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대선의 해’에 쓰는 대통령論

국민이 품위 있게 ‘국민노릇’ 할 수 있기를

  • 한수산 작가, 세종대 교수

    입력2007-01-04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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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만찬을 ‘청와대 만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이런 만찬을 ‘a State Dinner’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안다. ‘국가’가 베푸는 만찬인 것이다. 국민은 이런 격조를 그리워한다. 운동권 노래를 합창하며 눈물지었다는 청와대 만찬이 아니라, 국가가 베푸는 만찬에 담긴 격조 말이다.
    • 그 격조야말로 바로 국민의 격조가 되기 때문이다.
    ‘대선의 해’에 쓰는 대통령論

    16대 대선 D-2일인 2002년 12월17일 한 유세장에서 잡힌 유권자들의 표정. 4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스에서 점심을 거저 얻어먹으려면, 아무나 붙잡고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됩니다.”

    오래전 유럽 여행을 하다 그리스에 들렀을 때였다. 그곳에서 철학공부를 하고 있던 청년이 웃으면서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리에서 누군가와 정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면 점심을 사면서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관심의 과잉을 그는 그렇게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치의식 과잉은 어떤가. 점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술 한잔 받으시오’ 하고 소주잔 정도는 건너올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택시를 타면 기사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정치의식 과잉이 지겨워서다. 그것도 지난 몇 년 동안은 택시를 탄 뒤 행선지를 말하고 나면 대통령 이야기 나오는 것이 싫어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다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 저 모임에서 쏟아져 나오던 대통령에 대한 ‘씹어대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투표일인 그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노사모’말고 지금의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다 누구란 말인가. 그들이 모두 청와대나 권력의 구중심처에 몸을 감추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어낸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국민에게는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이 신앙이자 종교가 되어버렸다. 지지자들은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해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다보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대통령에게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을 내보인다. 다른 쪽에게도 편안한 나날이 아니다. 자신의 뜻에 맞는 대통령을 만들어내지 못한 반대자들은 당연히 그 시대를 환멸과 무관심 속에서 보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팡이를 애용하며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다리를 조금 다친 나는 한동안 지팡이를 짚어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어 고생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언론학을 전공한 출판인 친구를 찾아갔을 때도 나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맞이하며 친구는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별것도 아닌데 발을 디디기가 조금 불편하다는 것이 행동을 이렇게 제약할 수가 없다고, 지팡이만 짚어도 이렇게 불편한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의 고통이 어떨지 이해가 간다고 이런저런 고충을 하소연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첫마디는 이랬다. “야, 그러니…선생님은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소린가 했다. 알고 보니 그가 말한 선생님은 DJ였다. 친구의 다친 다리를 보면서 대뜸 ‘선생님의 불편’을 안타까워하던 그의 말에서 느낀 절망감은, 다름 아닌 한국인의 대통령과 정치, 아니 권력에 대한 망국적인 열기와 기대였다. 그것은 종교였다. 하늘의 질서를 갈망하는 사도(使徒)의 말이지 현실이나 정치의 언어는 아니었다. 현실정치를 넘어서서 종교적 치유를 바라는 이런 국민에게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가없는 안락과 평온의 안수를 해줄 수 있겠는가.

    ‘참 알 수 없는 사람들’

    2007년은,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이 임기를 끝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大選)의 해다. 국민적 관심이 대통령선거에 얼마나 쏠려 있는지는 이미 온통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동정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신문지면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흔히 제도권 언론이라고 말하는 지면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누군가가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들이 남긴 아주 대단히 나쁜 업적을 적어주십시오!’라는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했다.

    이런 세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혼자 안 해도 좋을 걱정을 한다. 이번에는 또 누가 대통령이 되어, 얼마나 국민을 괴롭힐 것인가. 불행하게도 내 개인사 속의 대통령은 언제나 국민을 괴롭히고 절망하게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언제 어떻게든, 꿈과 희망으로 우리를 보듬어준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나에게 있어 대통령의 이미지는 언제나 한 곳에 가 머물렀다. 그것은 ‘참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노구를 이끌고 해외로 망명하는 첫 대통령의 모습을 보아야 했던 게 어린 시절 중학교 때였다. 우리 세대의 젊은 날을 온통 장악한(!) 채 공포로 얼룩진 ‘조치’를 이어갔던 18년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그야말로 희화(戱畵)였다. 그 18년의 군사정권만으로도 정말 배가 부른데, 다시 체육관 출신 대통령이라는 희화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고 나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 아둔한 정치적 감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 두 야당 지도자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단 한마디였다. 저분들은 겨우 저런 대통령이 되려고 평생을 살았다는 것인가. 겨우 저렇게 하고 싶어서 그토록 국민을 볼모로 잡으면서 대통령에 집착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시중에서는 솥을 가지고, 혹은 소를 가지고 역대 대통령들을 아프게 희화화해왔다. 어느 대통령은 밥솥을 준비했고 어느 대통령이 밥을 했는데, 어느 대통령이 그 밥을 누룽지까지 긁어 먹고 나자 누구는 밥솥에 ‘코드’를 잘못 끼워서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다. 소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누가 대통령에게 소를 가져오니 어떤 대통령은 그걸 농민에게 보냈는데, 어느 대통령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어느 대통령은 아들에게 주어버리고, 또 어느 대통령은 북한의 국방위원장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 대통령은 이 소를 끌고만 다니지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한마디 더 보태자면, 그 대통령은 국민이 잊을 만하면 ‘나, 이 소 안 가질래!’를 되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찰 없는 대통령

