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U 효시는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 룩셈부르크 총리, 1970년 단일화폐 도입 첫 제안
- 英, 퀀텀펀드 공격 3일 만에 항복
- 재정난 남·동유럽 국가 유로존 탈퇴 의견 많아
유럽 대륙은 200여 년 전부터 범세계적 문명사회를 이끌었지만, 언제부턴가 ‘유로존’이라고 하면 적어도 경제적 의미에서는 정체(停滯)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사실 ‘그리스 사태’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그리스 신화’ 정도만 빼고는 그리스에 대해 많은 부분이 생소하다. 그리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999년 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 유로의 탄생부터 살펴봐야 한다. 유로의 탄생 배경은 다시 70여 년 전인 세계 2차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영국이 단일통화 유로에서 빠진 뒤 지금까지 ‘나홀로 파운드’를 고집한 배경에는 19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이름도 낯설던 헤지펀드의 공격에 따른 학습효과가 있었다. 그즈음 베를린 장벽을 허물며 탄생한 독일 통일은 정치적으로는 엄청난 이벤트였을지 모르나 당시 유럽 역내 외환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부터 단일하지 않은 나라들이 왜 단일경제권으로 묶인 걸까. 단일경제권 내에서 쓰기로 한 단일화폐를 왜 영국은 굳이 거부한 걸까.
EU의 효시는 1951년 만들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다. 프랑스 외무장관이던 로베르 슈만이 제창해 파리 조약을 통해 만들어졌다. 파리 조약의 표면적 내용은 참가국 간에 석탄과 철강의 공동 시장을 창립하는 것을 골자로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공감대가 투영된 결과였다.
국경 넘어선 시장 통합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 대륙이 전장으로 초토화하는 바람에 전후 미국과 러시아만이 급부상했다. 반대로 유럽엔 한 번 더 비슷한 전쟁이 터질 경우 회복 불능의 공도동망(共倒同亡) 상태로 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비등했다. 이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승전국과 패전국이 구조적으로 이해(利害)를 같이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모았다. 경제동맹을 통한 공동의 정치적 안정이 노림수였던 것이다.
ECSC 참가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 네덜란드 · 룩셈부르크) 등 6개국으로, 현재 EU 체제에서도 가장 강력한 핵심 지위를 보유한 가맹국들이다. 이후 1957년 새롭게 발족한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 Economy Community)는 가맹국끼리 맺은 관세동맹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국경을 넘어선 시장통합의 움직임이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됐다.
1967년 EEC는 기존의 ECSC,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등을 흡수하며 새로운 유럽공동체(EC)로 거듭나게 된다. 1968년에는 특정 품목에 대해서 EC 가맹국 간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기로 합의했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차례로 EC에 가입해 가맹국은 9개국으로 확대되고, 1980년대에는 남유럽의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이 가세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외연을 넓혔다.
터널 안의 뱀
EC가 오늘날의 EU로 거듭난 것은 1993년 마스트리히트(네덜란드의 도시) 조약에 기인한다. 경제와 화폐의 통합은 물론, 공동의 외교정책과 안보정책, 내정과 사법에 관한 회원국의 협조를 약속하는 것 등이 조약의 골자였다. 2년 뒤인 1995년에는 오스트리아 · 핀란드 · 스웨덴이 EU에 새로 가입했고, 2004년에는 폴란드 · 체코 · 헝가리 등 동유럽 10개국, 2007년에는 루마니아 · 불가리아가 가입을 확정했다. 2013년 7월 가입한 크로아티아를 합치면 현재 EU 가맹국은 28개국이다.
EC 체제 안에서 관세장벽이 단계적으로 폐지되자 각국의 관심사는 화폐통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침 독일 마르크화가 급등하고 프랑스 프랑은 절하되는 등 유럽 내 경기가 요동을 치면서 EC 울타리 내에서 관리해 오던 농산품 공동가격제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환율 변동의 피해가 없는 ‘공동체의 안정’이 화두로 떠올랐다.
