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호

바흐의 ‘엄친아’ 큰아들은 왜 시대의 변곡점에서 실패했을까

[음악으로 보는 세상] AI 시대에 돌아보는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삶

  • 김원 KBS PD·전 KBS 클래식 FM ‘명연주 명음반’ 담당

    입력2026-03-12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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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이 로봇과 결합해 인간이 하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25년 우리는 생성형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걸 지켜봤다. 고도의 지적 판단과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겠으나, 그 판단을 위한 중간 과정은 AI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전 세대가 누린 성장의 기회를 우리 자녀 세대는 누리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사이, 어느새 인간의 육체노동을 로봇이 대체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해야 할까.

    전 세계의 부와 지적 역량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면서, 모두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다퉈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오랜 세월 급격한 변화에 빠르게 대응해 온 만큼, 이번에도 늦지 않게 앞서나가길 기대한다. 다만 전례 없는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선, 축적한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공유하는 체계만은 새롭게 정립해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사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 일어난 고전주의 시대

    음악사에도 지금과 같은 큰 변화가 몇 차례 있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변화, 르네상스가 바로크로 이행하는 변화가 대표적이다. 가장 혁신적 변화는 바로크 시대와 낭만주의를 잇는 고전주의 시대에 일어났다. 고전주의 시대는 유난히 짧았다. 바흐가 사망한 1750년을 바로크 시대가 끝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고전주의를 완성한 베토벤은 1770년에 태어나 57세에 사망했다. 바흐와 베토벤 사이에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있고, 하이든 이전에는 바흐의 아들들이 활동했는데 사실 이들은 모두 동시대인들이다.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악보. 위키피디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악보. 위키피디아

    바흐는 즉흥적으로 연주한 음까지 모두 악보에 기록한 최초의 작곡가였다. 나아가 자신이 수집한 악보와 작곡한 작품의 악보를 정리해 자녀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바흐는 인쇄 과정의 초반 작업을 집 안에서 처리하고, 작업이 끝나면 작곡 과정에서 생긴 악보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이 과정을 바흐의 자녀 중 작곡가가 된 네 명의 아들이 고스란히 배웠고, 바흐의 위대한 업적은 그가 남긴 악보와 아들들을 통해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전해진다. 이때부터 유럽에 제대로 된 악보가 본격적으로 축적됐다고 볼 수 있다. 표준화된 음악의 빅데이터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귀로 들은 음악을 바로 악보로 옮길 수 있었던 천재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당시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음악을 익혔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딥러닝을 한 셈이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모차르트를 거치면서 고전주의 음악으로 변모했고,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낭만주의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했다. 교회나 궁정에 소속되지 않고 작곡과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근대적 예술가의 전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이 이미 시작됐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의 일이다. 중산층과 시민이 교회와 궁정이 독점하던 예술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주체로 등장하면서 귀족들의 시중을 들던 예술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공연장을 임차하고 연주회를 열어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악보를 인쇄해 팔 수도 있었다. 유명한 작곡가는 신문에 자신이 작곡할 작품을 미리 공지하고 구독자를 모집했고 귀족과 시민,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구독을 신청했다. 선금을 받기도 했고, 명망 있는 구독자들의 이름은 아예 악보에 인쇄해 출판하기도 했다. 귀족의 후원은 여전히 중요했으나, 베토벤에 이르면 예술가는 공작의 부탁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엔 방송국에 소속돼 있던 프로듀서와 기자들이 독립해 유튜버로 변신하고 있다. 방송국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지만, 유명 연예인들은 방송국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유튜브 채널을 따로 운영하며 구독자를 모은다.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과 장비가 저렴해지고 임차할 수 있는 사설 스튜디오들이 생기면서 방송국이 보유한 고가의 장비들은 오히려 유지비용이 부담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표준화된 기술과 노하우가 축적되고 생산비용이 하락하면서 더 많은 콘텐츠가 시장에 공급되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콘텐츠의 질과 양이 변화하고 수요자가 늘어나는데, 그 결과로 우리의 가요와 드라마는 더는 국내 수요자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에도 비슷한 양상의 변화가 있었다. 독일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유명 작곡가들의 구독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사는 귀족과 음악가, 상인과 시민이었다. 지금도 텔레만 작품 구독자의 명단이 전해지는데, 면면을 보면 계층의 벽을 뛰어넘는다. 하노버의 왕과 런던의 헨델, 드레스덴과 파리의 작곡가들과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이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진정한 계승자, 바흐의 큰아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흐의 큰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1710~1784)는 바로크 음악의 적장자였다. 바흐는 25세에 낳은 큰아들을 유독 아꼈다. 열 살 때 고아가 된 바흐는 같은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큰아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때는 옆에 두고 가르쳤고, 음악 교육을 위한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바흐는 자녀 교육을 위해 라이프치히로 직장을 옮겼고, 세 아들을 당시 독일 최고 대학이던 라이프치히 대학에 보냈다. 

