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부채 규모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가계 부실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다. 최근 유럽 재정위기나 미국 경제의 더블딥과 관련된 우려는 완화됐으나 이란 사태에 따른 유가불안 등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글로벌 경제 부진이 우리 수출을 위축시키고 국내 경제 성장세를 둔화시키거나 부동산 경기회복을 지연시킬 경우, 그간 누적된 가계부채 부실이 현실화할 수 있다.
경제활동 기초가 되는 가계 부문의 부실은 개인의 경제적 시련뿐 아니라 가계대출을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저해할 수 있다. 가계부채의 부실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북유럽 3국의 금융위기 등 과거 주요국의 사례에서처럼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전이될 수 있다.
2011년 말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912조9000억 원(가계신용 기준)에 달한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말(213조 원)에 비하면 12년 동안 700조 원가량 늘어났다. 1999년 말~2011년 말 동안 가계부채의 연평균 증가율은 12.9%에 달해 명목 경제성장률 7.1%를 크게 웃돌았다. 경상 GDP 대비 가계부채는 1999년 말 38.8%에서 2011년 말 73.3%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는 61.3%에서 78.0%p 증가해 135.9%로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의 가계부채 수준과 비교해보면, 2010년 말 경제 규모(경상 GDP) 대비 가계부채(개인금융부채 기준)는 OECD 평균(79.3%)을 약간 웃도는 85%이다.
실질 가계부채 세계 최고 수준
그러나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 규모는 주요국에 비해서 크게 높은 수준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조세부담률로 인해서 가처분소득의 규모가 작은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북구 복지국가를 제외하면 캐나다, 호주 등과 함께 실질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스페인, 노르웨이 등 이전까지 부채가 급증했던 국가들의 가계 부문이 디레버리징(자산 매각으로 부채 절감)에 접어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위기 이후에도 조정되지 않은 결과다.
우리나라 가계대출의 상당부분은 은행(예금은행)이 취급한 주택 관련 대출의 형태로, 수도권에 집중됐다. 2011년 말 전체 가계대출 858조 원(판매신용 제외)의 75%인 643조 원은 예금취급기관으로부터 공급됐고, 25%인 215조 원은 여신전문기관(신용카드, 캐피탈 등), 보험, 연기금 등 기타 금융기관에 의해서 공급됐다.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 중 제1금융권에 해당하는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71%로 456조 원에 달한다. 나머지 29%에 해당하는 187조 원은 저축은행, 상호금융기관 등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서민금융기관)을 통해서 대출됐다.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 중 지역별로는 전체의 64%가 수도권에 대출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출용도별로는 전체의 61%가 주택 관련 대출이다( 참조).
가계대출 중 주택 관련 대출 외에도 사업자금 조달을 위한 대출의 비중도 제법 높다. 2011년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전체 담보대출 중 거주주택 및 부동산 구입(57%) 외에도 사업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이 28.4%다. 신용대출의 경우에는 사업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이 전체의 33%로 가장 높다.
자영업 가구의 경우 사업자금 마련이 대출용도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지난해 3분기 말 예금은행 중소기업대출 잔액 중 개인사업자대출이 34%인 154조2000억 원에 달한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기업대출에도 이러한 성격의 대출 비중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전체 취업자 중 30%가량이 자영업에 종사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택 관련 대출과 사업자금 조달 목적의 가계대출 비중이 높은 만큼 우리나라 가계의 재무건전성은 부동산 경기나 내수 경기가 침체될 때 악화될 위험에 크게 노출돼 있다.
가계대출, 변동금리·만기 짧아
우리나라 가계대출은 변동금리부 대출의 비중이 높고 만기가 짧아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즉 금융시장의 사정에 따라 가계대출의 금리 리스크나 차환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2011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가계대출 중 변동금리 비중은 90.7%에 달한다. 또한 금리변동주기도 선진국에 비해 짧아 금리변동에 매우 민감하다.
대출만기도 짧은 편이다. 10년 이상의 장기대출 비중이 2010년 말 기준으로 4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만기가 짧은 변동금리부 대출 비중이 높은 것은, 일차적으로 금리 리스크나 차환 리스크에 대한 차입자의 인식 부족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금융시장 여건이 좋은 상황에서는 변동금리가 고정금리에 비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기존 대출의 만기를 연장하거나 신규대출을 통해서 원금을 상환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단기대출을 선호하게 된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금융시장의 장기자금 조달여건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조기에 원금을 회수할 수 있고 금리리스크도 차주에게 넘길 수 있는 단기 변동금리부 대출이 유리하다. 그러나 저금리, 풍부한 시중 유동성 등 차입자에게 유리한 금융시장 여건이 반전될 경우 기존의 이점들은 모두 차입자의 부담이 돼, 가계 부실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다.
주택담보대출의 상환 형태도 대외 충격에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0년 말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중 일시상환형 대출비중이 41.3%로 나타난다. 2004년 말 76.8%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 같은 기간 분할상환형 대출은 23.2%에서 58.7%로 늘어났다. 일시상환형 대출 잔액이 100조 원을 조금 넘은 수준에서 별 변화가 없으면서 분할상환형 대출이 크게 늘어난 결과다. 그러나 분할상환형 대출의 88.5%가 거치기간 연장을 통해 사실상 일시상환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더욱이 2005년 이후 취급됐던 거치식 분할상환형 대출의 거치기간 종료가 본격화하고 있다. 향후 원리금 상환부담에 노출된 가구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