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同而不和’ 넘어 ‘和而不同’의 시대로

진보는 도덕적 우월감 버리고, 보수는 권력 강박증 벗어나라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입력2005-12-27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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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주의자들은 ‘정의의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합의에 이를 때 진정한 국민통합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同而不和’ 넘어 ‘和而不同’의 시대로
    어느 사회나 이념적 갈등구조가 있게 마련이지만, 참여정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불거진 보수와 진보의 갈등 양상은 해방 공간을 떠올리게 할 만큼 격렬하고 살벌하다. 보혁(保革) 양세력은 국가보안법 개폐, 행정도시 이전, 사학법 개정, 과거사 규명, 부동산 규제 등 각종 정책에서 격돌했고, 최근 ‘강정구 파동’에서도 충돌했다. 이제 진보와 보수는 국가 기념일 행사도 한자리에서 갖지 않는다. 3·1절이나 광복절에도 ‘그들만의 기념식’이 열릴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논쟁이 벌어지면 흙탕물 싸움만 할 뿐, 심판관이 없다. 설사 경륜과 식견을 갖춘 원로(元老)가 바른말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꼴 다 본다’는 식의 천박한 반응만 쏟아지고, 귀에 쓴 말은 아예 들을 자세가 돼 있지 않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권력을 빼앗긴 이후 끊임없이 울분을 토로해온 보수주의자들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하지만 더욱 큰 책임은 권력을 갖게 된 진보주의자, 특히 386세대에 있다. 진보세력이 그동안 박해를 받았다 해도 일단 권력을 잡았으면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강자(强者)가 된 것이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그들의 몫이다. 묵은 한(恨)을 접고 화해와 용서의 리더십을 표방했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은 ‘신(新)정치’가 도래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탓에 갈등정치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념 과잉에다 아마추어리즘 정치, 포퓰리즘적 방식에 따른 새판짜기 시도는 보수주의자들을 놀라게 했고 또 격분케 했다.

    진보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모험을 감수하자는 비전인데, 정작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미래는 내다보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를 바로 세우자”고 주장한다. 이것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엄명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상기시킨다. 한국의 진보는 무엇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는가. 복수심 때문에 뒤를 돌아보는 것이라면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12척의 배’에 목맨 진보주의자들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권력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은유법이 된 것은 이른바 ‘신성모독’과 유사하다. 명량해전처럼 통쾌한 영웅담도 없거니와, 문제는 진보세력이 이 영웅적인 성공담을 곧잘 자신들의 미약한 힘과 자의로 규정한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위력과 대비하면서 그 의미를 천민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은유법이 기발한 ‘정치적 상상력’보다 천박한 ‘꼼수’로 느껴지는 이유는 보수주의자들을 ‘경기의 상대자’로 생각하기보다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 왜적’ 정도로 낙인찍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을 미워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은 얼마나 낡은 계급정치 패러다임의 잔해인가. 그것은 가난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더욱 옹색하게 만들고 가진 자들을 소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물론 정치공동체에서 통합이 만능은 아니며 ‘통합의 질(質)’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의 주요 기능이 적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느낌을 국민에게 주는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또 그것이야말로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하고도 상충하는 갖가지 이해관계와 견해를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예술(art of the possible)’로 지칭되는 이유일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정의를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절제되지 못했다. 정의는 공동체의 필수 가치임에 틀림없으나, 독선이나 아집으로 함몰되기 쉬운 감성적 가치이기도 하다. 진보주의자들은 친일(親日)세력이 광복 후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군사독재 시절 용공조작이나, 노동자·농민의 피폐한 삶에도 울분을 누르지 못한다. 결국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한 역사’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런 시각은 공정하지 못하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여야(與野)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전직 대통령들이 처벌됐고, 대통령의 아들들이 구속됐다. 또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하던 진보성향의 김대중·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주영이나 이병철처럼 빈손으로 시작해 부(富)를 이루고 재벌이 될 수 있었던 한국의 정치·사회·경제구조는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집권한 진보주의자들의 실책이라면, 과도한 ‘정치적 도덕주의’를 표방하고 ‘정의’를 지나치게 큰 소리로 부르짖음으로써 평화나 화합을 외치는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해온 점이다. 민주사회에서 ‘통합의 정치’를 구현하려면, ‘사악한 것’을 통제하기보다는 ‘정의의 요구’를 자제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권력자보다 더 무모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들은 비판자나 반대자의 도덕성과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아 스스로 무덤을 파고 실패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386 진보주의자들은 정의의 복원을 표방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이나 부동산 정책, 사학법 개정 등 많은 국정사안에 ‘징벌적 어젠더’의 범주로 접근했다. 하지만 개혁사안들에 징벌적 어젠더로 접근하는 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부을 수밖에 없다. 개혁의 이름으로 낙인을 찍고 징벌을 내리는데 어떻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49명에 이르는 다나오스의 딸들은 첫날밤에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죄로 깨진 항아리에 영원히 물을 부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지만,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왜 자진해서 그런 벌을 받으려는가.