EC 집행위원회는 경제통화공동체(EMU)를 만들었고, 1970년 룩셈부르크 총리 피에르 베르너는 EMU 특별위원회 의장을 맡아 유럽 단일화폐 제도의 당위성과 로드맵을 그린 이른바 ‘베르너 리포트’를 발표했다. 당시의 고정환율제로부터 10년 후에는 가맹국 모두가 단일화폐를 사용하는 단계적 도입안을 제안한 것이다. 이 ‘혁신적인 안’은 때마침 터진 ‘닉슨 쇼크’와 ‘오일쇼크’로 인해 빛을 보진 못했지만, 이후 1990년대 말 단일통화 유로(Euro)가 도입되기까지 줄곧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EU 가맹국은 각국 통화를 일정한 합의에 의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변동시키는 일종의 ‘역내 공동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며 외환 변동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단일화폐 논의는 2차대전 후 이어진 미국 ‘슈퍼 달러’의 갑작스러운 위상 변화에 맞서는 자구책과 같았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해 금과 달러, 달러와 각국 화폐가치를 각각 고정비율로 교환하는 고정환율제도를 도입했으나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이 달러화의 금 태환 폐지를 선언하면서 변동환율제의 물꼬가 터졌다.
이윽고 1971년 12월 미국은 당시 EC 국가들과 스미소니언 협정을 맺고 환율 변동폭을 ±2.25%씩, 즉 위 아래로 최대 4.5%의 폭을 용인하는 변동환율제를 도입했다. EC 국가들은 여기에 ‘터널 안의 뱀(Snake in the Tunnel)’이라는 독자적 제도를 보완했다. 즉 미 달러 대비 환율 변동은 터널로 보고 ±2.25%를 유지하되, EC 회원국 간의 통화 변동폭은 터널 안에 들어간 뱀처럼 인식하자는 취지에서 ±1.125%만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달러가 폭락하자 ‘터널’은 사실상 의미를 잃은 채 뱀의 움직임만 제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쇄적으로 자국 통화가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 유럽만 억지로 변동폭을 제한하기는 어려웠다.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는 터널이 사라진 ‘스네이크 체제’에 이탈과 복귀를 반복하며 자국 통화를 방어했다.
1979년 환율이 불안정해지면서 독일과 프랑스가 다시금 문제점을 공유하고 스네이크 체제를 보완한 유럽통화제도(EMS, European Monetary System)를 도입했다. EMS는 유로 전(前) 단계의 통화라 할 수 있는 유럽통화단위(ECU, European Currency Unit) 및 환율조정메커니즘(ERM, Exchange Rate Mechanism) 체제 도입 등이 핵심이다.
ECU는 EC 회원국의 통화를 각국 국내총생산(GDP) 및 무역 점유율 등으로 보정해 가중 평균한 일종의 통화 바스켓 혹은 계산 단위라고 말할 수 있는데, 통화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지금의 유로와는 차이가 있다. ECU를 구성하는 통화 비중은 5년마다 갱신되도록 정해졌다. ERM 체제는 역내 2개국 간 환율의 통화폭을 ±2.25%씩으로 기존의 2배로 늘렸으며, 예외적인 경우 ±6%까지 허용키로 했는데, 이탈리아는 줄곧 ±6% 변동폭을 고수했다.
英 · 伊 뒤흔든 ‘統獨 쇼크’
1992년 영국 파운드와 이탈리아 리라는 ERM 체제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1990년 10월의 독일 통일이다. 통일 독일은 동서독 격차를 최대한 빨리 줄이기 위해 동독과 서독 마르크의 교환비율을 1대 1로 정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산업경쟁력이 약한 동독의 체급을 무리하게 올려서 평가하는 바람에 그 상향평가의 대가로 인한 통화 발급 부담은 고스란히 서독이 짊어져야 했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아울러 동독에 대한 적극적 재정 지원으로 인한 재정 부담마저 가중되자 독일 정부는 고금리를 통한 금융긴축정책 카드를 꺼내 든다.
