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소프트파워’ 이대영 원장

‘예술 뉴딜’ 대박 조짐… 100만 학생이 반했다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9-11-06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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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중고교에서 예술교육 붐 일으키다
    • 임대아파트, 다문화, 복지관의 ‘강마에’들
    • 일류 국가 브랜드로 가는 길
    • 세계가 놀란 성과…유네스코 대회 유치
    • MB정권에 직(職) 걸고 할 말 하겠다
    ‘소프트파워’ 이대영 원장
    낡고 웅장한 서울 구로구청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약도상으로 구의회·구민회관은 인접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200~300m 걸어야 했다. 작은 공원 옆 현대적인 외관의 구의회 건물은 공연극장으로도 사용되고 있었고 갈색 톤의 구민회관은 대학로 마로니에 풍경을 연상하게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하 교육진흥원)은 지난해 7월 이 구로구민회관으로 이전했다. 공공기관, 공기업이 지자체 부속건물에 본사를 두는 일은 흔치 않아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2층 집무실에서 이대영(李垈穎· 47) 원장을 만났다. 연극인 출신인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내다 지난해 7월 교육진흥원 2대 원장에 취임했다.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주의연대’ 창립(2004년 11월) 멤버로서 이명박 대통령,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뉴라이트 이력으로 미뤄 짐작건대, ‘친MB계가 공기업 경영일선에 포진해 전(前)정권의 구태를 일소하고 MB의 선진화 국정이념을 구현한다’는 반복되는 패턴의 연장선으로 비쳤다. “취임 후 추진해온 개혁과제와 성과는 무엇인가”라는 예측가능하고 평이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盧정권이 일 잘해주었다

    그러나 이 원장의 첫마디는 이런 예상과는 달랐다. “내가 이 자리에 강력히 오고 싶어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이 말은 2005년 진흥원을 설립해 3년간 이끌어온 전임 김주호 초대 원장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전임 원장이 지난해 2월18일 임기가 만료되어 3월1일 새 원장이 취임해야 했죠. 현 정부에서 내게 권유했지만 ‘수강신청 받아놓은 상태라 어렵다’고 고사했습니다. 사실 전임 원장이 열심히, 잘해 주었잖아요. 경복궁 컨테이너 박스에서 시작한 진흥원을 이렇게….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됐지만 그분이 한 번 더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유인촌 장관과는 같은 연극인으로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곁에서 봐와서 아는데, 문화예술 진흥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입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중앙대의 박범훈 총장께서 현 정부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물망에 오를 때였어요. 내가 박 총장께 직언을 드렸습니다. ‘중앙대 총장이 장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총장 임기까지 대학을 위해 일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요. 그렇게 말씀드려놓고 유 장관 산하기관의 자리로 옮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한 번 더 요청이 왔어요. ‘학기 수업 끝나는 7월부터 맡아달라’고요.”

    ▼ 어떻게 대답했나요?

    “참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나를 검증해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대요. 내가 봐도 지금껏 모아둔 게 창피할 정도니까…. 생각 끝에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경기 양평 중미산 천문대에 올라갔어요.”

    ▼ 거긴 국내 최대 반사망원경이 있는 곳이죠.

    “5월이면 미국산 쇠고기 촛불시위로 세상이 들끓을 때였죠. 내가 ‘MB정권에서 일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학생들이 난리가 났어요. ‘거기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함께 별을 보며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그들도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명박 정권 ‘공기업 선진화’의 대표적 특성은 ‘다운사이징(downsizing·조직축소)’이다. 또한 경영실적에 대한 ‘계량적 평가’가 선진화의 잣대가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정원 OO% 감축’‘수익 OO% 증가’ 등 종사자들의 업무활동은 모두 수치화된다. 여러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행태를 개선하기 위해선 이러한 엄정함도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획일화된 개혁’은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공기업 영역에서 ‘양적 평가’와 ‘강한 개혁드라이브’가 요구되는지 몰라도 특수 영역에서는 이와는 다른 ‘질적 평가’도 필요하다. 이런 영역의 공기업이 의외로 수치화할 수 없는 큰 기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청와대와 장관 등 정책결정권자는 데이터가 아닌 ‘직관’으로 ‘숨은 잠재가치’를 알아내야 하고 이를 현실로 구현해낼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개혁은 ‘수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주관’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은 어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일이다.

