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이은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사진가의 주문이 숨 가쁘게 쏟아졌다. “아까처럼 다리 크로스 포즈 한 번 더 가고, 오케이! 다음은 다리 풀고 살짝 더 벌려줘도 돼요. 좋아요!” “이제 오른쪽으로 턴(turn)할게요. 접힌 다리 풀면서 정면으로 날 봐요.”
쉴 틈 없는 지시에 모델이 우왕좌왕하자 답답해진 사진가가 직접 세트 위로 나서 거구를 뒤틀며 시범 자세를 취했다. 10여 분간 촬영이 계속됐고 마침내 사진가의 “오케이!” 소리와 함께 모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부리나케 탈의실로 사라졌다.
컴컴한 어둠 속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1월 말 오후 8시. 서울 성북구 길음동 주택가의 한 건물 3층에 위치한 사진 스튜디오는 바깥의 고즈넉하고 썰렁한 공기와 달리 열기로 가득했다. 당장 내일 안으로 인터넷 쇼핑몰에 업데이트해야 할 ‘신상(신상품)’ 촬영 스케줄이 촉박하게 잡힌 데다, 촬영 예정 시각이 한 시간 넘게 지연된 탓에 업체 직원을 비롯한 촬영 스태프의 조급한 마음이 더해져 현장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이후로도 한참 계속된 촬영은 돌발 상황의 연속. 처음부터 하이힐 사이즈가 맞지 않아 힘들어하던 모델이 더 버티지 못하자 직원이 응급처방으로 휴지를 뭉쳐 구두 속에 넣었다. 모델은 치마의 허리 사이즈가 커 허리춤을 감싸 쥐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피팅모델 5대 여신’
이날 4벌의 미니스커트와 20여 켤레의 스타킹을 갈아 신으며 밤늦게까지 고된 촬영을 이어간 20대 초반의 팔등신 미녀는 최근 젊은 여성 사이에 인기 상종가를 달리는 ‘피팅모델(Fitting Model).’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과 구두 등 패션 상품을 돋보이게 해줌으로써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게 그들의 일. 하지만 원래 피팅모델은 패션디자이너 또는 의류제조업자가 마네킹 대신 사람에게 새로 만든 옷을 입혀보고 착용감과 핏(fit)감, 외관 등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돼 ‘살아 있는 마네킹’으로 불려왔다.
의류회사 직원 또는 아르바이트로 소수에게만 주어지던 피팅모델 일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인터넷 쇼핑몰이 급증하면서다. 2006년 온라인 피팅모델 중개 사이트 ‘피팅모델닷컴’을 설립한 구민수 실장은 “2000년대 초 인터넷 쇼핑몰은 제품만 촬영해 사이트에 올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착용한 모습을 소비자가 가늠할 수 없으니 쇼핑몰 대표가 직접 나서거나 지인 등에게 옷을 입혀 촬영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 쇼핑몰이 급증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전문 피팅모델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반 의류 쇼핑몰에서 시작된 피팅모델의 수요는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면서 속옷, 임부복, 스타킹, 레깅스 외에 신발, 액세서리, 안경, 가발, 악기, 인형 등 광범위해졌다. 기존 전문 모델을 주로 활용하던 웨딩업체 카탈로그 촬영이나 쇼핑몰 사이트 메인 모델 등 광고 부문에서도 피팅모델이 활약하면서 이들의 인기는 갈수록 치솟는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5대 얼짱’이란 말이 회자됐듯, 최근엔 ‘피팅모델 5대 여신’이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미모에 늘씬한 몸매, 깜찍한 매력을 두루 갖춘 피팅모델들이 인기인 대열에 합류했다.
‘모델’의 특성상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연령층은 단연 20대다. 남녀 비율이 1대 9일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반 의류 촬영에서 20~25세가 전체 피팅모델의 60%를 차지한다. 다음이 20대 후반~30대 초반인데, 이들은 주로 ‘미시족’을 타깃으로 한 의류 촬영에 투입된다. 40대 여성도 피팅모델로 인기를 누리는데 주로 ‘마담’ 분위기의 의류 촬영이나 홈쇼핑 등에 투입된다. 중년 나이에 외모나 몸매 등에서 피팅모델 일을 소화할 수 있는 여성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희소성이 있다. 피팅모델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면서 최근엔 10대까지 피팅모델에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