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글로벌 워밍

  • 김민경 동아일보 ‘The Weekend’ 팀장 holden@donga.com

    입력2008-04-03 1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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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워밍

    지구 온난화로 파리가 열대지역이 된다는 것을 풍자한 디젤의 재기 넘치는 광고.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아서”라는 건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옷과 구두가 필요하냐”고 물어볼 때의 내 대답이다. 이 원시적이고 존재론적인 대답에 사람들은 ‘납득’하는 표정을 지어준다.

    그런데 최근 이 ‘현답’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전지구적 온난화, ‘글로벌 워밍’ 때문이다. 여름엔 땀을 배출하기 위해 얇고 가벼운 옷이 필요하고, 겨울 추위를 막으려면 털코트에 털모자, 롱부츠와 머플러가 필요하다는 나의 주장을 봄·가을과 혹한이 사라져버린 요즘 날씨가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겨우내 출동 한번 못하고 현관에서 굴뚝처럼 우두커니 서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내 털부츠를 보며 우리집 식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춥지도 않은데, 이 부츠들은 다 어디에 쓸꼬?”

    패션계에서 글로벌 워밍의 가장 뚜렷한 증거는 모피 부티크 오너들의 우울한 표정에서 찾을 수 있다. 겨울 시즌 어패럴 매출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모피 마케팅을 위해 모피 디자이너들은 촘촘한 밍크의 털을 뽑고, 깎고, 모피 원단을 털실처럼 잘게 잘라 뜨개질을 한 ‘니팅’ 모피 디자인을 대거 내놓았음에도 제대로 대목 장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지난 시즌 가장 인기를 모은 모피 디자인은 소매와 칼라를 없앤 조끼였다. 어떻게 하면 좀 덜 따뜻한 모피 코트를 만드느냐가 디자이너들의 고민인 셈이다.

    모든 톱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남성을 위한 모피를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흑인 랩 가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보이던 털코트를 비즈니스맨들에게도 입혀서 ‘블루오션’을 만들자는 생각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전 지구적 재해인 글로벌 워밍 앞에 백기를 들었나 보다. 2월과 3월에 열린 2008/2009 가을/겨울 컬렉션(늘 이렇게 미리 열린다)은 ‘글로벌 워밍’이 패션 디자이너들의 새 미션이 됐음을 보여준다. 도나 카란, 말로, 피터 솜 같은 디자이너들이 시폰(얇은 실크)과 저지, 레이스 등 봄/여름 시즌에 사용하던 소재들로 가을/겨울 옷을 선보인 것이다. 말로의 디자이너 토마소 아킬라노는 “계절과 상관없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 어느 철이든 날씨에 따라 옷장에서 바로 꺼내 입을 수 있게”라고 말하는가 하면 여성복 브랜드 리즈 클레이본사는 아예 기상학자의 컨설팅을 받는단다.

    글로벌 워밍으로 대표되는 기상이변이 패션업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자 디자이너들은 계절감 없는 옷뿐 아니라 친환경적인 ‘착한’ 상품을 개발하는 데도 열심이다. 유기농 목화를 이용한 오가닉 코튼 제품 론칭이 러시를 이루고 있고, 재활용이 가능하며 지구를 살리자는 메시지를 패턴 대신 써 넣은 ‘쇼핑백’이 ‘잇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늘 재기 넘치는 광고를 보여준 디젤은 발 빠르게 글로벌 워밍을 테마로 한 이미지를 선보여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겨울을 위한 실크 드레스도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다. 또 사계절 구분이 없어진다면 확실히 그렇게 많은 코트나 털구두, 내가 좋아하는 표범무늬 가방은 더 이상 살 필요도 없어질 것이고, 그만큼 절약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름엔 수영복 입고 한강 수영장에 가고 싶고, 겨울엔 굽슬거리는 털코트에 롱부츠 신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고 싶다. 반바지에 달랑 티셔츠 한 장 입고 성탄절을 보내며 즐겁다는 호주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동정했었는가 말이다. 전 지구인이 더운 성탄절을 맞을지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착한’ 소비자가 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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