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 혈세가 다시 한번 마구 사용된 겁니다.”
흔히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잘못 사용했을 때 등장하는 마무리 코멘트다. 지방 도시에 대규모 공항을 건설했지만 무용지물이 됐다거나, 단체장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군청이나 시청 건물을 지나치게 호화롭게 지었다거나, 은행이 제대로 된 담보도 설정하지 않은 채 대기업에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대출해줬을 때 약속이나 한 듯 이 코멘트가 등장한다. 보도 내용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데 기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공직자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사회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분노를 느끼고 열심히 살아갈 의욕을 잃을 수도 있다.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안전불감증의 한 사례였습니다.”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문제. ‘빨리빨리’에서 출발한 ‘설마’에 대한 과신. 기자의 이 코멘트는 청자로 하여금 오히려 자포자기를 유도하지 않을까? “그래, 우리 국민은 안전불감증에 빠졌어. 절대 고치지 못할 거야.” 부모가 칭찬하고 설득하고 기다리며 인내심을 보이면 자녀는 조금씩 호전된다고 하지 않던가. 기자는 왜 긍정적인 희망의 코멘트, 예를 들어 “안전에 보다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안전에 대한 시민의식이 ○○년 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와 같은 코멘트는 하지 않는 것일까.
“…○○당의 내홍은 깊어만 갑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비교법을 환유라고 한다. 연기를 보면 화재·담배·굴뚝을, 백발을 보면 나이든 사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당을 ‘내홍’으로 단정하고 이 단어가 시청자의 뇌리에 박히면서 ○○당은 분열된 당, 나아가서 정치인은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전달된다.
우리나라 방송 뉴스의 뉴스 가치는 부정성이 시의성 다음으로 높다. KBS 뉴스를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 뉴스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 뉴스 가치가 바로 이 부분이다. 부정성이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취재·보도하는 뉴스 가치의 하나. 하긴, 발본색원해서 고쳐야 할 부분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널려 있으니 뉴스 보도도 그쪽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다. 진정 부정적인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면 기자들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야단만 치는’ 코멘트를 날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뿐인가. 냄비식 보도도 문제다. 우리는 한 달이 멀다하고 대형 사건을 접한다. 김승연 회장 사건, 신정아씨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는 내용 없는 보도가 매일 톱뉴스로 등장했다. 어떤 때는 알맹이 없는 보도가 10여 분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흥미진진한 모든 요소를 갖춘 이 두 사건 관련 보도는 일주일이 아니라 수개월 동안 인기 소재로 활용됐다. 새로운 사실이 없더라도 두 남녀의 사진을 나란히 띄우기만 하면 시청률이 올라가니 그럴 수밖에. 당시 SBS는 누구 눈치를 보는지 몸을 사렸고, KBS는 시청료 때문인지 공정성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MBC는 ‘셌다’. 비판의 강도뿐 아니라 선정성에서도 타 방송사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매체들은 어떤 기준으로 뉴스 가치를 정하고 보도방향을 잡고 기자들의 코멘트를 허용할까. 기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겁없는’ 코멘트를 날려도 되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기자가 아닐까.
미디어 세상이다. 미디어가 온통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기존의 신문·방송을 일컫던 ‘언론’은 ‘다양한 미디어’로 개념이 확장됐다. 디지털 혁명으로 매체 간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그런 만큼 기자, PD, 영화제작자, 광고제작자, 연예기획사 등 미디어 종사자들의 윤리기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정보 전달은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이니까. 그런데 어떤 윤리가 필요한 것일까. 촌지를 받거나 광고주나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거론된 윤리강령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에서 상대방에게, 최소한 상처는 주지 않는 용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도 사회 각계각층의 구성원 집단에게 상처를 줘서를 안 된다. 극도로 무질서한 한국 사회에서 ‘삶’ 이 아닌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구성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