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테라發 유동성 쇼크 FTX에도 타격
급한 마음에 고객 자금 손대다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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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던 기업인이자 정치후원금 큰손으로 떠올랐던 FTX의 최고경영자(CEO) 샘 뱅크먼-프리드(Sam Bankman-Fried·SBF)가 몰락하자 혹여나 불똥이 튈까 정치인들이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SBF는 2022년 11월 11일 미국 법원에 챕터 11 파산 절차(회생 파산, 한국의 법정관리와 유사)를 신청하기 전까지 최근 2년 동안 미국 정치권에 약 4000만 달러(533억 원)를 기부했다. 최근 진행된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전체 기부자 중 두 번째로 많은 액수를 민주당에 기부한 후원자로 기록되기도 했다. 암호화폐 업계에서 벌어진 ‘흥망성쇠 드라마’가 미국 투자업계, 재계는 물론 정계까지 뒤흔드는 모양새다.
사건의 발단… 천재, 든든한 배경, 유망 산업
샘 뱅크먼 프리드 FTX 설립자. [Gettyimage]
‘천재성, 든든한 배경, 유망 산업.’
SBF가 짧은 시간 벼락 스타로 부상한 배경에는 이 세 가지가 있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이라는 검증된 이력에 스탠퍼드 로스쿨 교수 부모, 여기에 빠르게 성장하는 미래 유망 산업을 상징하는 ‘블록체인·크립토(Crypto·암호화폐)’라는 키워드까지 추가됐다.
암호화폐 업계의 스타로 떠오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어 보였다. 그는 기존 제도권의 세례를 받은, 유대계 엘리트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산업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했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누구보다 앞서 ‘암호화폐 산업의 제도화’를 외친 것도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후 기존 정부·은행에 반발하며 태동한 게 암호화폐의 시초 ‘비트코인’(2009)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찌 됐든 SBF는 암호화폐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정부, 기득권을 전복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암호화폐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해 줄 ‘안전한 대안’이었다.
그가 보여준 놀라운 성과는 이런 관측에 힘을 더했다. SBF가 2017년 설립한 ‘알라메다 리서치(Alameda Research)’의 빠른 성장이 대표적 사례다. 암호화폐 트레이딩 기업이자 헤지펀드였던 알라메다 리서치는 국가 및 암호화폐거래소마다 암호화폐 가격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차익거래로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었다.
금융회사가 수익 창출을 위해 고객의 돈이 아닌 자기 자본으로 하는 거래인 ‘프롭트레이딩(Prop Trading·자기 계정 거래)’에 집중, 설립 3주 만에 2000만 달러(약 268억 원)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알라메다 리서치의 하루 매출은 20억 달러에 달했다. 차익거래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국가나 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사서 비싼 곳에서 파는 단순한 형태다. 지금은 차익거래 시장 참여자가 많아지며 이익을 남길 기회가 크게 줄었으나 당시만 해도 알라메다 리서치의 경쟁자는 많지 않았다.
SBF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19년 5월 암호화폐 파생상품 거래소 FTX를 설립하며 암호화폐거래소 사업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12년 설립된 코인베이스, 2017년 설립된 바이낸스에 비해 늦은 시기였으나 저렴한 수수료, 파생상품 거래 기능 등을 앞세워 FTX는 빠르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암호화폐 가격이 올랐고, 대형 벤처캐피털(VC)과 월스트리트 기관투자자들의 암호화폐 투자 규모도 계속 커지는 등 운도 따랐다.
몰락의 시작… 무엇이 문제였나
2022년 1월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320억 달러(42조8000억 원)에 도달한 FTX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22년 9월부터였다.2022년 9월 같은 기업가치로 10억 달러(1조3000억 원)를 조달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잘나가는 FTX가 기업가치를 유지한 채 추가 투자를 유치하려고 한다는 소식에 시장에서는 “뭔가 이상하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타트업이 다음 투자를 유치할 때는 통상 기업가치를 더 올려서 투자를 유치하는데, 기업가치가 그대로 유지됐고, 조달 금액 역시 10억 달러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였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업체 ‘알파논스(Alphanonce)’는 “FTX가 재무적으로 튼튼했으면 추가로 투자를 유치할 이유가 없다”며 “이때부터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고 분석했다.
블록체인 전문매체 ‘더블록’에 따르면 앞서 5월 붕괴된 루나-테라 사태로 셀시우스 등 다른 암호화폐 투자업체들이 큰 피해를 봤다. 업계에서는 루나-테라 사태가 도미노처럼 FTX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알라메다 리서치가 FTX의 시장조성자(market maker)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손실을 봤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나-테라 사태가 터지자 FTX의 백스톱 청산자(Backstop Liquidator·선물 잔여 계약을 떠안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던 알라메다 리서치가 큰 유동성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시장조성자라는 건 트레이딩이 일어나도록 돕는 주체를 말한다. 달러나 유로화같이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통화는 비교적 거래가 쉽지만, 예컨대 몽골 화폐를 다른 나라 화폐로 교환하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다. 암호화폐의 경우 법정화폐에 비해 종류가 훨씬 다양하고, 사용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시장조성자, 즉 특정 암호화폐를 판매자와 구매자 중간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조성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판매자의 공급과 구매자의 수요가 항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조성자가 없으면 특정 암호화폐를 아예 거래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매매가 이뤄지는 ‘가격’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알라메다 리서치가 계속해서 손실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투자자가 원하는 체결 가격과 실제 체결된 가격 사이의 괴리를 말하는 ‘슬리피지(slippage)’가 계속 발생했고, 이를 알라메다 리서치가 떠안았다. FTX는 더 많은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다양한 암호화폐가 거래될 수 있도록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작업에 알라메다 리서치가 동원된 셈이다.