    이와 관련해 이대영 원장은 “교육진흥원은 인간 정신을 다루는 문화예술 영역의 기관으로서 감성적인 개혁, 계승하는 개혁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가 밝힌 청사진은 자사의 역량을 분출시켜 나라를 ‘일류 브랜드 국가’로 이끌겠다는, ‘세상을 바꾸는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다.

    ‘소프트파워’ 이대영 원장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신이 버린 직장”

    ▼ 요즘 모든 공기업이 구조조정 문제로 난리인데요.

    “교육진흥원은 2005년 연간 80억원의 예산으로 출범했어요. 그때 정원이 21명이었고요. 올해는 연간 600억쯤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21명이죠. 동결조치 때문에. 공기업을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신이 버린 직장’입니다. 일 굉장히 많이 해야 해요. 내가 온 뒤로 컨트롤타워를 두는 등 체계화하고 공정한 평가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건가요?

    “공기업 선진화가 일률적인 축소화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비만은 줄이고 근육은 늘려야 하는데, 교육진흥원은 미래 창조산업의 중추인 근육에 해당합니다. 직원이 수천, 수만 명인 공기업과 우리처럼 수십 명인 곳을 같이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한 10, 20명 늘려도 별 차이 없고 예산낭비 아닙니다.”

    ▼ 사업규모는 7배 이상 늘었는데 그동안 일을 어떻게 해나간 거죠?

    “수십여 명의 비정규직원이 돕고 있어요. 내가 시간강사를 10년 정도 해봐서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잘 압니다. 참 안타까운 게 인턴사원들은 12월 말 그만두거나 다음 단계로 올라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올라갈 방안이 없어요. 성실하고 능력 있는 분도 꽤 있는데 말이죠. 직을 걸고 한번 말하고 싶어요. ‘늘려야 할 곳은 늘려달라’고 말입니다.”

    ▼ 정부에 건의해봤나요?

    “여러 번 의견을 개진했죠. 사실 우리 기관은 급여 현실화도 시급해요. 최소한 유사 기관과 비슷하게 임금체계가 그루핑(grouping)되도록 형평을 맞춰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는데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열정 하나로 일하고 있어요.”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이름으로 풀이하자면 ‘문화예술을 가르치는 교육을 진흥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되는 거죠?

    “그렇죠. 전국 상당수 초중고교에 예술강사를 보내 학생들에게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있고 사회에서도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어요.”

    ▼ 같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그곳은 문화예술 ‘창작자들’을 지원합니다. 반면 우리는 문화예술 ‘소비자들’을 육성해내는 곳이죠. 교육을 통해 청소년과 국민들이 문화예술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갖도록 해줌으로써 장차 이들이 문화예술의 미래 소비자, 잠재 고객이 되도록 해주는 거죠.”

    교육진흥원은 주로 문화체육관광부, 교육과학기술부 등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사업을 집행한다. 지난해 예산은 300억원이었지만 이 원장이 맡은 올해엔 6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 원장이 “청소년과 국민의 문화예술의식 함양에 힘을 써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고 한다. 그는 자사 사업을 ‘국가중추사업’이라고 했다.

    ▼ 국가중추사업으로 볼 근거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체험교육을 통해 ‘예술적 안목이 있는 문화시민’을 양성합니다. 그 숫자는 앞으로 수백만 명, 혹은 1000만명이 넘어설지 모릅니다. 이들은 문화예술 작품들을 보고 들으러 다니게 돼요. 졸작과 수작을 쉽게 구별해냅니다. 좋은 작품들에는 관객이 몰리고 창작자들은 흥이 나는 거죠. 창작활동이 활성화되고 다시 소비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됩니다. 이런 풍토에서 세계적 브랜드의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 두꺼운 소비자층이 존재해야 창작품의 질적 수준도 높아진다는 거죠?

