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보다 흥미로운 지도
미슐랭 지도와 베르미르의 ‘지리학자’, 그리고 가타리와 들뢰즈가 앞서 해석한 ‘영토론’을 통과한 뒤에야 나는 ‘지도와 영토’의 첫 장을 열 수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이었고, 책상 한 편에 이 책이 자리 잡은 지 1년 만이었다. 소설의 기본적인 특성은 ‘재미’에 있지만, 소설이 시대를 초월해 생명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이 재미와 더불어 우리 삶의 벅찬 순간과 감동을 전하는 기록과 견해(사상), 미(美·예술)의 기능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기록은 사실(fact·역사)의 차원에, 사상은 세계관(비전)의 차원에, 미는 새로움(도전)의 차원에 연계된다. 소설을 지속적으로 읽는 행위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이며, 탐구는 연대기적 흐름과 지금-이곳의 현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감식안의 작동과 연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파리국립예술학교 출신의 제드 마르탱이라는 사진가이자 화가를 주인공으로 현대와 예술의 관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방식, 위협적으로 변화하는 21세기의 속도와 속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를 끝까지 (살피며 또 견디며 심지어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데 특히 필요하다.
제드 마르탱이 생애 후반부에 몰두했던 작품들은 유럽 산업시대의 종말, 보다 폭넓게는 인류가 이룩한 산업 전체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특성에 대한 향수 어린 명상으로 비칠 수 있다. … 당혹감은 제드 마르탱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함께 했던 인간들을 소재로 한 작품, 즉 혹독한 기후의 영향을 받아 분해되고 박리되고 산산이 찢겨나간 사진들을 촬영한 영상을 마주할 때도 계속된다. 아마 이것이 인류의 전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리라.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문학동네, ‘지도와 영토’ 중에서
이것은 사진가이자 화가인 제드 마르탱의 최후를 증언하는 형식의 소설 마지막 대목이다. 소설은 한 인간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성실하게 쫓아가는 전통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다. 작가는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과 사건에 담긴 시간을 해체해 (혼란스럽게) 재배치하고, 독자는 혼란스러운 사건과 시간의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 한 편의 (반듯한) 퍼즐 작품으로 완성해간다. 작가의 기질에 따라 유발하는 혼란의 정도가 다른데, 미셸 우엘벡의 경우, 진폭도 크고 내용도 다채롭다. 소설이라는 종자가 세상에 던져진 후 지금껏 그랬지만, 21세기의 소설가들은 문자 또는 기호로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이 가능한 장르가 소설임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액자형식에다 다중시점은 기본이고 심지어 소설 속에 자신을 직접 등장시키는가 하면, 고전적인 예술비평에서부터 21세기적 디지털 매체 환경의 지식과 정보 짜깁기까지 ‘지도와 영토’를 통해 우엘벡이 이끄는 소설적 행보는 종횡무진하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가 소설 제목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주제, 곧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지도를 소설로, 영토를 현상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나, 또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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