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날아가는 새의 대명사가 기러기다. 더구나 기러기는 가을에 오고 봄에 날아가는 철새다. 자기 영역을 죽을 때까지 지키는 텃새보다는 철새가 ‘멀리 날아간다’는 날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하지만 숲 속 오두막 노부부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기러기는 ‘멀리 날아가기’를 잃어버렸다. 한번 용기를 내서 날아보라고, 기러기에게 말했다. 그 녀석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멀뚱하니 마당의 모이를 쪼며 왔다갔다한다.
“그래도 여기에서 저기까지는 후두둑 날아가.”
할머니는 좁은 마당을 겨우 오리처럼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서 말했다.
그 좁은 마당을 나오지 못한다면 녀석은 영원히 그렇게 살다가 갈 것이다. 저 기러기를 기러기라고 부르는 일이 과연 옳을까. 짧은 순간 마른 목을 적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시달렸다. 내가 혹시 저 기러기와 같지 않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저런 지경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생이 내게 준 휴가
작가 김인숙(金仁淑·45)이 어느 날 문득 중국으로 건너가 3년을 넘게 살다가 쓴 책인 ‘제국의 뒷길을 걷다’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얘기다. 다 읽고 나니 책을 읽기 전 이 책이 김인숙의 베이징 여행기라는 선입관을 잊게 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본 기러기가 생각났다.
인민해방군 손에 이끌려 사상개조를 받은 늙은 푸이가 중국의 새로운 진시황인 마오쩌둥의 사진을 우두커니 쳐다보는 사진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가 하늘을 보는 심경이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제국의 뒷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이 책은 마지막 황제 푸이의 절망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더 깊은 절망이 조화롭게 슬픈 소설이다.
그 슬픔은 이미 지나간 한 인물, 중국의 황제라는 거대한 거인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가 그 거대한 동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시정바닥을 끌려다니는 슬픔이다. 시정바닥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나 혹은 인간들의 슬픔이기에 책의 문장들은 읽히면서 드문드문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 책에서 말했다.
‘모든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다.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이 완전히 다르게 구성해내는 이야기가 뜻밖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역사를 읽는 즐거움과 슬픔이 여기에 있다.’
그의 따뜻한 책에 밑줄을 긋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숨을 지으면서 입추와 말복의 무더위를 잠시 잊었다. 이 책의 어떤 매력이 나를 끌어당겼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고 김인숙을 만났다. 그가 중국에 간 이유는 ‘그냥’이었다. 2002년에 가서 2년을 있었고, 돌아와 1년 반을 한국에서 머물다가 다시 중국으로 가서 1년3개월 정도 있었다. 철새 기러기를 닮았다. 때가 되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가 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고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거죠. 그때 여러 가지로 어려워서 순전히 나를 위해 그냥 잠시 다녀오면 좋겠다 싶은 거지요. 난 행복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좀 힘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