    “창작자들이 아무리 애를 쓰면 뭐합니까. 봐주는 관객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죠. 서울이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세계적 작품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도시가 되면 외국에서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우리 문화와 소통하겠죠. 뉴욕이나 파리처럼 이내 일류 브랜드 도시로 올라서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문화국가의 위상을 얻게 됩니다.”

    문화예술 소비자 만들기

    ▼ 그런데 소수의 천재적 창작자가 그 사회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남준이라는 천재는 한국인이지만 그를 세계적 예술가로 키운 건 한국 사회가 아니라 미국 사회였죠. 그래서 백남준의 공간들은 고스란히 미국에 쌓여있죠. 수용자층이 두꺼운 사회에서 셰익스피어가 나오고 바흐가 나옵니다.”

    ▼ 문화예술 교육은 ‘여가시간 제공’ 이상의 ‘전략적 가치’가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정부는 대한민국을 ‘강한 나라’ ‘더 큰 대한민국’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무엇으로 만들죠? 강한 군대로?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해답은 문화예술에 있다고 봐요.”

    최근 들어 한국이 나아가야 할 진로는 ‘경제문화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매일경제 2009년 2월4일 보도, 머니투데이 2009년 7월7일 보도) 이를 위해선 ‘문화예술을 즐길 줄 아는 대중’이 출현해야 하고 이러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예술이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한류(韓流)로 우리의 잠재력은 확인됐다. 그러나 더 분발해야 한다. 높은 문화예술 수준은 국민 개개인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여준다”고 했다.

    지난 3월3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1500여 명의 예술강사가 참여한 가운데 발대식이 열렸다. 교육진흥원은 실기능력을 갖춘 예술분야 대학 졸업자를 예술강사로 채용해 전국 초중고교에서 가르치게 하고 있다. 현재는 국악, 연극, 영화, 무용, 만화-애니메이션 등 5개 분야로 되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사업에 250억원을 지원했다.

    예술강사를 채택하는 학교는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3~6월 교육진흥원은 전국 1만1000여 개 초중고교 중 7698개 학교에 3483명의 예술강사를 배치했다. 이는 지난해의 4500여 개 학교보다 훨씬 더 늘어난 수치다. 대체로 학생 1인당 일주일에 2~3시간 예술수업을 받는다. 정규수업시간에 교육하기도 하고, 방과 후 수업, 동아리활동을 이용하기도 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방과 후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학교 측이 예술강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다 보내주는 건 아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고 한다. 진흥원 관계자는 “학교 측이 예술강사를 교사와 똑같이 대해주지 않으면 강사를 소환한다”고 말했다.

    예술강사는 경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략 시간당 4만원의 강사료를 지급받는다. 400시간을 가르치면 1600만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일부 강사는 “액수가 적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데다 대학 강사의 강의료 수준을 고려했을 때 쉽게 인상해줄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교육진흥원 기영준 학교교육팀장 “예술강사는 정규직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 창출 효과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소프트파워’ 이대영 원장

    인천 성리중학교의 뮤지컬 교육 현장.

    “인생은 놀이다”

    ‘교육의 질’의 균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육프로그램은 세심한 부분까지 기획돼 있다. 학생들이 직접 창작에 참여하는 과정이 들어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교육진흥원은 ‘전문예술인’을 키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잘 접해보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게 목적이다.