    그러나 이 말들을 속삭이는 마음속에는 다만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어이없는 회한과 울분이 남는다. 그 대통령에게 기대와 지지의 한 표를 들고 투표장으로 향했던 유권자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러나 쓸쓸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오죽하면 내가 찍는 후보는 그때마다 떨어지니 이번에는 아예 떨어지라고 저쪽 사람을 찍어버릴까 생각했다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될 사람에게 표를 더해주지도 못할 정도로 우매한 정치적 감각을 가진 나를 스스로 잘 알기에, 나에게 2007년의 대선에서 이런 대통령을 기다린다는 희망 따위는 애초에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덕목을 가진 대통령, 저런 자질을 가진 대통령과 한시절을 살아보았으면 하는 꿈을 접은 지도 오래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면, 선거제도에 대한 나의 불신이다. 그 어떤 선거에서든 당선된 사람이 낙선한 사람보다 우수하지도 않고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다는 평범하고도 속상하는(!) 이 믿음을 어찌할 것인가.

    지난 여름 정부는 ‘비전 2030’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거기 따르면 2030년이면 우리는 그야말로 낙원의 삶을 누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결코 공감할 수 없었던 국민의 하나다. 오직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1100조원이라는 세금이 쏟아 부어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것이 희망이나 약속이 될 수 없었던가. 거기에서 나는 이 정부의 어떤 의지도 능력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비전 아닌 비전에서는 장밋빛 수치와 세금은 있지만 고통에의 동참을 호소하며 미래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오늘의 희생을 국민에게 간절히 설득하는 대통령의 의지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앞장서서 이렇게 나가겠습니다’하는 대통령의 성찰(省察)이 없는 정부에 무엇을 기대하라는 것이었을까. 어느 역사에 고통 없는 미래가 있으며, 오늘의 희생이 없이 이루어진 약속이 있었던가.

    ‘대선의 해’에 쓰는 대통령論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인천의 한 거리에서 청중에게 둘러싸인 채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국가 기간방송이자 공영방송에 정문으로 출근조차 하지 못하면서 역주행을 해서야 회사로 들어가는 바로 이런 사람을 온갖 억지를 마다하지 않으며 다시 사장에 앉히는 정부에서 대통령이 한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 2007년 대선의 과제 하나는 분명해진다. 오늘의 걱정을 국민과 함께하고 내일을 위해 국민과 고통을 함께 나눌 대통령이다.

    님, 노릇, 질

    헤아려보니 나도 어느새 참 많은 대통령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run for the Presidency) 선출되어(be elected President) 취임한(be sworn in as President) 사람이 ‘나, 이 짓 못해 먹겠다’는 나라에서까지 살게 되었다.

    우리말에는 재미있는 의존명사나 접사가 있다. 사람, 신분, 행위 혹은 맡은 바 구실 등에 붙어서 그것을 하는 사람에서 그 행위까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주는 말들이다. 님, 노릇, 놈, 쟁이, 꾼, 질 같은 것들이다.

    ‘님’은 직분이나 신분 혹은 그 대상을 인격화하여 높인다. 선배님이나 선생님이 그 예다. 근자에 이렇게 격상된 것에는 기사님과 고객님이 있다.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거나 아주 능숙할 때는 ‘꾼’이라는 말이 붙는다. 술꾼이 대표적인 예라면 같은 이유로 정치꾼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도 국회의원꾼이라는 말은 없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 말에 상대를 속된 말로 낮춰 부르는 의미가 덧붙어 상인을 장사꾼이라고 하면 심한 모욕이 된다. 때밀이를 청결사라고 부르는 현실에서는 더욱 가당치도 않다.

    나쁘기로는 ‘질’이 제일 아닐까 싶다. 어떤 도구나 신체의 일부분 혹은 명사에 붙어서 그런 일 또는 행위를 의미하는 이 말은 참 널리 쓰인다. 걸레질, 손가락질, 주먹질이 있는가 하면 도둑질에 선생질, 싸움질도 있다. 이런 말들 가운데서도 재미있는 것이 노릇이다. 직업이나 직책에 이 말이 붙을 때는 좀 낮잡아 이르는 말이 된다. 군인노릇, 경찰노릇, 선생노릇, 임금노릇이 그렇다.

