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연일 기름값이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월 23일 서울 용산구의 한 주유소.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200원을 넘었다.
국제 석유시장의 수급사정은 괜찮은 편이다. 세계경제 성장 둔화로 세계 석유 수요가 지난해 4분기에 전년대비 0.3% 감소한 반면, 극심한 공급 차질을 빚은 리비아에서 내전 종식을 기점으로 지난해 9월 말부터 석유 생산이 확대되는 등 전체 석유 공급량도 늘어나 오히려 석유 수급사정은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에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주화 도미노 현상으로 인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던 국제 유가가 수급사정이 좋아지면서 하반기 이후 12월 중순까지 하락세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국제 유가가 다시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최근 들어 이란 핵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나이지리아, 이라크, 카자흐스탄 등 주요 산유국에서도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주요국의 경제지표 개선과 유럽지역 한파로 인한 일시적인 석유 수요의 증가도 한 원인이지만, 현재 유가 불안의 주요 요인은 석유 공급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석유 공급 불안을 야기하고 있는 산유국 중 이란은 미국·이스라엘 등과 대외갈등을 겪고 있고, 이라크·나이지리아·카자흐스탄은 내정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다.
정세 불안한 4개 산유국, 전 세계 석유 생산의 11.5%
이란발 불안은 지난해 1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란 중앙은행의 금융거래를 제재하는 국방수권법을 연초에 발효한 미국이 동맹국들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대(對)이란 제재에 강력히 나섰다. 유럽연합은 1월 23일 오는 7월부터 이란산 원유 수입을 전면 중단할 것을 선언하면서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했다. 이에 반발해 이란은 세계 원유 해상 수송 물량의 3분의 1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제재에 동참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원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내정 불안정에 시달리는 이라크에서는 지난해 12월 시아파가 주도하는 정부가 수니파인 부통령에 대해 테러방조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올해 1월에는 시아파 성지인 주바이르에서 폭탄테러로 1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내정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올해 1월에 유가 보조금 폐지에 반대하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고 최근에는 이슬람 과격단체(Boko Haram)의 테러와 외국인 납치가 빈발해 내전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지난해 5월부터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석유노동자 파업이 대규모 시위로 확대됐고 12월 들어 석유도시 자나오젠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정정(政情)불안을 겪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가 대두한 4개 주요 산유국의 석유 생산 규모는 세계석유 생산의 11.5%(EIA, 2011년 기준)이다. 이 정도의 생산량은 지난해 석유공급 차질을 겪은 리비아의 6.1배에 해당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생산량(세계 석유생산의 10.8%)을 상회하는 규모다
이들 산유국 중 하나라도 석유공급에 전면적인 차질을 겪는다면 유가가 지난해 리비아의 공급 차질 당시보다 더 큰 폭으로 상승할 수 있다. 이들 4개 산유국 모두에서 석유공급 차질이 동시에 빚어진다면 유가는 세계경제에 치명타를 날릴 정도로 폭등할 것이다.
미국도 이란사태 악화 원치 않아
미국은 이란의 핵개발 억제를 위해 경제적·외교적 수단을 계속 취할 것이다. 그러나 재정악화와 경기부진을 겪고 있는 미국에 이란사태가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닐 터.
미국의 재정상황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악화되어 지난 3년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8% 이상을 기록하고 있고 국가채무는 72.4% 늘어나 15조 달러를 돌파했다. 열악한 재정으로 인해 군비지출을 줄여야 할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민간경제도 부진에서 뚜렷이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데, 이란사태가 심화될 경우 유가 상승이 경기 회복의 불씨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