    교육진흥원에 따르면 예술강사들은 전국 초중고교에서 ‘예술교육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한 초등학생들, 중고교생들에게 문화충격을 주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영화수업의 경우 학생들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촬영도 한다. 서울 우신고 학생들은 이렇게 만든 영화작품을 연말에 상영할 예정이다. 교육진흥원 측이 방문했을 때 한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국악 ‘홍보가’의 박 타는 대목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상당수 학생이 지루하다고 여겨온 국악과 친숙해졌다고 한다. 다른 한 초등학교 교장은 “‘무용수업 때문에 학교에 온다’고 하는 학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만화-애니메이션 수업에서도 학생들은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만화를 그려본다. 서울 선린인터넷고 학생들은 역할을 나누어 상황극을 준비했다. 이대영 원장은 “연극을 해보면 연극이나 인생이나 결국 ‘놀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소프트파워’ 이대영 원장
    유명 예술인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공연하고 강의하는 명예교사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김대진(수원시향 지휘자), 백주영(바이올리니스트), 정명훈(서울시향 예술감독), 조수미(성악가), 남경주(뮤지컬 배우), 송승환(PMC 대표), 강수진(발레리나), 문훈숙(발레리나), 이원복(만화가), 강은일(해금 플러스), 김덕수(국악가), 박종원(영화감독), 심형래(영화감독), 오경환(서양화가), 김영세(디자이너), 은희경(소설가), 정호승(시인)씨가 올 들어 211개 학교 1만1900명의 학생을 맞았다.

    지난 8월11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함께 하는 음악이야기’에 참가한 2000여 명의 어린이 관객은 정명훈씨의 지휘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국립발레단이 펼치는 ‘호두까기인형’ ‘풀피리의 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지켜봤다. 정씨의 지휘에 맞춰 어린이 관객들은 노래를 불렀다. 이대영 원장은 “어린 학생들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정명훈씨의 공연은 일상일 뿐이며 즐기면 된다’는 것을 느끼는 과정”이라고 했다.

    92.5%의 긍정 평가

    이대영 원장에 따르면 전국 100만여 명의 초중고교 학생이 예술교육을 받았다. 최근 교사, 학생, 예술강사 대상 ‘예술교육 만족도’ 조사에서 긍정적 평가는 92.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큰 호응이 일자 교육진흥원은 내년에는 기존 5개 분야 외에 사진, 디자인, 전통공예 분야에서도 다수의 예술강사를 채용해 학교에 보낼 예정이다.

    예술강사들은 학교뿐 아니라 사회 곳곳으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김태연 교육진흥원 사회교육팀장은 “올해 상반기 예술강사 346명이 아동, 노인, 장애인 복지시설 322개소에 배치돼 예술교육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교육을 받는 한 60대 남성은 “퇴임 후에야 드디어 이젤 앞에 앉게 됐다”며 기뻐했다. 40개 군 부대, 16개 교정시설, 8개 소년원학교에서도 문화예술 교육이 지원됐다.

    강원 인제군 북면 월학1리 냇강마을의 주민 30여 명과 인근 원통고 학생 10여 명은 요즘 90분짜리 영화 ‘살아가는 기적’을 제작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진흥원이 펴고 있는 ‘생활문화공동체 시범사업’ 중 하나다. 아들이 사준 200만원짜리 보청기를 잃어버린 할머니의 사연 등 동네 주민들의 실생활이 신지승 영화감독의 필름에 담기고 있다.

    교육진흥원과 SK텔레콤은 재능은 있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료로 음악교육을 시켜주는 ‘해피뮤지컬스쿨 사업’도 운영 중이다. 영구임대아파트 거주 아동들과 청소년들에게 뮤지컬과 악기를 가르친다. 학생들은 1개월 동안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클래식 악기와 발레, 합창단 등 뮤지컬 교육을 체험한다. 이후 원하는 분야를 정해 교육받고 발표회도 연다. 베네수엘라에서 25만명의 어린이에게 악기를 가르치며 범죄예방 운동을 편 국가음악교육시스템 ‘엘 시스테마(El Sistema)’와 유사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이대영 원장은 “청소년들과 저소득층에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고 했다.