    보수주의자들의 권력 금단현상

    성경에 ‘베풀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경구가 있다. 권력을 가졌던 보수주의자들은 한동안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베푸는 데 인색했다. 이처럼 베풀기를 주저하자 통째로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했다. 개혁을 통해 사회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는 진보주의자들의 포효는 기득권의 아성을 깨겠다는 부르짖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은 관직과 부, 명예는 물론 젊은이들의 표심(票心)까지 빼앗긴 상황이 됐다. ‘차떼기’라는 불명예스러운 용어는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그 당에 희망을 건 보수에게도 부도덕한 존재로 낙인찍는 개념으로 작용했다. 보수가 빼앗긴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도 빼앗겼고 ‘통일’이란 말도 빼앗겼다. ‘개혁’ ‘정의’ ‘역사’ 등의 용어도 더는 보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빼앗긴 보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늙음과 쇠약함, 통한과 후회, 눈치 보기 말고 남은 것이 있는가.

    모든 걸 빼앗기다시피 한 보수주의자들이 열패감에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안절부절못한 채 초조해하고 또 지나치게 자기방어적인 태도가 역력하다. 권력을 왜 잃었는가에 대한 통렬한 반성보다는 권력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있는 까닭이다.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정교화함으로써 국민을 설득하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 ‘시대에 졌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비겁한 게임을 한 김대중 정부에 졌다’며 회한에 젖어 있다. 권력을 빼앗긴 데 대한 회한이 강하다 보니 ‘큰 바위 얼굴’처럼 이상(理想)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추스를 여유를 잃어버린 채, 미국 비판에 탐닉하고 북한 껴안기에 집착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실수를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인 양 행동해온 것이다. 물론 비판은 해야 하지만,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이 무엇인지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한두 사람 말로 국가가 무너지나

    또한 전통적으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다.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진되는 의견과 가치관을 너무나 쉽게 이단시하고 매도했다. 이념적 이단아 추방을 위해서는 고대 아테네에서 유행했던 오스트라시즘(ostracism)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동이불화(同而不和)’만을 주장했을 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펄쩍 뛰었다. 이러한 태도는 6·25전쟁의 참상과 이후 지속된 북한의 도발행위를 체험하고 베트남 패망을 목격한 보수주의자들의 자기방어 메커니즘의 발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준칙을 떠올리게 할 만큼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경직된 자세였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있다가 없어진 상황에서 빚어진 금단(禁斷) 증상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기에 바쁘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진보주의자들을 겨냥해 구국운동을 벌이고 국가 정체성 사수(死守)를 외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국가의 원칙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천박한 발언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가 아닐까. 진보주의자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밀(J. S. Mill)이 말한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를 허용하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가볍게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전투적 보수주의자들’이 출현해 인터넷·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공격적 진보주의자들’에 맞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 바람에 공동체는 완연한 싸움판으로 변해버렸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팽팽히 대립하는 현실에서 해법은 있는가. ‘좋은 삶’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는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공존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설사 ‘좋은 삶’이나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더라도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와는 상이한 시각을 갖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보수의 이념이 잘못됐다고 설득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좋은 삶이나 정의에 대한 보·혁의 시각이 크게 달라 어느 쪽이 우월한지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의 대안은 무엇인가. 좋은 삶이나 정의에 대한 비전이 ‘다름’을 넘어 모순성을 띠는 상황에서 중요한 과제는 ‘정의의 정치’보다 ‘평화의 정치’, 혹은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의 정치’가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보·혁의 생각이 다르고 마찰이 심각해 다양성은커녕 투쟁성이 두드러진다. 흔히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하면, 그 의견이 ‘틀리다’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 ‘틀리다’는 ‘다르다’는 의미일 뿐인데, 우리는 그 ‘틀리다’를 ‘옳지 않다’는 것으로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