이는 당시까지 유럽에 퍼져 있던 ERM 체제의 관성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불렀다. 당시 독일은 일본처럼 공업국으로서의 강화된 위상을 바탕으로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공고하게 유지됐다. 따라서 넘치는 돈을 가둬둘 필요 없이 저금리로 방치하는 전략을 썼다. 투자자들은 마치 2000년대 초중반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엔화를 팔고 상대적 고금리 통화를 구입해 운용 수익을 높이는 전략)처럼, 마르크를 팔고 대신 고금리인 이탈리아 리라나 스페인 페세타, 영국 파운드를 사서 운용하는 전략을 고수했다.
1992년은 영국 파운드화에 치욕의 한 해였다.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헤지펀드 ‘퀀텀펀드’에 공격당해 통화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바람에 ERM 체제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퀀텀펀드는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에서 벗어난 외화 가치는 언젠가 수정될 수밖에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마침 높은 물가상승률과 강성 노조, 과도한 사회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 이른바 ‘영국병’을 앓고 있던 영국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경제 체력 저하에 따른 환율 저하 요인이 분명함에도 시장 참여자들이 그동안은 ±2.25%의 변동만을 허용하는 ERM 체제, 즉 유럽 역내의 정부 간 합의 때문에 행동에 나서길 주저했다.
독일의 고금리 정책에 따라 시장참여자들이 ‘파운드 매도, 마르크 매수’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란 확신을 가진 퀀텀펀드는 1992년 9월 보유하던 영국 파운드를 시장에 투매하며 일거에 파운드 하락을 부추겼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자국 기준금리를 3일새 10%에서 12%, 15%까지 올렸으나 여타 기관들까지 동참한 연쇄투매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파운드화 가치는 금세 20% 가까이 폭락했다.
영국의 선택은 옳았다?
퀀텀펀드는 특히 차입과 공매도(空賣渡)를 통해 2주 만에 10억 달러, 2년 동안에 2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이익률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쉽게 말하면, 빌린 돈으로 파운드화 매도 포지션(수중에 파운드가 없지만 먼저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일종의 옵션 상품)을 잡고, 파운드가 실제로 하락하면 하락한 가격으로 파운드 현물을 다시 사들여서 포지션을 청산하며 이익을 남기는 방법이다. 옵션 상품 거래는 특히나 차입효과를 큰 폭으로 배가하는 지렛대 전략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파운드화의 타격은 예상보다 더 컸다.
영국은 결국 퀀텀펀드의 공격 3일 만인 1992년 9월 17일 항복을 선언했다. ERM 체제 탈퇴를 공언하고 완전한 변동환율제 이행을 발표한 것이다. 비슷한 공격으로 환율 가치가 폭락한 이탈리아 역시 영국과 함께 ERM 탈퇴를 선언했다. 이 사태로 특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원조 기축통화국’ 영국은 이후에는 기준금리를 다시 큰 폭으로 낮추고 파운드화의 저하를 받아들이며 다시금 국내 산업을 재건하는 구조조정과 개혁에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어차피 국가 간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역내 ERM 체제를 무리하게 유지하느라 부작용이 컸던 것으로 판단했다. 파운드 방어를 위해 고금리 정책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이로 인해 국내산업에 큰 타격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2년의 추억’이랄까, 학습효과가 워낙 강렬한 나머지 영국은 1999년 유럽 공통통화 ‘유로’의 도입에도 마지막까지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5년여가 지난 지금,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가 표면화하면서 당시 영국의 선택은 옳았던 것으로 평가받는 분위기다.
우리에겐 ‘늘 부러운 복지국가’로 인식되던 북유럽 선진국들도 당시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스웨덴은 1992년에 자국 통화 크로네가 공격받자 ERM 체제를 지키기 위해 정책금리를 한때 500%까지 인상하기도 했다. 이후 영국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시장 논리’에 순응한 뒤 ERM 체제를 탈퇴하고 변동환율제로 옮겨간 바 있다. 스웨덴은 1980년대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했고, 일본과 비슷하게 부동산 버블이 형성됐다가 통화 문제가 불거지며 막대한 부실채권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핀란드도 영국 파운드화 공격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6개 ‘小國’은 자동 유로화
1988년 EC 집행위원장 자크 드롤이 앞서의 ‘베르너 보고서’를 계승하는 ‘드롤 보고서’를 작성해 유럽 내 경제 및 화폐 통합에 이르는 3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1990년 7월, 1단계로 EU 가맹국 간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허용됐다. 1994년 1월에는 2단계로 유럽중앙은행(ECB, European Central Bank)의 전신인 유럽통화기구(EMI, European Monetary Institute)가 설립됐다. 3단계로 1995년 12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EU 이사회에서 새로운 통화의 명칭을 ‘유로’로 하는 안이 결정됐다.