    지난 8월28일 서울 강남구 수서청소년수련관 청소년극장에서는 해피뮤지컬스쿨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뮤지컬 ‘난센스’를 공연했다. “학생들은 방학 동안 그렇게 연습하고도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한지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하지만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자 떨리는 기색 없이 당당히 공연을 해냈다. 무대 위의 아이들도, 무대 아래 관객석에 앉은 이들도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 방학 내내 이어진 연습에 목소리가 쉬어버린 이성영군은 ‘열정만 있다면 배우를 꿈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2009년 8월31일 보도)

    세계적 미술교육학자 그레엄 설리반(58)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 7월13일 교육진흥원 초청으로 방한한 자리에서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자신의 환경에서 이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설리반 교수는 창작자와 관객을 이어주는 매개자인 ‘문화실행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술뉴딜에 더 투자하라”

    이런 시각에 따르면 교육진흥원이 추진해온 예술교육은 교육대상자의 직접 참여, 문화실행자(예술강사)의 조력 등 성공요인을 갖추고 있다. 교육진흥원은 전국 초중고교와 아파트단지, 시골 마을, 복지관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학교문화예술교육, 사회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예술뉴딜’로 부른다. 국가적 규모의 예술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차원에서 ‘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문화예술체험의 전국적 확산은 국민의 의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부드러운 힘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원장은 “정부가 ‘예술뉴딜’에 주목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예산이 지난해 300억원, 올해 600억원에서 내년 1000억원으로 증액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우리나라가 제조업 중심 고속성장으로 빈곤에서 탈피했듯, 이제는 예술교육에 대한 집중투자로 ‘글로벌 경제문화강국’ 대열에 진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예술이냐’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당 한두 가지 예술교육만 실시했는데도 달라졌어요. 학생들이 행복해 합니다. 전국 모든 초중고교에서 8가지 예술교육을 모두 받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죠. 다양한 단위의 저소득 계층이 문화예술 교육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갖는 통합의 기능도 상당할 겁니다.”(이대영 원장)

    교육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유럽에서 ‘문화예술’ 교육은 ‘과학’ 교육과 동등하게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예술교육의 확산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서구 국가에서도 문화예술 교육의 중요성은 최근 새롭게 부각된다. 이 원장은 “문화예술 교육은 전세계를 흐르는 문화사적 조류가 되고 있다”고 했다.

    ‘졸부국가’ 안 되려면…

    ▼ 문화예술 교육은 어떠한 인간형을 지향하는가요?

    “‘스토리텔링’ ‘디자인’ ‘배려’ ‘공감’의 능력을 갖춘 인재를 추구합니다. 교육은 주입식 체제에서 창의적 체제로 바뀌어야 해요.”

    ▼ 우리 사회의 문화예술 향유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하드웨어는 풍부하다고 봅니다. ‘문화예술회관’만 해도 전국에 산재해 있잖아요. 그러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그 안에 담을 소프트웨어가 부족해요. 문화예술회관이 예비군훈련장, 민방위소집장으로 주로 쓰이잖아요. 보러 오는 사람, 참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 국가 이미지에 주는 영향은….

    “돈은 좀 벌지만 문화예술을 향유할 줄 모르는 ‘졸부국가’로 비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문화예술과의 거리 없애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참여하는 소프트웨어’, 이것이 우리가 표방하는 바예요. ‘악기 하나 다뤄보고 싶다’는 평소의 꿈, 그걸 당장 저렴하게 실현시켜 드리겠다는 거죠.”

    ▼ 문화예술 교육의 수준은 어떤가요?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 문화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떴어요. 출발은 늦었지만 대응은 기민했어요.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을 제정했고 그 일을 전담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설립했습니다. 지구상에 이렇게 법률과 기구까지 별도로 만든 나라가 없어요.”

