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산업은 ‘무모한’ 사업이다. 엄청난 규모의 R&D가 필요할 뿐 아니라 그 결과를 확신하기도 어렵다. 정부의 역량 또한 필수요소다. 그래서 신약 개발은 몇몇 선진국 거대 제약회사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하지만 정책 탓, 여건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 나름의 현실적 접근법을 찾아 파고들면 길이 보인다.
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를 개발한 LG생명과학의 주요 임원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양흥준 사장
우리 사회가 이만한 수준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우리도 잘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정부, 기업,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빨리, 많이 생산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있었다. 눈여겨볼 만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많이 생산해야 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량을 많이 생산하면 됐고, 옷감을 많이 생산하면 됐고, 집을 많이 지으면 됐다. 그밖에도 선진국에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을 생산 대상으로 삼으면 됐다. 그렇게 해서 TV, 냉장고, 자동차, 선박 같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하드웨어 산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결과 우리 사회와 경제를 오늘날의 모습과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주요 산업의 경쟁력이나 생산능력을 고려하면 한국 경제는 낮게 잡아도 세계 7∼8위는 되어야 할 터인데, 우리 경제 규모는 여전히 12∼13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도 1만달러 수준을 오락가락한 지가 10년이나 됐다. 지난해에도 9000달러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국민소득 1만달러 국가에서 탈피해 2만∼3만달러 수준으로 경제가 성장,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산업
40년 전, 국민의 기초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산업의 불모지였던 상황에서 오늘날과 같은 산업국가를 건설해낸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 주역인 우리의 선배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드웨어 산업을 이끌어오면서 산업국가 건설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기초생활 수준이 확보된 지금 하드웨어 산업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다가는 경제 발전에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오늘날 30만명의 우리 자녀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간 2만달러를 쓴다고 보면 한 해 60억달러가 해외 유학비로 지출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병해 세계 경제가 치명타를 맞았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던 시절에는 가족 중에 이런 환자가 생겨나도 애만 태울 뿐 옆에서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학이 발달해 치료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치료와 간병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렇듯 자녀를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일, 사스와 같은 질병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 등은 자동차나 배를 만드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 즉 교육산업, 보건산업, 의료산업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Software Industry)이고, 후자는 눈에 보이는 산업(Hardware Industry)이다. 전자는 삶의 질 향상과 관련된 산업이며, 후자는 돈을 많이 벌겠다는 동기가 크게 작용하여 생산물의 양이 중요시되는 산업이다.
의식주 해결을 추구할 때는 내 욕심 채우기에 바쁠 뿐,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데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러다 의식주에 대한 욕구 충족 수준을 넘어 삶의 질을 추구하게 되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요구받게 된다. 가령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박사를 길러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배려와 비용이 필요했을지 생각해보면 삶의 질 추구는 ‘끝이 없는 영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몸이 불편해 병원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환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병원들의 배려와 간병 수준이 선진국의 그것에 크게 못미친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인간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산업과 경제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수단의 지위로 복귀시켜야 정체 상태에 빠진 우리 경제가 무한한 성장 궤도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학산업은 인류의 건강 증진을 과제로 삼는다. 그야말로 삶의 질 향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업이다. 생명과학산업은 지식산업, 연구개발(R&D) 산업, 소프트웨어 산업으로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침체된 우리 경제를 한 차원 상승시키는 모멘텀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생명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정부에서도 차세대 산업기술의 하나로 생명공학(BT·Biotechnology)을 강조하면서 많은 지원을 약속했고, 벤처 붐과 함께 우리나라에 생겨난 바이오 벤처도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과학산업에는 장밋빛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생명과학이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된 배경과 이 산업의 특성, 성공전략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4∼5년 전부터 생명과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확산됐지만, 선진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BT를 과학의 영역에서 산업의 차원으로 끌어들였다. 1970년대에 제넨텍(Genentech)이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약산업은 50년씩, 100년씩 사업을 영위해온 전통적인 제약회사나 할 일이지, 새로이 이 분야에 진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제약산업은 장기적이고 막대한 규모의 R&D 투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그 성과도 불투명한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유전공학이 실용화하고 제넨텍이 설립되어 인체 호르몬인 소마토스타틴, 인슐린, 성장 호르몬 등을 박테리아를 이용해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생명과학산업 시대가 열렸고, 뒤이어 다양한 바이오 벤처가 설립됐다. 그 와중에 인간 유전자 지도 작성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진행됨에 따라 수많은 유전자와 신약의 표적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면서 바이오 벤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미국의 바이오 벤처는 1300개가 넘고, 나스닥에 등록된 바이오 벤처만도 300개에 달한다. 그 중에는 암젠(Amgen)과 같이 시가총액이 800억달러에 이르는 기업도 있다.
