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대단하게 볼까 불편하다
45년간 한길 판 중소기업人 내공
디자인도 인문학도 소비재 아닌 생산재
현재 전 재산 80% 재단 소유
학생들 시대의 반역자로 키워달라
자식에게 유산 약속하는 일은 非교육적
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7월 19일 경기 양평군 강하면에 문을 연 이함캠퍼스 개관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두양문화재단]
‘빈 상자로서’라는 뜻의 한자어인 이함(以函)에 배움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캠퍼스라는 단어를 붙인 이 공간을 연 사람은 오황택(74) 두양문화재단 이사장. 그는 7년 전 사재(私財) 100억 원을 기부해 서울 가회동에 청년 인문학교 건명원을 설립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함캠퍼스 개관식에는 미술 및 문화계를 비롯해 각계 인사들과 지인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오 이사장은 개관식 인사말을 통해 “문화는 그들만이 해독할 수 있는 난수표가 아니라 삶 속에 섞을 수 있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 이것을 찾아내 많은 이들과 공감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삶과 문화를 분리하지 않고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하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피력한 것이다.
개관식이 끝나고 며칠 후 그와 미술관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의외로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기자와 만나는 일이 익숙하지도 않고 자꾸 드러날수록 세상 사람들이 너무 대단하게 볼까 봐 불편하다”고 말했다. 제조업에 뛰어들어 평생 한길을 걸어온 그에게서는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온 중소기업인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총 1000억 원가량이 들어간 미술관도 재단을 통한 기부로 설립됐다. 그는 어떻게 돈을 벌었고 어떻게 사회에 내놓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돈을 번 이야기로 시작했다.
“저처럼 세속적이시네요”
그는 일찍이 월급쟁이가 되기보다는 “장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학교 공부에 별 재미를 못 느꼈어요. 미적분도 그렇고 지리 시간에 배우는 툰드라니 몬순이니 이런 게 사회에 나갔을 때 활용돼야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가 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실은 공부 못한 변명이에요(웃음).”
지금도 그렇지만 다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게 목표인데요.
“조금 거룩하게 말하면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나름대로 계산해 봤는데 봉급쟁이로 살면 기본 생활비는 나오겠지만 집은 못 사겠더라고요. 넥타이 매는 직장인보다 점퍼 입고 다니는 장사꾼이 더 자신감 있어 보였어요.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왕이면 경영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점수가 안 돼 국문과(중앙대)를 들어갔죠. 학교 공부보다는 ‘4년 후엔 세상에 던져질 텐데 뭘로 먹고사나’ 이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중소기업론, 창고관리, 마케팅론 이런 책 줄 쳐가며 혼자 읽었어요. 감을 잃지 않으려고 군대 가서도 경제신문을 구독해서 봤어요.”
재무제표나 회계 공부는요.
“그런 건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넘어가는 건데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거 공부할 시간에 돈을 더 벌 생각하는 게 낫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근데 뭘 할지가 막막한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책을 보는데 팍 꽂히는 글귀가 있었어요.”
그게 뭐죠.
“‘힘을 동반하지 않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글귀였는데 엄청 충격이었어요. 그걸 제가 ‘힘은 정의다’로 바꿔 이걸 좌우명으로 삼고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돈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싶어 책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어떤 책은 다 소용없다 하고 또 어떤 책은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고 써 있어요. 그래도 ‘일단 벌고 보자’ 이렇게 결론을 내렸죠.”
무언가 행동할 때 나름대로 철학을 만들어가는 게 특이합니다.
“무슨 철학씩이나요. 돈 벌 때 나중에 남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에요.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독립이 더 우선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삶이란 밥이죠.
“저처럼 세속적이시네요(웃음). 경제적 자유에 대한 가중치를 도덕적인 것과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도덕은 결이 다른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단추로 돈을 벌다
정치라는 것도 국민 잘살게 하는 게 목표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단추와 인연이 됐나요.“벌써 45년 됐네요. 우연치 않게 친구 아버지가 하는 단추 공장에 들어갔다가 인연이 됐습니다. 2년 정도 영업을 담당했습니다.”
단추란 게 워낙 작은 아이템이다 보니 그걸로 돈을 벌었다는 게 생소하게 들립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구멍만 뚫으면 다 단추 아닌가(웃음). 그런데 이게 디자인 산업입니다. 굉장히 예민해 옷과 안 맞으면 바로 재고가 돼버려요.”
그는 영업을 맡아 뛰다가 5년 후 ‘두양’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세운다.
직접 공장을 세우신 계기는요.
“하청업체들이 납기도 맞추지 못하고 품질도 마음에 안 들게 만들어 오는 거예요. 내가 해도 그만큼은 하겠다 싶어서 직접 생산을 시작한 거죠.”