    2006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1차 ‘유엔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에서 한국은 이러한 문화예술 교육 현황을 보고했다. 세계 각국은 이 보고에 강한 인상을 받아 제2차 대회의 서울 개최를 결정했다고 한다. 제2차 대회는 2010년 5월23일부터 28일까지 2000여 명이 참여해 세계 예술교육 분야의 최대행사로 치러질 예정이다. 교육진흥원은 유네스코 국제기구(세계문화예술교육센터)가 한국에 설치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원장은 “내년 서울 행사 때 한국의 과감한 예술교육 투자를 세계인에게 알려 한국의 문화국가 이미지를 고양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구로구는 ‘문화예술’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교육진흥원이 구로로 이전한 것은 의외로 비쳤다. 아무리 ‘월드 와이드 웹(www)’의 시대를 살고 있어도 “현실세계의 어디에서 일하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공간’은 가끔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다. 구로라는 공간은 교육진흥원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고, 교육진흥원 사람들은 구로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 구로로 이전해보니 어떠한가요?

    “전임 원장이 이전을 결정했지만 내가 취임하면서 옮겨왔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구로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민해봤어요. 먼저 구로의 과거를 돌아봤어요. 구로는 1960, 70년대 산업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공단을 문화예술 중심지로”

    ▼ 구로구청도 그때 모습 그대로고요.

    “구로는 1980년대엔 노동운동 등 민주화의 상징이었고 1990년대 말부터는 디지털정보화를 선도했습니다. 구로는 이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10년 안에 구로를 ‘동아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어요. 미국 뉴욕 방적공장들이 리모델링되어 ‘세계 문화의 중심’인 브로드웨이 42번가의 50여 개 극장으로 재탄생했듯, 구로의 노후공단을 문화예술단지로 바꾸는 거죠. 구청장, 서울시장, 국가의 의지가 이런 한 방향으로 모아지도록 힘써볼 생각이에요.”

    ▼ 구로지역의 교육환경은 어떠하던가요?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교육진흥원에 몇 개의 공립 초등학교를 시범적으로 맡겨주었으면 좋겠어요. ‘세계에서 학생들이 가장 등교하고 싶어하는 학교’로 만들어 보일 자신이 있어요.”

    이 원장은 고 육영수 여사 장례식 TV 중계에서 흘러나온 장송곡 ‘오제의 죽음’을 듣고 극작가가 됐다고 한다. 연극, 게임, 영화, 컴퓨터 일을 했고 대학에선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가르쳤다. 그는 “나는 ‘낙하산’이 맞다. ‘특전사 낙하산’”이라고 했다. “목표지점에 정확히 떨어져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 임무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1960년대엔 학교의 사정이 가정보다 좋았어요. 그때 빨리 학교 가고 싶어했죠. 지금은 거꾸로 됐습니다. 그래서 공교육 붕괴 얘기가 나옵니다. 학교에 오고 싶어지도록 학교가 학생을 잘 유혹하면 됩니다. ‘문화예술 교육’은 학생을 학교로 끌어들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거예요.”

    교육진흥원은 특히 취학 전 세대의 무궁한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간 양질의 문화예술 공교육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원장은 “나는 임기(3년) 마치면 떠날 사람이고 직원들은 정년까지 남는다. 직원들을 상하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로 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 ‘공기업 다운사이징’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부에 “증원해달라” “월급 올려달라” “예산 화끈하게 밀어달라”고 요구하는 공공기관 경영자는 흔치 않다. 구조조정은 개혁의 수단 중 하나이고 개혁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좋은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취지다.

    청소년·저소득층 받드는 개혁

    이 원장은 “우리 국민이 4억명쯤 되는 듯하다. 자기 목소리만 내고 싸우니”라면서도 “결국 힘을 가진 쪽이 약한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진흥원은 3500여 예술교사, 5000여 학교, 1만2000여 개인 및 단체를 상대한다. 이러저러한 문의, 요구가 끊임없이 들어온다. “다른 업무가 지체되더라도 민원인의 이야기를 최우선으로 들어준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졸부국가가 되지 말자”는 말은 울림이 있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추구하는 청소년과 저소득층을 받드는 개혁은 한국 사회에 결핍된 가치를 채워줄 수 있는 그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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