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비파나무.
구황식물인 고구마와 감자가 그나마 잘되었다. 지금 봐도 한 해 농사라고 지어봐야 먹고살기 참 팍팍했겠다 싶은 곳이다. 키 작은 다박솔, 사스레피나무, 정금나무 같은 관목이 듬성듬성 자랐다. 황량한 느낌의 야산 두어 개를 더 넘으면 바다가 나왔다. 여름이면 이 바닷가의 암벽에 원추리가 많이 피었는데, 주변의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기다란 줄기에 노란 꽃을 매단 게 영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잡이가 어려운 암석해안이라 겨우 진주고둥이나 소라 따위를 줍고 막 허물을 벗어 개펄 바닥을 기어 다니는 어린 뻘떡게(꽃게)와 장뚱어를 잡았다.
광주에서 교편을 잡게 된 부친을 따라 일찌감치 우리 식구가 시골집을 떠난 뒤에도 조부모님은 그곳에서 사셨다.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방학이 되면 나는 해남으로 끌려 내려가서 보리밥과 조밥을 먹어야 했다. 겨울에는 고구마만으로 세끼를 때우기도 했던 것 같다. 젊었을 땐 궂은일을 모르다 나이 들어 외진 땅에 들어와 뙤약볕에 호미질로 나날을 보내게 된 할머니는 팔자타령이 입에 붙었다.
뒤에 선친이 만든 가계보(家系譜)를 보니 동학 때 문래면 접주(接主)를 한 증조(曾祖)께서 우수영 전투에서 패해 도명(逃命)하기 위해 숨어들어온 곳이 이곳이라 했다. 증조가 접주를 하신 게 사실이었는지 아닌지보다 전투에 패해서 도명을 했다는 것이 더 눈길이 간다. 왜 그런 궁벽한 곳에서 땅을 갈고 살아야 했는지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영웅, 가인의 과실

중국 악기 비파는 비파나무 잎과 모양이 꼭 닮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비파나무의 비파란 이름은 잎사귀의 생김새가 ‘비파(琵琶)’라는 중국의 전통악기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최근에 우연히 중국 영화 ‘초한지’를 봤더니 항우의 여인 우희 역의 류이페이(劉亦菲)가 비파를 연주하는데,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악기의 생김새가 비파의 잎과 정말 흡사하다. 본초서를 보면 비파나무의 잎을 ‘엽대여려이(葉大如驢耳)’라 했는데 ‘큰 잎이 흡사 나귀의 귀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비파는 중국의 양쯔강 중상류지역이 원산지인 늘 푸른 나무이며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장밋과의 식물로 겨울에 노란 꽃들이 가지 끝에서 핀다. 암술과 수술을 같이 가지고 있어 자가 수정이 가능하므로 특별히 다른 곤충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다. 학명은 ‘에리오보트리아’이다. 부드러운 털을 뜻하는 ‘에리온’과 포도를 뜻하는 ‘보트리스’가 합쳐진 말인데, 비파 잎에는 연한 잔털이 많고 둥근 열매들은 포도송이같이 열리므로 꽤나 적절한 이름 같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선 비파 열매를 탄환(彈丸)에 비유했다.
이 비파나무는 감나무나 밤나무처럼 온대지방 민가에서 흔히 심는 나무가 아니어서 남쪽의 해안지역을 벗어나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런 탓에 우리말 이름도 있질 않다. 그러나 중국에선 이 남방과일을 즐기는 이가 많았는지 삼국지의 조조가 비파를 너무 아껴 몰래 비파열매를 따먹은 병졸을 적발해 괘씸죄로 사형시켰다는 얘기도 있고, 또 당나라의 절세미녀 양귀비가 이 열매를 각별히 좋아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용안육이란 과일을 즐겼다고도 하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천하의 미식가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손님들을 맞으면 곧잘 이 비파를 대접했다고 한다.
더위 병 치료하는 단 과일
중국의 문인화 중 채색을 하는 남종화에는 비파나무를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은데, 길쭉 넓적한 비파 잎과 함께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 비파열매가 꽤나 먹음직스럽게 그려진다. 비파열매의 크기는 살구보다 약간 작고, 잘 익으면 달콤한 맛에 더해 신맛이 살짝 느껴진다. 육질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아 상큼하니 먹을 만한데, 열매 속에 상수리 크기만 한 굵은 적갈색 씨앗이 두세 개씩 버티고 있어 정작 과육이 두껍지 않은 게 좀 아쉬운 과일이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이다. 여느 해 방학 때처럼 시골집에서 여름을 나다가 세 살 터울의 삼촌과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나갔다. 별생각 없이 작열하는 햇빛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 탈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숨 쉬기가 힘들어져 땅바닥에 축 늘어졌다. 일사병, 흔히 더위 먹었다고 하는 것인데 한방에선 ‘서병(暑病)’이라 한다. 모질게 더위를 먹었는지 수일을 혼수상태로 보냈다. 정신을 좀 차린 뒤에도 영 기력을 못 찾고 한동안 끙끙 앓았다. 그렇게 더위 먹어 죽기도 했다더니, 깜냥에도 보통 힘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 안에 누워서 한동안 앓던 기억이 소나무 기둥의 묵은 송진내와 변변한 벽지 한 장 못 바른 황토 토벽의 흙냄새, 들깨기름을 잔뜩 먹인 시멘트 포대 장판지의 냄새들과 어우러지며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