면 재검토 발언 직후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북한이 뭔가 오해하는 것 같다”는 모호한 말만 되풀이했다. 현 회장은 이어 11월10일 개성 현대아산 사무소에서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난 뒤 연 기자회견에서 “북측과 그간의 오해를 풀고 서로의 신뢰를 재확인했다”는 말로 금강산 관광이 정상화될 것임을 시사했다.
현 회장이 말한 ‘북한의 오해’가 현대 파문과 마카오 계좌 제재 관련설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정말 ‘오해’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사안의 직접적인 연관성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북 사업가들 사이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논란의 핵심인 김윤규 전 사장은 최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거취와 마카오 계좌의 관련성에 대한 질문에 “그런 질문하시면 전화 끊겠습니다”라며 답변 자체를 거부했다.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김고중 현대아산 특별보좌역은 “현대 파문과 마카오 계좌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나로서는 알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할 이야기도 없다. 김윤규 사장의 퇴임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