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주는 주총에 반드시 참여해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 필요하면 회사에 따끔하게 충고해야 한다.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은 이런 역할에 소홀하다. 나라마다, 기관투자자마다 행동강령, 즉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가 있어 거기에 따라 활동한다. 기관투자자는 수익률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본시장 전체의 건강성에도 기여해야 한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이 이런 면에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박 이사에 따르면 APG의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투자 기업의 주총에 참여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주권을 행사’하고 ‘최소 분기에 한 번씩 주권 행사 내역을 공개’하도록 돼 있다. 주주 권리를 행사할 때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는 “네덜란드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이 합쳐진 것이 APG인데, 연금 가입자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며 “APG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르면 주총에서 기권할 때 그것이 의사결정 회피 수단이면 안 된다. 이해상충을 피하는 것 등 구체적 목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상자기사 참조).
▼ 한국에선 지배주주의 입김이 막강하다.
“한국 지배구조 문제를 거론할 때 가장 심각하고 걱정되는 것이 바로 이해상충의 문제다. A라는 자산운용사와 B라는 대기업이 있다고 하자. A가 B의 주주라면 기관투자자로서 건강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B가 워낙 큰 기업이다보니 ‘이러면 B가 싫어할 거야’라고 지레짐작하며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의사결정을 할 때 이해관계자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선진국은 물론 홍콩, 싱가포르에선 내부거래를 승인할 때 지배주주나 계열사 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독립적 주주들로만 의결한다.”
▼ 한국에서 내부거래 승인을 이사회에서 처리한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선 주총 안건이다. 심지어 한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 소유 건물에 입주한다거나 모(母)회사로부터 업무용 컴퓨터를 구입한다거나, 건물 보안 서비스를 계열사에 맡길 때에도 주총 안건으로 올려 지배주주 지분을 제외하고 의결한다.”
▼ 그렇게 되면 주총 안건이 너무 많아지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러한 정기적 안건은 1년에 한 번, 한꺼번에 주총에 올린다. 먼저 이사회가 안건이 합당한지 여부를 판단하고, 다시 주주의 승인을 받는 거다. 계열사끼리 합작회사를 세운다든지 공동 투자한다든지 하는 중요 사안은 두세 군데 외부기관에 조사를 의뢰해 그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제공한다. 이왕이면 같은 계열사 건물에 입주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임차료를 말도 안 되게 비싸게 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주주들의 이러한 불안, 의심을 해소하는 뜻에서 주총에 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지주회사 전환 이후 ‘리스크’
삼성을 비롯한 대규모 기업집단들의 당면 과제는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것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역시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종국에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박 이사는 “순환출자 구조에서 지주회사 체제로 이동하는 것은 지배구조를 안정화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면서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번 엘리엇 사태도 결국 합병 과정의 합리성, 투명성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경영진, 주주, 상대 회사의 주주 등 여러 주체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절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각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사회 멤버들은 주주 이익을 대변하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그런데 한국 기업 이사회들은 실질적으로 권한을 이양 받은 적이 없다. 이사회 문제는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거라고 본다. 이슈가 불거지면 이사회가 경영진과 함께 배임 혐의로 고발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주회사 체제에서 이사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지주회사로 전환했다고 지배구조가 완성된 게 아니다. 지주회사가 지배주주로서 자회사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자회사가 지주회사에 로열티를 과도하게 지급한다거나, 손자회사를 많이 만들어 레버리지를 너무 올린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이미 한국 지주회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게 차후 큰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특히 한국 지주회사들이 챙겨가는 막대한 로열티를 걱정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