그러나 의약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막대한 R&D 비용을 요구할 뿐더러 그 결과도 확신하기 어려운 ‘무모한 사업’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하드웨어 산업을 발전시킨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개별기업으로서 현실성 있는 전략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실적 전략에 따른 성공모델
제약산업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자동차산업의 그것과 비교해보자.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겠으나 몇 가지만 들어보면 우선 자동차의 경우 생산 계획을 세웠다면 이미 무엇을 생산할지 생산 대상이 정해져 있지만, 의약을 생산하고자 할 때는 무슨 약을 생산할지 결정하는 데만도 엄청난 R&D가 필요하다.
둘째, 자동차는 성능의 우열에 따라 가격을 조정하면 수요자가 생겨날 수 있으나, 의약(기존 의약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신약일 경우)은 약효나 부작용 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거나 특정한 적응증용으로 입증되지 않고서는 수요를 확신할 수 없다.
셋째, 자동차는 성능을 평가하기가 비교적 쉽고 수요자의 기호에 따라 판매가 가능하지만, 의약은 약효와 부작용에 대한 장기간의 평가가 필요할 뿐 아니라 감독관청의 엄격한 심사와 규제 대상이 된다.
이처럼 의약 개발을 위해서는 대규모의 R&D와 잘 정비된 감독관청의 심사·평가 및 규제 능력이 전제돼야 한다. 한 기업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정부 차원의 탁월한 R&D 기능이 필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의약 개발 사업은 한 국가의 국민보건정책과 의료정책 수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질병 퇴치를 국가적 목표로 삼겠다는 의지의 강도에 따라 생명과학산업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당분간 신약 개발이 가능한 나라는 몇몇 선진국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개별기업이 정책 탓, 환경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생명과학산업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것은 물론, 경제 성장의 동인이며 선진국 진입의 필수 요건임에 틀림없기에 현재의 환경이 미흡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접근방법으로 성공모델을 만들어내고, 정부와 동종업계를 자극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성 있는 접근방법’으로 맨 먼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약을 개발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질병의 관리, 질병의 원인에 관한 연구를 정부가 주도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러한 노력이 매우 미미한 수준에 있으므로 개발 대상 신약을 선정함에 있어 선진국의 R&D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선진국의 최신 R&D 경향을 끊임없이 주시하면서 원인과 원리가 이론적으로 확실히 입증된 질병을 표적으로 삼아 의약을 개발해야 실패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혁신적인 의약(innovative drug)을 개발하려 하다가는 언제 어떤 형태로 부작용이 수반될지 몰라 실패의 위험이 크다. 선진 대형 제약회사에 비해 극히 영세한 우리 실정으로는 그런 위험을 감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팩티브’의 凱歌
다음으로 고려할 사항은 ‘신약 후보’를 개발했더라도 임상시험 이후의 개발 단계에서는 가급적 선진 제약회사와 제휴해 공동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약은 하드웨어 산업에서와는 달리 평가가 어렵고 평가 기간도 오래 걸린다. 임상 단계에 들어가면 R&D 비용도 임상 전보다 10∼100배 더 소요될 수 있다.
더구나 임상시험의 여건이 미흡하고 임상 개발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신약을 심사, 규제할 능력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독자 개발을 고집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많은 경험과 능력을 갖춘 선진 제약회사가 공동 개발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 자체가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선진 제약회사와 제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실성 있는 접근방법으로 또 하나 고려할 사항은 생명과학사업 영역 안에서도 기반기술(platform technology)보다는 의약 자체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이다. 2∼3년 전 바이오 벤처가 붐을 이뤘을 당시에 바이오테크 회사, 즉 기반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들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가 곧 10분의 1, 심하게는 100분의 1까지 떨어진 예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런 회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의약 자체의 개발을 목표로 하는 제약회사로 변신했다).
반면 자본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개발 단계에 있는 신약이나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은 신약을 가진 회사의 주가는 거듭 상승곡선을 그렸다.
따라서 우리 실정에선 의약 개발에 활용될 수 있는 혁신적 기반기술 개발에 전념하기보다는 의약 자체의 개발을 목표로 삼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기반기술을 추구하면서도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인정받아 선진 제약회사로부터 연구 용역을 수임할 수 있는 경우에나 가능하다.
의약의 개발과 생산과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적 통제 대상이며, 선진국일수록 더 엄격한 규제가 적용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약에 대한 평가, 심사 및 허가 과정 자체가 고도의 R&D 활동이기에 이러한 R&D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나라에서는 신약에 대한 허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정 의약의 적용 대상 환자가 많으냐 적으냐를 불문하고 신약 허가를 얻으려면 효능과 부작용 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LG생명과학이 처음부터 세계적인 신약 개발을 목표로 삼고 FDA로부터 허가를 얻기까지 줄기차게 노력한 것 또한 제약산업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LG가 12년에 걸쳐 개발한 제4세대 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가 FDA로부터 신약 허가를 받아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약산업 1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이제 우리도 세계적인 신약 개발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한 단계 도약, 세계적인 신약을 잇달아 개발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건강 향상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앞장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