현재 단추 제조업에서는 압도적 1등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한다는 게 어렵다고들 하던데….
“그 점에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져요. 장사를 한다고 하면 유통이 대세죠. 제가 직원들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규모가 다를 뿐 삼성하고 똑같다. 제조부터 유통까지 다 하지 않느냐. 저희가 가장 힘쓰는 분야가 연구 개발입니다.”
중국 같은 곳엔 안 갔나요.
“네. 가격보다는 좋은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사업은 디자인, 소재 개발이 중요하거든요. 레시피라고 해야 되나. 어떤 물질을 어떻게 조합해야 어떤 소재의 단추가 나오는지가 노하우입니다. 옷 만드는 분들은 다 우리 고객입니다. 패션업체가 대표적이죠. 다가오는 트렌드를 정밀히 검토한 후 디자인을 정합니다. 옷이 안 팔리는 때도 많으니까 재고 위험을 무릅쓰고 합니다. 지금도 창고에 재고가 많아요.”
단추 재질은 주로 플라스틱인가요.
“정식 명칭이 폴리에스터 레진이라고 다양한 레시피로 만듭니다. 거듭 말하지만 연구개발이 가장 중요합니다. 거기서 부가가치가 올라가니까요. 한 시즌에 한 20~30종 개발합니다.”
꽤 오래 했는데 비결이 뭡니까.
“당장 이익이 안 나도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무엇보다 고객과의 신뢰를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고객들이 클레임(claim·품질 등에 문제가 있을 경우 소비자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배상을 청구하는 일)을 하면 손해를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했다”며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길게 보면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 개관한 이함캠퍼스도 골조를 세우고 개관까지 무려 23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가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남과 좀 달라 보였다.
경기 양평군 강하면에 들어선 이함캠퍼스 전경. [허문명 기자]
생산재로서의 문화
단추 공장 사장님이 예술이나 인문학, 문화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업무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한 건 아니고요. 골치 아플 때 인사동에 가서 그림 구경하면 머리가 맑아졌어요. 저는 기업하는 사람 처지에서 문화는 이제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초 ‘생산재로서의 문화’를 느낀, 작지만 깊었던 일본에서의 체험을 말했다.
“샘플 때문에 일본을 일찌감치 드나들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어요. 백화점에 들러 모찌떡을 사는데 요만한 박스에 포장지가 몇 겹인 데다 미농지로 떡을 싸서 끈까지 묶어 파는 거예요. 제품 설명까지 일일이 쓰여 있고 말이죠. 우리는 그저 싸게 많이 먹는 게 최고이던 시절인데 왜 이 사람들은 작은 떡 포장 하나에도 이렇게 정성을 들였을까 궁금했어요.
그건 결국 소비자가 원해서 된 거 아닐까요. 기업 처지에선 소비자가 원하지 않으면 생산할 이유가 없거든요. 바로 이런 게 문화의 수준이로구나. 저는 기업을 하니 산업이 발달하려면 소비자 안목이 업(up)돼야 한다고 생각해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디자인은 생산재입니다. 수준이 높아지려면 소비자가 좋은 걸 원할 것이고, 그러면 그걸 만들 작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디자인이) 발전한 거죠.”
돈 버는 이야기에서 돈 쓰는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재단은 어떻게 만든 건가요.
“그런대로 공장이 잘 돌아가니까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나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많은데 말이죠. 이상하게 친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저를 참 사랑해 주셨거든요. 할머니가 항상 나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공장 처음 지을 때에도 묘소에 담배 한 대 올려놓고 ‘저, 공장 지어요’ 그랬습니다. 할머니가 늘 수호천사처럼 저를 챙겨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연장선상인지 항상 하늘이 저를 돕는다고 생각했어요. 왜 하늘이 내게 이런 복을 주실까 생각하면 하늘에서 ‘그래도 너한테 맡기면 허튼짓은 안 할 것 같다’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냥 그게 나름대로의 종교가 됐죠.”
그만의 사적인 이야기 같지만 어느 정도 돈을 벌었다고 판단했을 때, 이제는 남들한테 나눠주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들 때까지 수많은 생각의 흐름이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에 주어진 시간 관계상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단편적이나마 전해 준 에피소드만 보더라도 잔잔한 감동이 인다.