    이 말들에 대통령을 대입해서 대통령질이니 대통령노릇이니 하는 불경을 말할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다만 다음 대선에서 오직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대통령노릇이라고는 비하해도 좋으니 제발 국민이 제대로 국민질도 하고 국민노릇도 해서 국민님으로 격조를 유지할 수 있게 할 대통령이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만찬을 ‘청와대 만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이런 만찬을 ‘a State Dinner’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안다. ‘국가’가 베푸는 만찬인 것이다. 국민은 이런 격조를 그리워한다. 운동권 노래를 합창하며 눈물지었다는 청와대 만찬이 아니라, 국가가 베푸는 만찬에 담긴 격조 말이다. 그 격조야말로 바로 국민의 격조가 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열광

    3선개헌에 반대하던 학생시절의 시위를 제외하고, 나는 대통령선거에 관한 한 ‘내 한 표’ 이외에 어떤 정치적 의사를 표출해본 적이 거의 없이 살아왔다. 그것은 정치적 냉소주의라기보다는 기대하고 열광할 대상을 찾지 못한 내 불행에 더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도 정치적 의사를 거리에서 표출한 적이 있다. 단 한 번, 3김이 격돌한 대선 때 나는 여의도에서 열린 한 후보의 유세에 참석했다가 지지자들과 함께 시청 앞까지 걸은 적이 있다. 한강을 건너, 마포를 지나, 시청 앞이라니. 택시를 타고 가도 먼 그 길을 무슨 정신에 구호를 따라 외치며 걸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이제 되돌아보면 나는 그때 그 후보가 내건 어떤 상징에 매료되어 있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내 청춘을 그토록 억누르며 어둡게 했던 시대에 대한 분노였고, 그 분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내걸린 ‘군정종식’이라는 상징이었다.

    1955년 미국의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 42세의 흑인 재봉사 로자 파크스는 비오는 날 퇴근길의 버스에서 올랐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뒷자리로 가라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앨라배마에서는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흑백분리 정책에 의해 버스 앞좌석 네 번째 자리까지는 백인만이 앉을 수 있었고 흑인의 좌석은 뒷자리였다. 중간좌석은 백인이 없을 때만 흑인이 앉을 수 있었다. 이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는 체포되었다. 이에 격분한 흑인 인권운동가들은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며 381일에 걸친 긴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때 이 운동을 이끈 젊은 목사가 바로 26세의 마틴 루터 킹이다.

    흑인 민권운동의 기폭제로 기억되는 이 운동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파크스 여사가 한 일은 단지 일어서서 버스 몇 자리 뒤로 옮겨가지 않은 작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몇 걸음은 흑인 인권운동사의 거대한 족적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선구자 혹은 지도자가 이끌어야 할 희망의 약속인 것이다. 상징인 것이다. 훗날 할머니가 되어 백악관에 초청된 로자 파크스 여사를 두고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분이 지금 백악관 제 옆자리에 앉아 있습니다’라는 뛰어난 레토릭을 구사하여 미국인을 즐겁게 했다.

    35세의 나이에 세계인의 찬사 속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에 찬연한 자취를 남기며 그의 생일이 미국의 국경일로 지정된 킹 목사가 이끈 운동의 핵심도 ‘상징’이었다. 그의 수많은 행진이 그것을 웅변한다.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걸었다. 마지막에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워싱턴 대행진도 다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같은 흑인민권운동에 몸 바쳤고 똑같이 암살의 비운을 맞아야 했던 지도자로 말콤 X가 있다. 킹 목사가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운동을 이끈 데 반해 그는 흑인의 무장과 폭력적 저항도 배제하지 않었다. 그 말콤 X는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하자 “나 또한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also)”라고 외쳤다.

    ‘그가 있어 그것이 시작됐다’

    2007년의 대선을 바라보며 나 또한 차마 버릴 수 없는 꿈을 생각한다. 이 꿈은 단순하다. 나는 ‘그가 있어 그것이 완성되었다’는 ‘실적’을 내세울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에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상징’을 만들어줄 대통령을 기다린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내걸었던 모든 실패한 정책은 그것을 상징으로 내걸고 꿈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자기 당대의 실적과 영광으로 만들려고 했던 데에서 비롯하지 않았던가.

    ‘대선의 해’에 쓰는 대통령論
    한수산

    1946년 강원도 인제 출생

    경희대 영문과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제1회 오늘의 작가상, 36회 현대문학상 수상

    現 세종대 국문과 교수

    주요 작품 : 장편 ‘부초’, 3부작 ‘유민’, 5부작 ‘까마귀’ 등 80여 권


    누군가 다음 대통령으로 ‘국격(國格)을 높일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격(人格)과 대비해서 국가의 격조를 이야기한 것이라면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거기에 국민격(國民格)도 끌어올릴 수 있는 리더십을 바라고 싶다. 우리는 지난 세월 법적·도덕적 정당성 위에서 선출된 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이 준동하는 나라에서, 돈 줘가면서 정상회담을 하는 나라에서, 국군의 통수권자가 이 노릇 못해 먹겠다는 나라에서, 국민의 존엄과 격조는 어디에 있었던가.

    나는 지금 그 존엄과 격조가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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