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에게 안목 전수한 경제 과외교사
경제학도와 공학도의 의기투합
전자식 전화기 개발 의미 꿰뚫다
3大 전략 산업 : TDX·반도체·컴퓨터
1981년 당시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왼쪽)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 현안을 설명하며 결재를 받고 있다. [동아DB]
“반도체를 하겠다고 해서 맘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정부를 설득하는 것도 문제. 그때까지 반도체 핵심장비와 기자재 대부분이 아예 관세 분류표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항목에 포함시켜 엄청난 관세를 물리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스크의 미세 패턴을 웨이퍼 표면에 전사할 때 쓰는 마스크 얼라이너(mask aligner)라는 부품이 있는데 이걸 그냥 ‘일반 사진기’로 분류해 40% 수입 관세가 부과되는 식이었다.
세관으로 달려가 반도체 사업을 설명하고 사정도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직원들을 찾아가 설득했지만 관세는 재무부 소관이라고 난처해했다. 재무부도 힘이 없었다. 관세율 개정은 입법 사유로 국회 의결까지 거쳐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관세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략) 한시적으로 관세를 내리는 ‘할당 관세’ 제도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마스크 얼라이너 등 핵심 반도체 자료에 대해 할당 관세율이 적용된다. 이를 시작으로 반도체 품목에 대한 관세율이 낮아지고 복잡한 행정절차들도 간소화되기 시작한다. 1차 설비자금으로 15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신청도 통과됐다.”
관료들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던 까닭
이렇게 초스피드로 일이 진행된 것은 앞서도 소개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덕분이었다.5공 정권은 반도체 사업에 대해 기업들의 컨소시엄을 만들 정도로 밀어 붙였지만, 관료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실물 경제를 책임지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견해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산은 제한돼 있는데 당시 경제 규모나 능력에 비해 설비 투자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산업을 지원했다가 망해버리면 위험부담이 너무 클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서 반도체라고 하면 ‘허리띠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즉 전문가는커녕 제대로 개념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개발하려 해도 개발에 나설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렵게 개발에 성공한다 해도 제품 사이클이 너무 짧아 리스크가 큰 데다 시설 투자는 막대하고 인프라는 부족했다.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더 많았다. 섣불리 사업을 승인했다가 기업들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가 휘청거릴 일이었다. 관료들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마침 컬러 TV 허용으로 1980년대 초 반도체칩 수입 물량이 급증했다. 반도체칩 국산화가 전자산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결정적 요소라는 점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수긍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 변화를 읽어낸 호암은 과감하게 회사의 명운을 걸고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한편 보수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했던 관료사회에서 변화의 흐름을 읽고 대한민국의 미래지도를 그린 공직자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김재익’이다.
인터넷 강국 코리아 출발점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산업과 경제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이름 김재익을 만나게 된다. 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자신을 ‘경제 대통령’이라고 여겼는데, 김재익이야말로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진짜 경제 대통령이었다. 김재익은 북한의 만행인 아웅산 사태로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그가 전 전 대통령에게 전수한 경제적 안목이나 지식은 대통령의 머리에 계속 살아 움직였다. 김재익은 5공 시대 경제 정책 전반을 조정해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재익의 업적은 조세정책에서부터 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뻗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 무엇보다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고 고마워할 부분은 통신혁명이다. 세계 최고 인터넷 강국 코리아의 위상은 5공 정부가 했던 통신혁명이 바탕이 됐다.
흔히 지도자는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한다. 문제는 그 머리를 알아볼 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모든 사안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전문적 지식을 가질 수도 없으며 일일이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알고 개혁을 실천할 사람을 제대로 쓰면 된다.
독재를 했던 전 전 대통령이 경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길 것은 김재익이라는 뛰어난 인재를 알아본 감식안 덕분이다. 5공 경제 정책의 비사 담은 역작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이장규)에 나오는 대목이다.
“80년대 통신 정책의 기본구상은 한 경제학도와 공학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1980년 9월 어느 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은 국보위 상공자원 분과위에서 안면이 있던 오명을 불러 저녁을 함께 했다. 경기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기술개발 분야에 관해 허심탄회한 논의를 시작, 전자·반도체·통신 등이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이며. 우리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 곧장 의기가 투합했다.
