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빨간 악어가죽 지갑 있나요?

  • 김민경 동아일보 ‘The Weekend’ 팀장 ‘holden@donga.com’

    입력2008-07-04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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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악어가죽 지갑 있나요?
    김희애 송윤아 등 톱스타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패션 어드바이저로 활동하는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씨는 유명한 백 마니아다. 슈트를 즐겨 입는 남성인데도 팔에 에르메스 버킨 백을 걸고 다니거나 샤넬의 숄더백을 매치하기도 한다. 늘 ‘신상’백을 들기에 패션 피플들은 그가 어떤 가방을 들었는지를 보고 새로운 트렌드를 예감한다(더 이상 ‘남자가 무슨 백이냐?’고 하지 마세요. 울룩불룩해야 할 곳은 근육이고요, 아이팟과 다이어리와 USB, 흉측한 열쇠꾸러미와 휴대전화, 그리고 책 한 권이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은 옷 주머니가 아니라 가방이랍니다).

    그런데 완전 ‘신상남’인 그가 8년째 까르티에의 붉은 컬러 지갑을 들고 다닌다. 더 이상한 건 이 지갑이 늘 새것처럼 반짝거린다는 거다.

    “빨간 까르티에 지갑을 가져야 돈을 잘 벌어요, 경험상. 그래서 매년 초에 새걸로 바꿔요.”

    실제로 럭셔리 명품 브랜드에는 이런 행운 마케팅이랄까, 풍수설에 기댄 아이템이 적지 않다. 일본의 럭셔리 소비자들이 ‘한정판’에 목숨을 건다면, 한국에선 풍수 아이템이 럭셔리 부티크의 효자 노릇을 하는 셈이다.

    재운(財運)을 불러온다고 해서 남성들 사이에 인기 있는 대표적 아이템으로 악어 소재 액세서리들이 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악어의 습성 때문에 악어가죽 지갑으로 들어온 돈은 새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한 분들은 악어가죽으로 만든 캐디백을 주문하기도 한단다(너무 무겁다는 브랜드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악어가죽으로 유명한 콜롬보라는 브랜드는 혼수용으로 악어가죽 무늬 함도 내놓았다. 한국적 마케팅의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사업가들은 네모난 모양의 시계보다는 라운드형 시계를 선호한다. 원형이 전통적으로 ‘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정·재계에서는 ‘아 테스토니’라는 이탈리아 브랜드가 인기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들의 단골 브랜드로 유명한데 한국의 고객 리스트는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좌식 방에 앉아 식사를 하며 중대사를 논하는 한국의 특성상, 신발을 정리하는 비서관들을 통해 일종의 ‘셀러브리티 마케팅’이 이뤄진다. 신발 사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매장에 가져오는 남성들이 있을 정도여서, 아 테스토니 관계자는 “선거 전에 같은 모델을 100족 넘게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

    에르메스에도 행운의 아이템들이 있다. 말발굽형 열쇠고리, 말발굽이나 에르메스의 H가 프린트된 넥타이, 네잎 클로버 등이 비즈니스맨들 사이에서 인기다. 수천만~수억원대의 에르메스 가방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해 선물용으로도 많이 팔린다. 에르메스 홍보담당자는 “에르메스의 실크 염색이 워낙 선명하고 맑아서 인상을 밝고, 파워풀하게 만든다. 회의에서 눈에 띄고,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지면 성공할 기회도 많아지니까 행운의 아이템이라는 속설이 확산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복잡하고 심오한 세계에서 풍수 아이템은 더 큰 힘을 얻는다. 골프와 와인, 전문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우며, 생의 진리가 담겨 있다는 두 장르를 이름 하나로 제압한 와인이 있으니 바로 ‘1865’다. 와인을 생산한 칠레의 비냐 산페드로의 설립연도인 1865란 이름이 ‘18홀을 65타에 치라’는 행운의 와인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칠레 와인이 됐다.

    된장녀를 비난하며 합리적 소비를 자랑하는 남성들이 이 같은 행운이나 풍수 아이템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는 것도 흥미롭다. 룸살롱에 가는 것을 ‘사업’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달까, 가문의 명예를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가의 명품으로 휘감는다는 중국 비즈니스맨들과 비슷하달까.

    미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측불가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에르메스나 까르티에가 부적이나 토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템들이 소비계층을 확대해야 하는 다국적 럭셔리 업계에 엄청난 행운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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