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br>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나는 다만 무의식을 이해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닌 본능의 미스터리 말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나는 항상 융으로 돌아온다. 심리학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심리학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심리’라는 틀에 갇히기 싫어 다른 분야로 멀리 멀리 떠나갔다가도, ‘또 한 해가 가는구나’하는 생각 때문에 쓸쓸해지는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융으로 돌아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심리학이라는 단어에 갖는 거부감은 이토록 복잡하고 불가해한 마음을 과학으로 해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내게 과학의 이미지는 아직도 조금은 차갑고 무섭고 공격적인 그 무엇이다. 과학은 소중하지만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의 독단은 무섭다. 내 마음이라는 뜨거운 대상을 과학의 차가운 칼날에 베이기 싫은 마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심리학자보다 융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그가 항상 문학과 철학과 신화를 이야기하며 심리학을 더 커다란 인문학의 장으로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운 심리학을 뜨거운 심리학으로, 과학의 영역에 갇혀 있던 심리학을 인문학으로 확장한 사람이다.
뜨거운 심리학
심리학이 뭔가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의 고민 위에 대단한 존재로 군림하는 현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우리가 심리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지 당장의 심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꿈꾸는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할 수 있는 최첨단 현미경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아무리 탐사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처럼 불가해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경의를 담은 그 무엇이다.
융의 마스터플랜은 단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신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부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를 통해 ‘인류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 그의 커다란 그림이었다. 사실 나는 ‘심리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몸짓이 좋다. 그러려면 항상 융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책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미국 포드햄 대학에서 한 정신분석 강의록이다. 그가 이 강의를 맡았던 1912년은 심리학의 권위 자체가 크게 의심을 받던 때였다. 게다가 융 자신도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시기였다. 그는 아직까지 정신분석의 발전 단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강의 초반부터 인정한다. 그는 정신분석의 진정한 창시자인 프로이트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을 품었지만 그의 학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인간의 모든 리비도를 결국에는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버리는 프로이트의 일원론을 넘어서기 위해 융은 끊임없이 분투했다.
이 책의 초반부에는 젊은 시절의 융이 프로이트 이론을 넘어서기 위해 프로이트 이론의 맹점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내용이 나와 ‘카를 구스타프 융다운 장엄함과 품격’을 기대했던 독자는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융이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다. 프로이트를 넘어선다는 것은 단지 프로이트는 틀리고 융 자신은 옳다는 식의 이분법에 몸을 담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업적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프로이트 사상의 맹점을 공정하게 파헤치고, 마침내 프로이트와 대항하면서 융 자신이 ‘사상의 자기다움’을, 자기만의 특이성을 꽃피워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사상’이라는 꽃봉오리가 조금씩 부풀어 올라 마침내 만개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리비도라는 용어에서 ‘성적’ 의미를 빼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성욕에 관한 3편의 에세이’에서 이 용어에 부여한 성적 정의를 확 없애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 초기 유아기의 아이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고통도 받고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아이의 고통과 즐거움이 성욕 리비도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