오명은 육사 교수 출신의 공학박사. 김재익 또한 이코노미스트이지만 원래는 공학도를 지망했던 사람일 뿐 아니라 평소에도 웬만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고장은 스스로 수리할 정도로 이 분야에 관심이 깊었다.
여기에 군대 시절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보좌관 생활을 해왔던 또 한 사람의 공학박사 홍성원이 가세한다. 이 세 사람이 청와대 비서실에 모이면서 기존 정부 부처 안의 어느 누구도 엄두를 못 내던 통신혁명 작업을 벌여나가기 시작한다.”
이장규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본래부터 통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책에 인용된 홍성원 씨 이야기를 들어 보자.
“전 대통령은 공고 출신이었던 탓인지 과학기술 이야기만 나오면 더욱 말이 길어졌어요. 81년 신정 연휴에 경제 비서관들을 처음으로 불러 모았는데 이때도 일반적인 경제 정책 문제들은 제쳐 놓고 주로 군대 시절에 겪었던 불편한 통신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산에 올라가면 전화선과 전신주로 온통 뒤덮여 보기 싫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개선할 수는 없을까, 책상 위에 갖가지 전화기가 수두룩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한 대로 해결하는 방안이 있을 텐데… 하는 식이었어요. 아무튼 전문 지식은 없지만 통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2003년 10월 6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 추모 기념집’ 출판기념회에서 오명 당시 아주대 총장(전 부총리)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강영훈 전 국무총리 부부,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김재익 전 수석의 부인),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 남덕우 전 국무총리(왼쪽부터) 등이 참석했다. [동아DB]
전화기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값 하던 때
5공 정부가 추진한 통신 혁명에서 국민의 일상에 가장 획기적이었던 변화는 전화기의 대중화였다. 40여 년 전 한국에는 전화기가 없는 집이 수두룩했다. ‘1인 1전화’를 손에 들고 다니는 지금의 눈으로는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생경한 풍경이다. 이런 편리한 세상을 만든 뒤에는 숱한 사람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오명 전 부총리의 회고다.“지금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80년 초까지만 해도 전화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잘 사는 학생을 알아내는 방법은 ‘집에 전화기가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됐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청색전화, 백색전화 제도란 게 있었는데 청색전화는 전화국에 신청해서 받는 전화였고 백색전화는 개인이 사고팔 수 있는 전화기였습니다. 백색전화 권리는 대당 무려 250만원이 넘었는데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습니다.
전화 놓는 것도 우선순위가 있어서 1, 2등급은 주요기관, 교수는 4등급, 일반 국민은 5등급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민들이 전화 한 대 놓으려면 보통 1년씩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1980년 말 기준으로 전화 개통을 신청해놓고도 번호를 받지 못한 신청자가 60만4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전화 놓기가 어려웠을까. 가파른 경제성장으로 통신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는데 당시 전화기는 다이얼을 돌려 연결하는 기계식이다 보니 급증하는 통신 회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기계식 전화기를 계속 사용하는 한 통신난은 영원히 해결되기 힘들었다. 이를 미리 생각한 사람이 김재익이었다. 고승철·이완배가 쓴 ‘김재익 평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재익은 1970년대 말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었다. (…) 한때 이공계 진학 꿈을 가졌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과학기술 발전이 근대화의 첩경이라는 확신을 품었던 그는 대부분 선진국들이 기계식 전화기를 포기하고 음성 신호를 디지털로 바꿔 전달하는 전자식 전화기를 사용하면서 통신적체를 해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계식 전화기는 신호 전달이 느리다는 점 외에 무선호출이나 컴퓨터 통신 등과의 연결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자식 전화기를 개발하는 일이야말로 단지 통신 적체를 해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통신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김재익은 전자식 전화기 개발이야말로 향후 다가올 한국의 정보통신 시대를 위한 기본 인프라라는 점을 내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당시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젊은 경제 관료의 혁신적 사고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셈이다.
기득권 저항에 좌절한 김재익
이렇게 해서 5공 정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맡자마자 김재익이 뛰어든 일이 바로 전전자식(全電子式) 교환기 TDX 개발이었다. 사실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도 그의 손에 의해 추진됐지만 이내 좌초하고 만다. 기계식 전화기 제조업체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들은 교환기 수명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무엇 때문에 새로운 시설을 도입해 예산과 외화를 낭비하느냐고 맞섰다. 심지어 ‘김재익이 미국 CIA 요원’이라느니 ‘신규 통신사업에 참여할 외국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느니 하는 음해를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김재익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조사까지 받지만 무혐의로 풀려나온다.
