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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와 ‘일드’ 그 치명적 즐거움

‘미드’와 ‘일드’ 그 치명적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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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와 ‘일드’ 그 치명적 즐거움
텔레비전이 다리를 갖고 있던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저녁마다 TV가 있는 이웃집으로 동냥 시청을 다니곤 했다. 아버지는 그 광경이 안타까웠는지 없는 살림에 덜컥 텔레비전을 사오셨고, 덕분에 매일 저녁 ‘여로’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동냥 시청을 하고 밤늦게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졌지만, 아버지는 내가 텔레비전만 본다고 외출할 때면 텔레비전 장식장 문을 잠가놓곤 하셨다. ‘임진왜란’ ‘암행어사’ ‘서부소년 차돌이’ 등등 텔레비전은 쉬지 않고 매혹적인 즐거움을 쏟아놓았다.

이제는 텔레비전이 다리를 잃고 벽에 걸리는 시대가 됐지만 텔레비전, 특히 드라마의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양과 질 면에서 국내에서 제작되는 드라마의 수준이 높아졌고, 무엇보다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 같은 새로운 드라마 콘텐츠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무한 공급되기 때문이다.

거실에서는 아내가 그리섬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범죄의 진실을 쫓고 있다. 모니터 속 일촌들의 미니홈피에는 기무라 다쿠야나 웬트워스 밀러가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고, 큰아이는 주말 저녁 디즈니 채널의 시트콤 ‘Hannah Montana’를 보려고 맛난 외식이나 심지어 ‘무한도전’마저 포기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의 압박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사실 1970~80년대 ‘전투’ ‘코작’ ‘초원의 집’ ‘월튼네 사람들’ ‘Rich man and Poor man’ 등 기억 저편에 아직껏 또렷한 그 프로들도 미국 드라마였다. 그럼에도 지금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그것이 생산 역량이나 생산 단가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그것은 드라마의 질과 향유자의 취향, 그리고 생산 시스템과 유통 구조 등이 유기적으로 얽힌 매우 복합적인 원인을 갖고 있다.

드라마는 영화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로 꼽히지만, 영화와 달리 별도의 금전적 지급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더 대중적인 콘텐츠다. 단막극을 제외하고 가장 짧은 형태인 미니시리즈의 경우 대개 최소 16회 이상을 확보할 수 있기에 학습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창구(window)를 활용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은 물론 문화적 향기(cultural odor) 생산을 통한 국가 이미지 제고 같은 부가 효과까지 거둘 수 있다는 점도 드라마의 미덕으로 꼽힌다. 이와 같은 이유로 드라마는 향유 대상과 시장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전제로 치밀한 기획과 스토리텔링의 전략적 접근이 필수적인 장르다.

우리가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국적 때문이 아니다. 다국적 자본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드는 지금 문화 콘텐츠시장에서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문화적 할인율(cultural discount)을 극복하고 우리 드라마시장에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느냐가 문제다. 풍부한 스토리와 다양한 텔링 방식 확보, 장르별 전환(adaptation) 시스템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대중성 검증, 스토리텔링과 스타 비히클(Star Vehicle)의 유기적 결합, 폭넓고 체계적인 유통망의 전략적 확보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인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국내 드라마 제작사들이다. 즉,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국내 시장 환경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사전 제작은커녕 촬영 당일 쪽대본에 의지해 방송시간 직전에 편집을 마치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 드라마의 결과물은 차라리 선전에 가깝다. 신선한 소재와 매력적인 캐릭터 창출로 인기를 끌면서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하얀 거탑’의 경우, 마지막 회는 방송시간 10분 전에 편집을 마쳐 넘겼는데 이것마저 2분의 1 분량에 지나지 않았고, 방영되는 동안 나머지를 편집해 넘기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태왕사신기’도 비슷한 사정으로 뉴스가 연장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는 국내 드라마시장에서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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