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전과 역전, 온라인 말싸움이 아니면 오프라인 말싸움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소요의 정치’, 정상과는 거리가 먼 ‘파격의 정치’였기 때문일까. 물론 주연과 관객이 분리된 드라마였다면 관객으로서는 손에 땀을 쥐는 한이 있더라도 즐겁게 구경했겠지만, 문제는 관객인 국민이 주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조연의 신세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임기가 1년 남은 시점이라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경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성찰의 정치’를 펴야 할 때다. 그럼에도 지지율 8%의 대통령과 지지율 9%의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 문제를 놓고 요란하게 다투는 행태를 보면, 만길 낭떠러지를 아래에 두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좋은 터’를 잡겠다며 용호상박의 다툼을 벌이는 형국이니, 결코 아름답지 않다.
새로운 ‘被통치학’ 요구한 ‘서러운 대통령’
“좀 조용히 해!” 교실 안이 소란스러울 때 선생님이 교탁을 치면서 하는 소리다. 지금 영락없이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로 전락한 국민이 노 정권에 대해 하고 싶은 소리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정당정치든 서신정치든, 당을 깨든 당을 지키든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좀 조용히 할 수 없겠니?” 이 주문이야말로 노 정권이 남은 1년 동안 화두로 삼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집권행태 가운데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울분과 격정을 쉴 새 없이 토해내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상대가 언론이건 강남사람들이건, 대통령은 언제나 서러웠다. 하도 서러움과 격정의 토로가 잦으니, 혹시 그것이 권력의 특권이며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러움과 회한을 권력의 본질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주권력이란 설득과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울분을 쏟아놓으면 카타르시스가 되는지, 아니면 동조자를 결속할 수 있다고 믿는지, 유달리 노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히거나 자신의 정책이 실패해서 역효과를 낳을 때 억울함을 느꼈고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토중래한 노 대통령과 주변의 386 사람들이 승자의 미소를 짓기보다 서러움을 곱씹었다는 것은 좀처럼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인데, 문득 바위고개 언덕을 넘으면서 ‘10년간의 머슴살이’가 서러워 진달래꽃 한 아름 안고 눈물짓던 옛사람이 생각난다.
대통령의 직분이나 권력을 고역보다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대통령이 되고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일생 동안 사무친 응어리와 한이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보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 오히려 더 박해를 받고 있다는 의식이 강해진 것 같다.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오르지 않는 지지율을 생각하며 눈물 흘린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언제 한번이라도 대통령이라고 인정해본 적이 있느냐”며 비판적 언론을 향하여 절규했다. 그동안 ‘프로정치’보다 ‘아마추어정치’, ‘현장정치’보다 ‘서신정치’, ‘민생정치’보다 ‘코드정치’에 힘을 쏟아온 노 정권에 비판과 비난이 쇄도했다. 그를 지지하던 진보진영조차 노 대통령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로 이어진다며 아우성쳤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국민과 언론, 야당의 충고나 비판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감수해야 할 직무상의 양약(良藥)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진정성을 가진 개인 노무현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간주해 분노를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권력을 공유한 386 참모들도 한(恨)과 서러움에 복받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