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려명黎明

4장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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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로 휴가 나온 윤기철은 정보기관 요원들로부터 정순미가 당의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얘기를 듣고 혼란스러워한다. 이혼녀 신이영과 살을 섞고 개성공단으로 돌아온 윤기철에게 정순미는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다음 날 오전에 선적이 있기 때문에 창고가 붐볐다. 윤기철도 컨테이너에 싣는 박스를 확인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10시 반까지 창고에 박혀 있었다.

“이봐, 윤 과장.”

컨테이너 뒤에 서 있던 윤기철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법인장 김양규가 다가오고 있다. 눈을 둥그렇게 뜬 것이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것 같은 표정이다. 다가선 김양규가 말했다.

“허가증 나왔다.”

허가증이 휴가증으로 들렸는데 휴가증도 맞는 말이다. 북한 특구개발지도총국에서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으면 휴가고 뭐고 없는 것이다.



“이것 참, 어제 오후 4시에 신청했는데 오늘 오전에 나오다니.”

김양규가 머리까지 내저었다.

“총국에서 자네를 봐주는 거 같다.”

“수속이 빨라진 겁니다.”

“그런가? 어쨌든 준비해.”

“예, 법인장님.”

몸을 돌렸던 김양규가 머리만 비틀고 윤기철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어쨌든 자네가 오고 나서 일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그 말을 박스를 메고 오던 포장반의 남자 근로자들이 들었다. 북한 측 남자 근로자들이다.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근로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 동지가 뵙자고 하십니다.”

사무실로 들어선 윤기철에게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가 말했다.

“지금 대표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챙겨둔 가방을 들고 나오다가 멈춰 섰다. 사무실 안에는 선적 때문에 모두 창고로 지원을 나가 김현주뿐이었다. 22세, 둥근 얼굴이 자주 빨개진다.

“나 휴가 가는데 미스 김, 필요한 거 있어? 서울에서 사다줄게.”

“아유, 일 없습니다.”

김현주의 흰 얼굴이 빨개졌다.

“순미 언니나 사다주시라고요.”

“정순미 씨는 날 싫어해.”

“어머나.”

놀란 듯 김현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럴 리가요? 모르시는 말씀이야요.”

“잘 알잖아? 나하고는 말도 잘 안 해.”

“순미 언니가 과장님을 좋아한다고요.”

그 순간 김현주가 입을 딱 다물더니 상기되었던 얼굴이 굳어졌다. 사람은 흥분했을 때 말실수를 한다. 김현주처럼 어리고 순수한 성품이면 그 가능성이 더 높다. 윤기철은 몸을 돌렸다. 김현주가 무심코 뱉은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근로자 대표실 위치는 총화실 안쪽이어서 문을 두 개나 열어야 한다. 대표실 앞에 선 윤기철이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문을 연 정순미가 말했으므로 윤기철은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하나, 소파 한 조가 놓인 방 안에는 둘뿐이다. 조경필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대표님은?”

그때 정순미가 가방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검정색 알루미늄제 서류가방이다.

“이 가방 가지고 가시라고요.”

앞쪽 자리에 앉은 정순미가 눈웃음을 쳤다.

“이 가방 드리려고 대표님 사무실을 빌렸어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자주 빌려야겠어.”

“왜요?”

“우리 둘이 데이트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어? 안 그래?”

그때 정순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볼부터 붉어지더니 금방 눈 주위까지 번졌다. 정순미가 시선을 내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다녀오세요. 과장님.”

“잠깐만.”

정순미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이야기 좀 하게.”

“무슨 이야기요?”

주춤거리던 정순미가 다시 자리에 앉았으므로 윤기철은 어깨를 폈다. 할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 대표 동지가 보초를 서줄 것이거든.”

“글쎄,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재미있잖아, 대표 동지를 보초 세우고 말이야.”

“장난하지 마세요.”

정순미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웃음을 참느라고 콧구멍이 조금 벌름거렸다. 정색한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난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여기 개성에 오기 전에 헤어졌어.”

정순미는 눈만 깜박였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차인 거지. 솔직히 개성공단에 발령받으면 좌천이야. 밀려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보통 여자라면 차는 것이 당연….”

“저기요.”

그때 말을 자른 정순미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더니 윤기철을 보았다. 다시 볼이 조금 붉어져 있다.

“그분 좋아하셨어요?”

“응?”

“사랑하셨느냐고요?”

윤기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내가 엉덩이를 딥다 차인 것도 당연하지. 내 이용가치가 없어졌으니까.”

“…”

“아프리카 출장을 가서도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데 여긴 휴대전화도 안 터지잖아?”

“…”

“그 쌍년은 여기 사정을 두르르 꿰고 있었다고. 그래서….”

“저기요.”

다시 윤기철의 말을 끊은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이제 그만요.”

“그러지.”

이제는 윤기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오늘 진도는 이만큼만 나가기로 하지.”

서정아, 26세, 천안전문대 졸, 가구회사 직원,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 168㎝쯤 되었고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건강한 체격. 윤기철의 부모는 좋아서 웃음을 참느라고 애쓴다. 배추밭에서 삼을 본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서정아의 부모 쪽도 비슷했다. 우선 윤기철의 키가 185㎝나 되는 데다 건강하다. 그리고 중소기업이지만 이름이 알려진 회사 과장이다. 이들에게 개성공단 파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덕수는 초등학교 동창이며 같은 개인택시 운전사인 서정아 아버지에게 박도영한테서 받은 1000만 원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1년에 서너 번 이런 보너스를 받는다고 뻥쳤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수준이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정순미가 상류층이라고?

대충 밥을 먹은 양가 부모가 후식도 안 먹고 방을 나갔을 때는 30분쯤 후다. 모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