마침내 1999년 1월 1일을 기해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11개 나라가 단일통화 유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1년 1월부터는 오늘날 채무불이행 사태를 빚은 그리스가 합류했고, 2007년에는 슬로베니아, 2008년에는 키프로스와 몰타, 2009년에는 슬로바키아, 2011년에는 에스토니아, 2014년에는 라트비아가 합류했다. 모나코, 산마리노 등 6개 소(小)국가는 예전부터 프랑, 마르크, 리라 등에 고정환율로 연동된 화폐를 사용해 자동적으로 유로를 도입하게 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는 유럽 24개국이 ‘유로존’으로 불린다.
유로 도입에 맞춰 1998년 6월에 설립된 ECB 본점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다. 네덜란드 재무장관 출신 빔 도이센베르흐가 초대 총재(1999~2003)를 맡았고, 2대 총재는 프랑스 은행 총재를 지낸 장 클로드 트리셰가 8년간(2003~2011년) 장기 집권했다. 2011년 11월부터는 이탈리아은행 총재 출신의 마리오 드라기가 3대 총재로 집권 중이다. ECB는 유로를 도입한 18개국의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중앙은행 기능을 하고 있는데, 가맹국 중앙은행 총재들은 각각 ECB 하위조직인 정책이사회에 참여하도록 돼 있다.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이사회는 총재, 부총재를 포함한 이사 6명으로 구성된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중앙은행 출신자들은 반드시 의석을 차지한다.
유로의 도입은 정치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문제를 양산했다. 2001년 그리스 이후로 체급이 너무 떨어지는 남유럽 및 동유럽 국가들을 무리하게 한 경제권에 넣은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독일만 ‘남는 장사’
유로존의 최우등생 독일과 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한 그리스를 살펴보자. 유로 도입 전 독일 마르크와 그리스 드라크마는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더 커지는 추세였다. 드라크마의 경우 1954년 1달러=30드라크마에서 2000년엔 1달러=400드라크마로 폭락했다. 반면 마르크는 경제부흥과 풍부한 자본 확충으로 인해 2차대전 이후 줄곧,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절상됐다.
그리스는 탈세와 부패라는 고질적 문제를 등에 업고 있었으며, 특히 유로 가입 이후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상수지가 GDP 대비 마이너스 7~14%의 만성적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반해 독일은 유로 도입 후 경상수지가 더 호전돼 GDP 대비 5~7% 상승을 기록했다. 독일과 비슷한 경제구조, 즉 제조업이나 무역업이 강한 네덜란드와 베네룩스 3국 등도 꾸준히 흑자를 냈기에 이들도 유로의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처럼 선진국이지만 절대적 비교우위 산업이 없는 나라들은 GDP 대비 2~3%의 경상수지 적자를 봤다.
큰 틀에서 보면 독일 외에는 크게 남는 장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로존 전체는 2012년 -0.7%, 2013년 -0.4%에 이어 2014년에야 겨우 0.9%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와 화폐에 이어 재정까지 통합된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국가별 이해관계가 다른 엄중한 현실에 비춰볼 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볼 때 재정이 어려운 그리스나 여타 남유럽, 동유럽 국가들은 차라리 유로존에서 탈퇴한 뒤 자국 화폐로 다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의견이 많다. 자국 화폐 상태에서 일단 충분히 평가 절하한 뒤 다시 유로에 고정환율로 연동(Peg)시키면 역내 공동체로서 최소한의 위상은 유지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는 자국의 약점을 방어할 수 있다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