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병합사’신기수 지음/ 이은주 역/ 눈빛/ 328쪽/ 3만5000원
‘한일병합사’에는 조선의 풍물을 소개하는 사진 외에도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자주 등장한다. 포승에 묶인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한 의병장들, 고문당하는 모습, 교수형을 당한 뒤 흔들리는 시체들, 효수된 목. 왜 사진가들은 이처럼 참혹한 장면들을 열심히 찍었을까? 신기수씨는 설명한다.
“동학당 지도자의 잔혹한 처형과 처형한 후의 사진은 일본에서 온 사진사가 촬영한 것이었다. 조선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사회개혁을 하려는 동학 농민들의 무장봉기를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으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서울과 인천에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종군사진가는 무거운 대형 카메라를 여러 사람이 운반하게 하여 전쟁사진을 찍어서 일본으로 보내 군국주의 선동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일본의 사진은 전쟁과 함께 발전했다.”
이 책의 앞표지는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천황)가 순종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줄 오른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일본 황족의 일원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순종의 동생인 의민태자 이은, 요시히토 황태자, 둘째 줄 오른쪽부터 조중웅, 한 사람 건너 가쓰라 타로(일본 총리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며 한국병합을 성사시킨 인물), 도고 헤이하치로(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제독),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등이 함께 찍었다. 두 달 뒤 조선의 황태자 이은은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들은 3년 뒤 벌어질 한국병합을 알고 있었을까?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경술국치의 주인공들이 자리했다는 사실로도 흥미롭다. 책의 뒤표지는 1945년 8월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투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 책은 일본인이 찍은 사진 속에서 치욕의 우리 역사를 정리한다.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오타베 유지 지음/ 황경성 역/ 동아일보사/ 328쪽/ 1만3000원
한일융화의 상징이 된 정략결혼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은 일본 황족 가문의 딸로 자라나 정략결혼으로 이왕가에 시집가서 특권을 누리다가 종전(제2차 세계대전) 후 평민으로 신분이 하락하여 한일 양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남은 생을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던 한 여자의 일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는 비교적 담담하게 이방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한일관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특히 결혼과 관련하여 망국의 황태자이긴 해도 여전히 많은 재산과 특권을 누리고 있던 이은을 ‘좋은 혼처’로 여기고 결혼을 추진했던 방자의 어머니 이쓰코의 심경과 황족의 경우 나라와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던 방자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는 대목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든 일본 정부는 한일융화의 상징으로 삼아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 결혼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는 이왕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이 책의 역자인 홋카이도 대학의 황경성 교수는 한일 양국의 전후 세대 가운데 이방자라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불행했던 역사를 씻은 듯 말끔하게 청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듯이 시간이라는 비인위적인 도구에 의해 ‘망각’이라는 위안을 얻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망각이 때로는 평화와 평온을 주지만, 확실한 기억이라는 망령은 그런 평화로움을 결코 원하지 않기에 질투하듯 둘 사이의 관계를 들쑤시곤 한다.”
1875~1945년 우리의 모습은 결코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은 치욕의 사진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덮어둔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듯 더 이상 망각 속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00년 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