    1750년경 화려하게 장식된 1750년대 오르간. 바흐는 오르간을 연주할 때 큰아들 프리데만을 옆에 두고 가르쳤다. Gettyimage

    1750년경 화려하게 장식된 1750년대 오르간. 바흐는 오르간을 연주할 때 큰아들 프리데만을 옆에 두고 가르쳤다. Gettyimage

    괴테와 니체가 이 학교에 다녔고, 바그너와 슈만도 라이프치히 대학 출신이다. 미적분을 만든 라이프니츠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저자 막스 베버도 라이프치히 대학 출신이며, 메르켈 전 독일 총리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세계대전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의 전후세대가 많은 아이를 낳고 교육을 위해 희생한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듯이, 바흐는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후 아들 셋을 최고 대학에 보낸 가장이었다. 그리고 프리데만은 그런 바흐의 큰아들이었다.

    프리데만은 아버지 바흐의 음악적 유산을 가장 많이,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바흐가 남긴 수많은 제자 가운데서도, 아버지 바흐의 작곡법과 연주 기법을 가장 온전히 체화한 이가 프리데만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즉흥적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법과 대위법을 완벽하게 전수받았다. 프리데만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아버지에게 귀와 손과 사고를 동시에 사용해서 즉흥적으로 음을 조직해 내는 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바로크 시대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다. 

    오르간 앞에 앉아 코랄 선율을 즉석에서 변주해 푸가로 발전시키고, 공간과 예배 분위기에 맞춰 음악을 조정하는 능력으로 따지면 바흐 이후의 세대에서 프리데만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프리데만을 위해 바흐가 직접 만든 교육 노트에는 즉흥연주를 위한 사고의 단계가 담겨 있었다. 특정 음형을 확장하고 화성의 진행을 예측하면서 손이 아니라 머리로 먼저 음악을 설계하는 법은 오늘날로 치면, 단순한 코딩 교육이 아니라 알고리즘 자체를 사고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전경. 바흐는 세 아들을 당대 최고 명문인 이 대학에 보냈다. 라이프치히 대학 홈페이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전경. 바흐는 세 아들을 당대 최고 명문인 이 대학에 보냈다. 라이프치히 대학 홈페이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프리데만

    프리데만은 아버지 바흐의 명성과 실력을 모두 물려받은 채 사회에 안정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1733년, 스물세 살의 전도유망한 청년은 드레스덴의 조피엔키르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됐다. 보수에 비해 일이 많은 직장이었지만, 경력을 쌓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마도 아버지 바흐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드레스덴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문화를 자랑하던 도시였고, 뛰어난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모인 음악의 중심지였다. 즉흥연주와 오르간 연주 능력으로만 놓고 보면 프리데만은 이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독일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의 초상화를 새긴 판화. Gettyimage

    독일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의 초상화를 새긴 판화. Gettyimage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드레스덴 궁정의 음악 환경이 바뀌고 있었다. 18세기 초 드레스덴 궁정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1731년 요한 아돌프 하세가 궁정 악장으로 임명되면서 음악의 중심이 즉흥적 교회 오르간 연주에서 오페라와 관현악같이 악보로 고정된 작품으로 이동했다. 프리데만은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시장에 맞게 정리하는 데에 관심이 적었고, 작품을 체계적으로 출판하지도 않았다.