2021년 11월부터 약 1년간 FTX에서 알라메다 리서치로 흘러 들어간 자금 비중. [Gettyimage]
뇌관 터지다… 결국 고객 자금에 손대
글로벌 2위 규모 암호화폐거래소 FTX는 2022년 11월 11일 미국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Gettyimage]
결국 SBF는 FTX내 예치된 고객 자금에 손을 댔고, FTX 거래소 코인인 FTT를 담보로 막대한 자금을 빌려 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부실이 더 심각해지던 차에 알라메다 리서치의 재무제표가 2022년 11월 2일 코인데스크의 보도로 공개됐고,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한때 거래량 기준 세계 2위 암호화폐거래소까지 올라갔던 FTX의 몰락은 글로벌 암호화폐 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지급해야 할 고객 자금이 80억~100억 달러(13조1600억 원) 부족한 것으로 밝혀지며 FTX는 파산 신청을 피하지 못했다. SBF는 CEO직을 사임했다. 2022년 8월 포천 표지에 실리며 ‘넥스트 워런 버핏’이란 평가를 받은 지 3개월 만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FTX의 재무제표에 최대 100억 달러의 ‘구멍’이 생겼는지 모든 내역이 자세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온체인 데이터(On-Chain Data·블록체인에 기록된 데이터)를 살펴보면 실제로 문제가 될 만한 자금 흐름이 다수 포착된다.
온체인 분석 업체 글래스노드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알라메다 이더리움 지갑에서 외부로 흘러나간 거래량의 90%가 FTX로의 이동이었다. 9%는 바이낸스, 나머지는 1%에 불과했다. 알라메다가 보유하고 있던 이더리움의 물량이 대부분 FTX로 흘러갔다.
FTX로 유입된 패턴도 마찬가지다. 알라메다는 FTX에 자금을 예치하는 기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했다. 알라메다는 2021년 11월 8일부터 누적으로 총 490억 달러(약 64조5000억 원)어치에 해당하는 토큰을 FTX에 맡겼다.
알라메다 지갑으로 유입된 자금의 출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바이낸스(155억 달러, 약 20조4000억 원)였고, FTX는 71억 달러(약 9조3400억 원)로 확인됐다. FTX에서 FTX 외부로 유출된 토큰 규모 비중 역시 알라메다(38%)가 가장 높았다. 다음은 바이낸스(36%)였다.
알라메다와 FTX 자금이 계속 순환하는 구조였고, 고객 자금은 아무런 제약, 규제 없이 유용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SBF를 포함한 FTX 경영진은 FTX 고객이 맡긴 돈을 관계사인 알라메다 리서치에 빌려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무리한 사업 확장, 빠른 성장 뒤에는 도덕적 해이가 있었다.
FTX 관계사들 간 지분 구조. [FTX]
후폭풍…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FTX 사가(Saga·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패러다임 캐피털, 세쿼이아 캐피털, 소프트뱅크 등 FTX 지분 투자에 참여한 유명 벤처캐피털(VC) 크립토 헤지펀드가 최대 2억9000만 달러(약 4000억 원) 손실을 봤고, 한때 80달러에 육박하던 FTT 코인은 1.4달러 수준으로 폭락했다.FTX와 코인베이스는 미국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업계 주요 기업 디지털커런시그룹(DCG)에까지 불길이 번지는 형국이다. DCG는 암호화폐 펀드 비트코인트러스트(GBTC)를 운용하는 그레이스케일, 암호화폐거래소 루노(Luno) 등을 거느린 대형업체다. 특히 11월 16일 DCG의 자회사 중 하나인 제네시스 트레이딩이 사용자 자산 출금을 중단하자 업계 전반에 공포가 퍼졌다.
암호화폐 거래소, 투자자 자산 이동 투명화해야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업계 내에서 자정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거래소 바이낸스의 설립자이자 CEO인 창펑 자오는 “모든 암호화폐거래소는 머클트리(merkle-tree) 준비금 증명을 수행해야 한다”며 “은행은 부분 준비금(fractional reserves)으로 운영되지만, 암호화폐거래소는 안 된다. 바이낸스는 이를 시작해 완전한 투명성을 갖출 것”이라고 밝혔다.머클트리를 사용하면 거래소가 각 사용자 계정의 자산 해시값(자산 이동 내역)을 머클트리의 ‘리프 노드(leaf nodes)’에 저장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제삼자가 리프 노드를 통해 사용자들의 자산이 잘 예치돼 있는지에 대한 감사(audit)를 진행할 수 있다.
제도권의 규제 및 감시도 강화될 전망이다. 로런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전 미국 재무장관은 블룸버그와 인터뷰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번 FTX 사건을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비교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을 엔론 사태와 비교하고 싶다”며 “포렌식 회계사(Forensic accountant) 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미국 부동산시장 버블이 꺼지며 생긴 경제위기다. 즉, FTX의 몰락이 암호화폐 시장의 버블이 꺼진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이 사건이 암호화폐 기업들의 분식회계나 회계 부정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FTX 몰락과 유사한 사태를 막으려면 디지털 데이터 분석 전문가 양성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