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양산을 든 여인 카미유의 임종

클로드 모네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6-10-20 1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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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성경 말씀은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내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어도 나를 무한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많이 사랑하지 못하는 제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갖곤 했습니다. 사랑이란 말은 이렇듯 제게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어려운 단어가 됐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든 생각은, 굉장히 희생적이거나 놀랄 만큼 선한 행동을 해야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에선 그 대상이 다소 힘겹거나 지루하더라도 소중히 여기며 함께 있어주는, 그런 일상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랑을 이렇게 본다면, 사랑에 대한 제 정의가 너무 소극적인 것일까요.



    가난한 날의 사랑과 행복 

    많은 화가가 사랑을 작품 주제로 삼았습니다. 어떤 화가는 아내 사랑을, 어떤 화가는 자식 사랑을, 또 어떤 화가는 부모 사랑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가족이 누구보다 먼저 일차적인 대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특히 제 마음을 두드린 그림은 인상파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의 ‘양산을 든 여인’(Woman with a Parasol, 1875)입니다.

    환하게 빛나는 햇살을 마음껏 느끼게 하는 그림입니다. 한 여인과 한 아이가 싱그러운 자연 속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녹색 벌판 위에 핀 노란 꽃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춤추는 듯한 구름은 모네가 왜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인지 깨닫게 합니다. 실내에선 이런 화사한 작품을 그리기 어렵습니다. 밖에서 직접 그릴 때 빛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생생함을 감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많은 작품을 야외에서 그렸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은 풍경이든 사람이든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양산을 든 여인’을 자세히 보면 모네는 자연의 모습과 사람의 표정을 정밀하게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빠르고 다소 거친 붓의 터치를 대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순간의 포착입니다. 빛이 만들어낸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생동감이라는 효과에 주목했지요. 그 결과 이 작품은 앞선 시대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아우라를 창조했습니다.

    이러한 감상에 더해, 모네가 화폭에 담은 이들이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작품의 사랑스러움은 한층 배가됩니다. 무명 화가에 가깝던 모네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모델 카미유 동시외와 결혼했고 카미유는 아들 장을 낳았습니다. 모네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환한 사랑과 따뜻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듯합니다.

    화가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시리즈에서 맨 처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다룰 때 그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고흐에게도 가족은 무척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하물며 결혼한 모네에게 가족의 소중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게다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모네는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아르장튀유에서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화풍에 몰두할 때였죠. ‘양산을 든 여인’은 가난한 날 모네의 사랑과 행복을 담은 작품인 셈입니다.



    감각의 해방 

    ‘인상파’란 이름은 ‘양산을 든 여인’에 앞서 그린 ‘인상, 해돋이’(Impression : Sunrise, 1873)라는 작품에서 비롯됐습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1874년 국가가 주도하는 살롱전에 맞서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습니다. 이때 한 평론가가 ‘인상, 해돋이’가 붓질을 마구 한 스케치에 불과하고 인상적이라는,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함으로써 전시회에 참여한 모네와 그의 동료들인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등은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전시회는 실패했지만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빛의 효과와 색채의 감각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시시각각의 변화를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담긴 밝은 색채를 빠른 붓질로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각이고, 그가 표현한 것은 이성의 구속에서 벗어난 감각의 해방입니다.

    이러한 자기만의 예술을 추구했기에 모네는 경제적으로 곤궁했음에도 ‘양산을 든 여인’과 같은 밝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 담긴 경쾌한 화사함은 인상파에 앞선 시대를 장식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적 엄격함, 외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적 화려함과는 분명히 다른 새로운 근대적 감각입니다.

    현대인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유독 좋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작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만 회화를 감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빛과 색채의 새로운 감각을 기반으로 해 자연과 사람을 자유롭게 재현하려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현대인들은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모네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미적 공감과 정서적 편안함을 안겨주는 듯합니다.


    순간의 장면, 영원의 풍경

    ‘양산을 든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요즈음 현실에 대한 제 생각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은 현상의 하나는 ‘나 홀로 삶’입니다.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혼자 지내는 것은 이제 평범한 풍경이 됐습니다. 살다 보면 이따금 친구가 성가시고, 경우에 따라선 가족마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불어 지내는 것보다는 혼자 일하고 여가를 즐기는 게 더 편안하기도 합니다.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공동체의 지나친 구속은 개인의 자립심을 키우지 못하고 의존적인 성격을 강화하기 때문에 나 홀로 일상을 보내는 게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나는 긴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유대 못지않게 튼튼한 개인의 자율성을 지켜나가는 게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개인화하는 과정이 아쉽습니다. 그 까닭은 ‘나 홀로’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에 있습니다. 이 단어를 보며 독립심보다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저만이 아니겠지요.  

    ‘양산을 든 여인’을 보면 가족이 주는 행복에 공감하게 됩니다. 아내는 녹색 양산을 든 채, 아이는 다소 긴장한 듯한 자세로 이 편에서 캔버스를 펴고 그림에 몰두하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모네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순간의 장면이지만 영원의 풍경으로 잡아두기 위해 빠르게 붓질하며 행복감에 젖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족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일까요. 상담학을 공부해온 저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진행된 연구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연구는 75년간 724명의 인생을 추적한 성인발달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족·친구·공동체와의 사회적 연결이 긴밀하면 긴밀할수록 더 행복하고 건강하며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데 있습니다.

    모네의 사랑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네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 카미유가 살아 있을 때 모네는 유부녀인 알리스 오슈데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카미유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슈데는 병든 카미유를 돌봤고, 카미유가 죽고 난 다음 모네와 결혼했습니다. 모네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네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카미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켜주려 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카미유의 임종’(Camille on her Deathbed, 1879)은 카미유의 죽음을 그린 작품입니다. 아침 햇빛이 방 안을 비출 때의 순간입니다. 막 세상을 떠난 카미유의 가슴에 꽃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카미유는 눈을 감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린 채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모습입니다. 화폭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거친 붓질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탄식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카미유를 작품에 담으면서 모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 작품에서조차 모네는 빛의 효과를 캔버스에 담으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슬픈 이별 과정에서도 모네는 직업으로서 화가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감싸는 분위기는 깊은 슬픔 그 자체입니다. 꺼질 수밖에 없는 불꽃을 안간힘을 다해 되살리고 싶은 모네의 마음이 보입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모네가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킬 것을 아는 카미유 역시 안심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카미유는 두려운 죽음과 만나고 있지만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저물어가는 가족의 시대

    앞서 말한 하버드대 성인발달 연구 프로젝트의 결론은 가까운 이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몸뿐만 아니라 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함께 있다는 것이 힘들 때도 많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웃고 울며 지지고 볶으며 다투고 화해해가는 과정이 소중한 것 아닐까요.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는 가족이겠지요. ‘양산을 든 여인’과 ‘카미유의 임종’은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묻게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나 홀로 삶이 더욱 증가한다는 점입니다. 가족의 중요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가족보다는 다소 외로운 나 홀로 삶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현실에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보아 저도 제법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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