    1746년, 프리데만은 할레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서도 그는 뛰어난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교회와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교회가 요구한 것은 안정적인 예배음악과 규칙적인 직무 수행이었다. 이미 예배음악으로 사용할 작품들이 악보로 인쇄되고, 출판돼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프리데만에게 굳이 새로운 작곡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데만은 여전히 즉흥성과 개인적 독창성에 최고의 강점이 있는 음악가였다. 교회음악의 표준화가 끝나던 독일의 도시에서 즉흥성과 창작 능력은 빛을 잃었고, 결국 그는 이 자리에서도 점점 고립됐다. 급기야 1750년 아버지 바흐가 죽자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라이프치히에 머무는 동안 교회와 빚어진 갈등은 더 깊어졌다. 1764년, 프리데만은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할레에서 일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말년의 프리데만은 베를린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는 당대 음악가들로부터 바흐의 음악을 가장 잘 아는 음악가로 여전히 존중받았지만, 그가 지닌 뛰어난 지식과 능력만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흥연주의 대가이던 그는 악보의 출판과 유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음악 세계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1784년 생을 마감했다.

    독일 할레에 있는 12세기 성 모리츠 교회 입구를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새긴 판화. 바흐의 큰아들 프리데만은 이 지역의 다른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Gettyimage

    독일 할레에 있는 12세기 성 모리츠 교회 입구를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새긴 판화. 바흐의 큰아들 프리데만은 이 지역의 다른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Gettyimage

    준비한 것이 쓸모없어지는 시대의 전환점

    노력과 재능이 부족해 프리데만이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한 시대가 요구하던 능력과 스펙을 가장 완벽하게 갖춘 인물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엄친아’였다. 문제는 그가 터득한 능력과 스펙이 더는 평가되지 않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했다는 데 있었다. 즉흥연주 기술과 몸에 축적된 숙련은 이전 시대 최고의 경쟁력이었지만, 악보로 고정된 작품과 반복 가능한 결과물이 중심이 되는 순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프리데만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준비한 것이 쓸모없어지는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학생들의 스펙 쌓기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으로 평가되는 성적, 그것으로 취득하는 자격증과 어학 점수, 그리고 대외 활동과 인턴 경험까지 학생들은 정해진 경로 위에서 가능한 한 모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런 준비가 실제로 어떤 능력을 길러주는지, 그 능력이 5년, 10년 뒤에도 여전히 높게 평가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마도 AI가 인간을 빠르게 대체하는 환경에서 특정 도구 사용법이나 형식화된 성취는 프리데만의 즉흥연주처럼 순식간에 의미를 잃을 것이 틀림없다.

    프리데만의 시대에 즉흥연주가 사라진 이유는 사람들이 갑자기 즉흥성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조직과 시장이 재현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프리데만이 겪어야 했던 좌절은 시대 전환기에 이전 시대의 기준에 따라 가장 성실하게 준비한 사람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그 책임은 아버지 바흐에게도 있다. 오늘날 은퇴했거나 곧 은퇴할 베이비부머 세대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AI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고 로봇이 육체노동을 대체할 것이 너무도 명확한 이 시대에, 우리가 배웠던 것을 자녀들에게 그대로 가르치는 이 현실은 너무나 미래가 어둡다. 다음번에는 이 변화에 잘 대처한 바흐의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의 경우를 알아볼 텐데, 결론을 미리 적어보자면 이 둘은 스스로 성장했다.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
    ● 저서: ‘미디어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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