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조 들여 벤처 인수한 구글, 인재만 빼가는 우리 대기업
- 주요 대기업 협력사 이익률 반 토막
- 선진국서 ‘땅콩회항’? CEO 교체, 주가 폭락했을 것
- 경제부처는 베를린, 공정위는 본…독일 배워야
이런 점에서 건강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공간 서비스 ‘토즈’의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이켜보면 나도 국회의원이나 교수보다 기업을 훨씬 오래 운영한 기업인 출신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상생하는 건강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없을까 하는 문제는 나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다음 몇 가지 예를 보면 우리나라의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산업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선진국에서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와는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는 것은 물론, 고객들의 예약 취소 사태가 속출하고 주가도 폭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 이후 대한항공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시장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이익이 ‘땅콩회항’ 사건의 파장을 상쇄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우리나라 산업구조의 한 단면이라고 본다. 한번 1등이 되면 아무리 큰 실수를 해도 1등이 쉽게 유지되는,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 기형적 산업구조이기에 가능하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보면 대기업에서 영화를 기획, 투자, 제작, 배급하고 영화관까지 운영한다. 그러다보니 중소 제작사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새벽이나 심야상영 후 퇴출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결국 대기업, 대형 제작사가 계속 1등을 유지하는, 자연적으로 독과점이 지속되는 구조다.
선진국에선 그렇지 않다. 미국의 파라마운트사는 1948년 정부의 제소로 ‘보유한 영화관을 모두 매각하라’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시장 독과점에 따른 소비자 피해와 산업 발전 저해를 우려한 판결이었다. 그 후 미국은 영화제작사가 영화관을 소유하는 일이 없어졌다. 영화산업은 하나의 예이지만, 대기업의 이 같은 수직계열화 문제는 우리 산업 전반에 걸쳐 있다.
한국 대기업과 공정분배
기업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고통 분담 과정에서, 갑(甲)이라는 이유만으로 을(乙)에게 모든 고통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 2006~2013년 대기업 영업이익률을 보면, 삼성전자는 12%에서 14%로, 현대자동차는 3%에서 8%로 상승했다. LG전자는 3% 정도를 유지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도 영업이익이 크게 올랐거나 현상유지 정도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협력업체는 반대다. 삼성전자 협력업체는 10%→4%, 현대차 협력업체는 6%→3%, LG전자 협력업체는 8%→4%로 반 토막이 났다. 열심히 일한 결과 이익이 나면 공정한 분배가 이뤄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인터넷 분야 공룡기업 구글은 많은 회사를 인수했는데, 직원 수 20~30명에 불과한 인스타그램을 1조 원에 인수한 적도 있다. 작은 벤처기업이 시장에서 선도적인 역할로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는 점, 그리고 이 회사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기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새삼 구글의 ‘정상적인 인수’가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기 때문이다. 우리 대기업은 좋은 기술력의 벤처회사를 보면, 인수하기보다는 핵심 기술인력만 빼간다. 중소기업에서 힘들게 키운 유능한 인력을 월급 두 배 주면서 빼앗아가는 것이다.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작은 회사는 그대로 무너지고, 대기업은 시행착오나 투자비용 없이 기술과 인력을 손쉽게 확보한다.
건강한 산업구조라면 반대의 일이 일어나야 한다. 대기업이 신입사원들을 뽑아 열심히 교육하고, 대기업에서 잘 훈련된 우수한 도전적인 인재들이 새로운 벤처를 창업하고, 이들이 다시 대기업에 인수·합병돼 대기업에 활력과 경쟁력을 제공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돼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다.
30년 전, 미국의 IT업체 중 가장 큰 대기업이던 IBM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중소기업에 하도급을 줬다. 30년이 지난 지금, IBM의 하도급업체이던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회사가 됐다. 2등 업체가 실력으로 경쟁해서 1등이 될 수 있는 산업구조, 치열한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실력으로 1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장환경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한 구조는 소비자는 물론, 대기업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글로벌 경쟁 시대에 대기업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시장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 개혁이 필수적이다. 공정위는 경제부처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싸워야 하는, 준(準)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공정위 권한, 독립성 키워야
나는 과거 독일에서 그곳 공정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독일 통일 후 경제부처들이 베를린으로 옮겼을 때, 공정위는 본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같은 도시에 있다보면 경제부처와 공정위 직원들이 자주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친숙해지면 본연의 역할을 하기 힘들 수 있다고 판단해 다른 도시로 옮겼다는 얘기였다. 미래 유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독일인의 지혜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공정위는 경제부처와 함께 세종시로 이전했다.
공정위가 경제부처에 대한 준사법기관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독립성, 권한,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장을 부총리급으로 격상시키고, 위원들의 상근직 비율을 높이고,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3년 임기를 5년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은 모두 임기 5년을 보장한다. 권력자의 입맛대로 공정위 구성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립성과 함께 권한 강화도 필수적이다. 독과점이 우려되는 기업에 대해 공정위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하다. 30년 전 미국 통신업체 AT·T가 미국 전역에 독점적 위치를 누리고 있을 때, 독점에 길든 AT·T는 치열한 혁신 의지가 떨어지면서 고객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미국 공정위는 이 회사를 지역별로 여러 개의 회사로 강제 분할했고, 미국 통신시장의 공정경쟁 기반을 만들었다. 이 조치가 지금의 통신 강국, 인터넷 강국인 미국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투명성 강화다. 공정위 결정사항은 전체 회의록을 공개해 누가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원칙에 따라 결정에 이르렀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불투명성에 따른 오해의 소지도 줄이고, 유사한 사례의 다른 기업들에도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실력만으로 공정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산업구조와 시장환경을 만드는 것만이, 우리나라가 장기 침체에 빠지지 않고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