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신저가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왔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미 상당부분 진척된 ‘김정일 정권 교체계획’을 키신저가 청와대 측에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의 한 관계자는 “친서는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북핵 문제 해결방안에 관해 개인 신분 이상의 자격으로 논의한 것은 맞다”고 전했다.
묘한 분위기는 워싱턴에서도 감지됐다. 8월초 워싱턴을 방문해 정계 지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대학교수는 “공화당 쪽 사람들이 김정일 정권 교체를 위해 억달러 단위의 비공개 예산안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전한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협상이라는 당근이 북한에 먹혀들지 않을 경우 미국이 사용할 채찍은 ‘제한공격’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시 행정부가 정권교체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는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영변에 있던 핵 시설이나 폐연료봉 등이 이미 상당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폭격해봐야 효과가 없으리라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제는 ‘대증요법’이 아닌 ‘원인치료’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것.
사실 미국이 김정일 정권 교체를 준비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에 가깝다. 지난 7월16일 미 하원은 기구를 이용해 북한에 라디오를 대량 살포하고 라디오 프리 아시아(RFA)의 대북 방송을 하루 4시간에서 24시간으로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워싱턴포스트’는 ‘부시 행정부가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 규모의 탈북난민을 수용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북한의 고위급 관계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계획이 가동되고 있다는 소식도 줄을 이었다. 이와 함께 북·중 접경지대에 대규모 난민촌을 건설하는 계획에 대해 중국과 미국이 합의했다는 설도 흘러나왔다(206쪽 ‘탈북난민촌’ 관련기사 참고).
특히 탈북자 난민촌의 실행방안이 가시화할 경우, 북한 정권교체는 더 이상 시나리오 차원에서 머물 수 없게 된다. 눈여겨볼 대목은 중국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중국의 양해하에 난민촌이 건설된다는 것은 중국이 더 이상 북한을 두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경우 주민들은 물론 지도부 구성원들도 섬처럼 고립된 김정일 체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난민촌이라는 ‘쐐기’로 북한과 중국, 김정일 위원장과 다른 구성원 간의 간격을 넓히는 이른바 ‘쐐기전략’이 먹혀드는 것이다.
레짐 체인지와 리더십 체인지
우선 용어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흔히 영어의 ‘Regime Change’를 ‘정권교체’로 옮기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Regime이란 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북한의 경우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는 것이 ‘Regime Change’다.
대신 정권교체는 영어의 ‘Leadership Change’에 가깝다. 사회주의 체제는 그대로 두되 지도부만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다른 이로 교체하는 방안이다. 현재 부시 행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레짐 체인지가 아닌 리더십 체인지라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이 용인할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친미보다는 친중 성향을 띄지만 대신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에 매진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을 찾는다는 시나리오다.
사실 미국은 제3세계 국가의 리더십 체인지에 관해서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냉전 시기 CIA가 중남미 및 아프리카 국가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음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휴전반대를 강행하고 나서자 그를 제거한 뒤 UN군정을 실시하려고 했던 ‘에버레디 플랜’이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이 리더십 체인지에 나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해당 국가 내부에서 은밀히 동조자를 찾는 일이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나라를 살려야 하지 않겠나’라는 논리로 협력전선을 구축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지도체제는 권위적이지만 나름대로 시민사회가 튼튼한 국가라면 반정부조직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북한과 같이 시민사회가 전무한 나라라면 상당한 실력자를 접촉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