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실제로 종합상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런 종합상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입을 담당하는 부서와 수출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고, 수출도 철강이면 철강, 플랜트면 플랜트 등 팀별로 전문화했다는 것. 그들은 “드라마 ‘미생’에서처럼 한 팀에서 이것저것 파는 것은 1990년대 이전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려 가상의 종합상사 영업팀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1970~80년대 종합상사맨들은 ‘미생’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을 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고,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오지, 사지(死地)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는 ‘전설’이 된 옛 상사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 바이어 만나야 돼”
종합상사는 1975년 정부의 종합무역상사 육성방침에 따라 등장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둔화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지면서 수출이 큰 타격을 받았다. 획기적인 수출진흥 대책이 절실했고, 그 대안의 하나가 종합무역상사였다. 세계 최초의 종합무역상사는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로 알려졌고, 일본은 1873년 미쓰비시상사를 설립했다. 대규모 자본력을 가진 무역업자를 뜻하는 종합상사는 원래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다 하는 회사였지만, 우리나라는 제도를 만들 때부터 수출에 방점을 뒀다.
1975년 하반기부터 세계경기가 오일쇼크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종합상사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시간이 갈수록 각 그룹을 대표하는 회사로 자리 잡아갔다. 여기엔 상사맨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들은 5대양 6대주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며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내다 팔았다. 수출 한국의 첨병이었던 셈.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비약적 성장이 가능했다.
1970~80년대 ‘종합상사맨’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었다. 당시 대기업 공개 채용 공고에 정장을 차려입고 007 가방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에 서 있는 사진이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 시절 종합상사에서 근무했던 박주원(65) 씨는 “그땐 종합상사에 다닌다고 하면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혔다. 그만큼 종합상사에는 유능하고 젊은 인재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종합상사 직원이 아니면 해외 나가는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시대였다. 같은 대기업이라도 종합상사 직원 월급이 더 많았다. 내 기억에 50% 정도는 더 많았다.”
‘수출’이라면 모든 게 해결되던 시절이라 종합상사맨들의 위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통행금지를 어기거나 경범죄로 경찰서에 끌려갔더라도 “내일 아침 해외에서 온 중요한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고만 하면 풀려났다고 한다. 바이어를 접대하다보니 그룹 임원이나 갈 수 있는 고급 술집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바늘부터 선박까지 가리지 않았다. 최초의 종합상사인 삼성물산도 이쑤시개, 비누, ‘이태리타월’ 등을 팔면서 시작했다. 가발, 기성복, 완구, 식기류, 운동용구 등이 초창기 주요 영업 품목이었다. 한약재도 수출했다. 자동차용 배터리가 주요 중화학제품이었을 만큼 품목이 부족했지만 종합상사맨들은 열심히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