김재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체신부 산하에 한국통신연구소를 신설(1977년)하는 등 통신혁명을 이어가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꿈도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5년 가까이 별정직인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심한 좌절을 겪어온 김재익은 차라리 관료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참신한 구상과 철학을 현실경제에 실현시키기는커녕, 관료 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숱한 시련과 좌절을 견디다 못해 연구 생활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차였다.
경제기획원 안에서도 누구하나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감싸주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논리력과 순수한 인품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항상 따돌렸다. 특유의 파격적인 발상이나 개혁성향은 그를 돈키호테 같은 인물로 몰고 갔다.
한마디로 그는 직업 관료 사회에서는 어디까지나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김재익은 대학 동기동창이기도 한 서석준 차관에게 부탁해 KDI(한국개발연구원)행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실 서석준조차 김재익에 대해 경제 관료로서의 능력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실정모르는 백면서생’ 정도였다.”(책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중)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던 외로운 천재의 운명은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당신이 경제대통령이야”
전두환은 1980년 5월 말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자마자 김재익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 과외 공부를 시작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한다.경제수석을 제의받은 김재익이 전 전 대통령에게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대통령이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TDX 개발은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240억 원이라는 거액의 연구개발비가 투입된, 그때까지는 없던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었다. 계획이 수립될 당시만 해도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라는 게 관련 엔지니어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하기야 컬러TV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TDX는 컬러TV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당시만 해도 선진 6개국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던 고난도 첨단 전자장비였다.
대형 국책사업이라고 해봐야 군(軍) 장비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10억 원 규모 안팎 프로젝트도 구경하기 힘들 때였다. 초유의 대형 국책사업을 두고 세상은 비난 일색이었다. 인도도, 브라질도 실패한 사업에 왜 뛰어드느냐는 거였다. 개발을 주도했던 오명 전 부총리 회고다.
“사실 연구개발비로 들어간 240억 원은 선진국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기술축적에 따른 파급효과를 생각하면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었지요. 개발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로 교환기 수입하는 값을 깎으면 투자한 것만큼은 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경제기획원을 비롯해 모든 부서가 반대했지만 유일하게 지원한 곳이 청와대였습니다. 김재익 수석은 그 모든 반대를 물리치며 ‘운을 걸고 도전해보자’며 전폭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한국은 결국 4년 만에 TDX 국산화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한다. 1986년 국산 TDX-1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고 5년 뒤인 1991년에는 대도시용인 10만회선 TDX-10을 연속 개발한다. 마침내 1997년 11월 TDX 수가 1000만 회선을 넘어서면서 신청하면 1년씩 걸리던 전화 적체는 오전에 신청하면 오후에 바로 놓이는 시대로 바뀌게 된다.
TDX 국산화가 낳은 유산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1990년 3월 국산전전자교환기(TDX)-1의 200만 회선 돌파 기념식을 열고 있다. KT는 5공화국 시절인 1986년 TDX-1를 국내 최초로 개통했다. [KT 제공]
5공 정부는 TDX 개발과 함께 반도체, 컴퓨터를 3대 전략 산업으로 정해 육성했다. 1981년에는 전기통신사업법을 고쳐 모든 통신사업자는 수입의 3% 이상을 의무적으로 연구개발비에 쓰도록 해 매년 700억~800억 원 이상이 투자될 수 있도록 했다. 5년 뒤인 1986년 국내 전자 부문 생산 및 수출은 2.5배 늘고 전자산업 생산이 기계를 앞질러 최대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게 된다.
통신 규제도 대폭 없애 정부 주도 사업에 민간의 경쟁 논리를 도입했다. 유선 회선조차 적체를 빚는 때에 ‘데이터 통신전용 회선도 중요하다’며 ‘데이터 통신 육성 정책’도 펼쳤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곳이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와 한국데이터통신이다.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섰던 일본은 NTT를 중심으로 한 정부 주도 통신사업 체제를 유지했다가 경쟁에서 뒤쳐졌다. 이를 고려하면 5공화국의 통신 혁명은 한국이 통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인 인터넷 환경을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