“어찌 어찌하다가 마흔 살에 교회를 나갔어요. 성경을 읽으니 제가 평소에 생각한 게 다 있는 거예요. ‘청지기 의식’이란 말이 가장 크게 다가왔어요. 하늘이 네게 맡겼으니 심부름 잘해라 이런 거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어떻게 갚을까, 그때부터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남 도울 일 찾다 보니 재단까지 만들게 된 거죠. 지금 재산의 80%는 모두 재단 소유입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이 ‘선행’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 들으면 민망합니다. 선행은 나 먹을 것 안 먹고 덜어주는 겁니다. 저는 제가 쓰고 남는 거 내놓는 거잖아요. 기껏 살아야 100살이고 그때까지 얼마를 쓰겠어요. 누구나 아는 평범한 상식입니다. 한 150살 정도까지 산다고 하면 절대 안 내놔요(웃음).”
자식한테 물려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집 한 채 줬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아들한테 ‘아버지가 번 거 아버지가 쓰겠다’ 했더니 ‘예’ 그러더라고요. 다행히 자식들은 제 앞가림하고 잘 삽니다.”
회사도 안 물려주나요.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저의 목적은 회사가 존속하는 겁니다. 자식에게 유산을 약속하는 일은 비(非)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쌓고 이루는 게 삶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성취인데 그걸 빼앗는 일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의 원소를 만드십시오!
건명원 기부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거네요.“배철현 전 서울대 교수님과 이함캠퍼스를 설계한 김개천 국민대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 일입니다. 젊었을 땐 생각나는 대로 살았는데 철학이란 게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존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가면 되지만 삶의 방향은 나 스스로가 만든 철학이 이끌죠.”
그가 건명원 1기 입학식 때 한 말은 지금도 건명원 교수진 사이에서 잔잔한 화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건명원은 잘 다듬어진 교양인이나 지식으로 치장된 지식인을 원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따르되 자신의 생각과 재결합해 자신만의 원소를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20년 후엔 너덜너덜해져 쓸모없게 됩니다. 인문학이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가 돼야 합니다. 교수님들께 당부드립니다. 이 학생들을 이 시대의 반역자로 키워주십시오.”
시대의 반역자가 되라는 말이 꽤 도발적으로 느껴집니다.
“지금 시대를 거역해야 다음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니까요.”
인문학이 생산재가 돼야 한다는 말도 공감이 됩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해(日)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는 반복되고 미래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역사를 알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강대국은 왜 강대국이 됐을까, 또 망한 나라나 기업은 왜 망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걸 공부하는 게 생산재로서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나눈 대화에서는 몇 가지 어록으로 기록할 만한 체험적 언어가 있었다. 그는 생각날 때마다 휴대전화에 메모로 저장해 놓는다고 했다. 잠깐 들여다본 휴대전화에는 메모가 꽤 나열돼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들을 옮겨본다.
“옥수수를 반 개씩 나눠먹는 것보다 두 개 열리는 방법을 찾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생을 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도움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꿈의 첫발이 아닐까.”
“쓰이지 않는 재물은 태양계 저편의 별이 내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돈이란 뭔가요.
“1차적으로는 생존을 해결하는 도구이고 그게 채워지면 자원, 즉 생산재가 돼야죠. 비피(BP·손익분기점)까지는 남한테 줄 수가 없어요. 우선은 생존해야 하니까요.”
문제는 그 BP라는 게 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10억 원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100억 원, 1000억 원이 될 수도 있고 말이죠.
“물론이죠. 어떤 사람은 자동차로 만족하지만 어떤 사람은 요트도 있어야 하고 전용 비행기도 있어야 하고…. 그걸 뭐라고 욕할 수는 없다고 봐요. 다 각자의 BP이죠. 거듭 말하지만 저는 제 밥그릇을 덜어주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나 나름대로의 BP는 지키고 나머지를 주겠다는 거지, 내 걸 덜어내는 수준까지는 못 갔어요.”
BP라는 지극히 경영학적 용어가 기부라는 도덕적 행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달은 순간이다.
건명원에 100억 원을 기부해 화제를 모았던 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이번에는 1000억 원을 들인 복합문화공간 이함캠퍼스를 열었다. [두양문화재단]
“제발 너무 대단하게 보지 말아달라”
그는 “어차피 죽어서 갖고 가지 못하고 내가 다 쓰지 못할 돈을 남에게 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지극히 효율적인 행위이며 돈에 대한 예의”라며 “건명원을 세운 것도 미술관을 세운 것도 정말 내가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일이니 제발 너무 대단하게 보지 말아달라”고 여러 번 말했다.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상식을 실천했을 뿐 특출난 일을 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상식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의 상식이 도드라져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돈을 어떻게 버는지도 중요하지만 돈을 번 사람들에게는 또 어떻게 쓰느냐 역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벌기도 어렵지만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황택 이사장의 선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거창한 프레임이 아니더라도 돈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루고 성취한 것들이 내가 죽어서도 유지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