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시대에든 궤변은 필요한지 모르겠다. 리영희는 1974년 6월 ‘창비신서’ 제4권 ‘전환시대의 논리’를 내놓으면서 머리말에 자신의 글이 ‘가설’이라고 ‘궤변(?)’하는 구절을 넣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때로부터 500년이 더 지난 1974년에도 ‘가설’들을 묶어 책으로 내놓다니, 2000년대를 8년이나 경과한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이게 도대체 어느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인가 싶다. 그러나 그때는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던 때였고, 가설로라도 지적 굶주림을 채워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허기져 있었다.
훗날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논’으로 약칭)를 내놓은 이유와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통치의 야만성 반(反)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시대정신과 반제 반식민지 제3세계 등에 대한 폭 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남북 민족 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 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 (권영빈, ‘책과 시대/저자를 찾아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교수’, 중앙일보 1993년 2월20일자)

‘전논’은 출간되자마자 우리 독서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폭탄 같았다. 김동춘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까지 한 ‘전논’은 과연 어떤 책이었나. 1970년대 중반의 암울한 시기에 대학 초년생이던 조희연은 “유신교육 아래서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고 하면서, “유신 말기 젊은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의 세례 현장에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고 했다.
밤새 ‘전논’을 읽고 또 읽은 김세균은 자신이 만나는 동료 후배들에게 ‘전논’을 권했다. ‘전논’이 그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허위의식 혹은 미신들이다. 그런 것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偶像)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보라”는 것이었다. 김세균은 그런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진실로 믿고 있던 것, 내가 나의 ‘건강한 상식’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을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에 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괴로움 속에서 종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깨부술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4년 그해는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줄지어 발동된 해였다. 문인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으로 사회는 꽁꽁 얼어붙었다. 서슬이 퍼렇고 흉흉하던 그해 초여름에 리영희의 첫 저서가 간행되어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러나 그렇게 될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그 전환시대의 전환시대적 요소에 주로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댄 것이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었고, 끝내 1975년 초봄, 황사 불던 날 무더기 처형까지 감행되는 속에(민청학련 및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 전원에 대해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 이들은 2007년 재심 끝에 전원 무죄판결을 받고, 이어서 사상 최고액의 국가배상판결을 받음), 정작 바로 전환시대의 논리를, 그 불가피성 불가역성을 정정당당하게 논파한 저서는 시중을 휩쓸고 있었으니, 이것이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호철, ‘산 울리는 소리 : 이호철 문학비망록’, 정우사, 1994)
흥미롭게도 당시 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노재봉은 리영희의 ‘전논’ 뒷표지에 이런 추천사를 썼다.
“가설의 증언이라는 형식에 담은 이 책의 내용은 기실 증언에 의한 시대의 심판이다.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