    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단정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은 스스로 직면한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 혹은 정의나 불의의 문제로 틀짜기를 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은 세대는 젊은 세대를 ‘덜 익은 세대’로, 젊은 세대는 나이 먹은 세대를 ‘쉰 세대’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들은 같은 산마루에서 해를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젊은 세대는 뜨는 해를, 나이 먹은 세대는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또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없어져야 할 불의의 존재로 단정하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가 없는 진보는 무의미하고, 진보가 없는 보수도 존재이유가 없을 만큼 양자는 상호의존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모두스 비벤디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평화와 공존의 필요성에 따라 이웃에게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일러주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거나 절제해야 한다. 한국 기업인들이 미국 기업인들과 함께 사업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생명공학, 혹은 낙태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고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업적 분쟁에 대한 상호 견해 차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공동으로 마련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같은 신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또 같은 땅을 밟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역사의식이나 도덕관, 정의관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진보건, 보수건 그 누구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시도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해 사람들은 정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고 정의감도 가지고 있지만, 각론적으로 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10인10색이다. ‘공적의 원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와 ‘필요의 원리’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 혹은 ‘성장’을 강조하는 보수와 ‘분배’를 역설하는 진보는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와 같은 가치를 강조한다면 각자가 자신의 정의관이 옳다고 강변하는 나머지 정의는 엄숙성을 잃고 위험한 것으로 변질될 것이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고 규정하는 정의의 가치는 특정한 요구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오·남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에 관한 과잉요구는 공동체를 파국(破局)이나 시민적 무질서 상태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350년 전 토머스 홉스는 크롬웰로부터 비롯된 영국의 내란(內亂)이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모두스 비벤디’를 주장한다고 해서 정의나 양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없는 왕국은 무엇인가, 대도적들인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의는 이성적인 현상 못지않게 감성적인 현상이다. 정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열정이라는 불꽃으로 점화되는 가연성 물질’이다.

    따라서 정의는 평화라는 열쇠와 자물통에 의해 보호돼야 하는 가치인 셈이다. ‘모두스 비벤디’의 정치가 중시하는 규칙이 있다면, 서로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평화의 규칙’이다. ‘평화의 규칙’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평화공존이 이뤄지지 못하면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인정되고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합의

    ‘모두스 비벤디’의 정치에서는 ‘우리’와 구분되는 ‘그들’을 친구나 동반자로 생각하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물론 친구로 생각하는 것은 아름답기는 하나 유토피아의 상황처럼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목표는 하향조정된다. ‘우리’와 구분되는 ‘그들’은 친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수나 적도 아니다. 여기서 ‘그들’은 ‘박멸해야 하는 적’이라기보다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경쟁자’다. 이처럼 친구는 아니지만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경쟁자라면, 전쟁터보다는 운동경기장에서 체험할 수 있다. 경쟁 상대가 없는 운동경기는 ‘팥소 없는 찐빵’과 같다.

    운동경기에서 상대편 경쟁자는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며,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닌 정당한 상대다. 물론 그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처럼 다정하게 우정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기량은 때로는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된다. 상대팀 없이 축구경기를 할 수 없듯이 경쟁세력이나 경쟁정당 없이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 없이 진보정치를 할 수 없고 진보주의자 없이 보수정치는 가능하지 않다. 심의민주주의자의 주장처럼, 정치의 본질이 토론이라면 같이 토론할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이성적 토론을 통해 합의하기 어렵다면 과연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선의(善意)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기로 합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가능한 합의는 ‘이성적 합의’처럼 ‘내용에 관한 합의’보다 ‘불일치하기로 합의하는’ 경우처럼 ‘갈등적 합의’, 혹은 ‘차이를 인정하는 합의’로 볼 필요가 있다. 선(善)에 대한 합의된 개념이 약하고 선(善)의 상이한 개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평화가 민주주의의 목표가 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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