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후 5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상황은 그때와 흡사하다. 한반도 전문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지난 7월 “미국과 북한이 빠르면 올해 안에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이미 현 상황에 대해 통제력을 잃은 듯하다”며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미국 도시들을 파괴할 핵무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러한 재난상태에 이른 것일까. 미국이 그 동안 펼친 정책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우리가 놓친 대응책은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온 미국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듯 치명적인 위험상황을 낳은 것일까.
혹자는 “그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 기울인 노력은 모두 실패였다”고 단언한다. 한반도는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후 분단됐고, 미국은 김일성의 지위와 그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곧 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낳고도 한반도를 통일시키지 못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과 평화조약이나 협정을 맺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북한을 철저히 무시하는 정책이 50년 동안 지속된 지금, 눈앞에 남은 것은 끔찍한 전쟁의 가능성이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미국과 북한은 마치 고양이와 쥐처럼 위험한 외교를 벌여왔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카드로 사용해 왔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에 대처하는 데 실수를 거듭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최근 5년간의 주요사건들을 검토해 위기가 심화한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1994년 핵위기의 전말
1994년 6월 미국과 북한 사이에 고조된 긴장상태는 현재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 무렵 윌리엄 페리 장관과 애쉬턴 카터 국방차관보는 북한 영변에 선제공격을 가하면서도 제2의 한국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했다. 6월 중순까지 클린턴 행정부는 전쟁준비의 첫 단계 조치를 마련한다. 주한미군 1만여 명 증원, 아파치 헬기 급파, 브래들리 장갑차 추가배치 등이 그 골자였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예상되는 인적·물적 비용을 정밀하게 보고해야 했다. 이를 위해 5월, 각 지역의 미군 사령관과 4성장군들이 워싱턴에 모였다. 게리 럭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은 8만~10만, 한국군은 수십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산했다. 더욱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민간인 사망자 수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럭 사령관은 전쟁비용이 최소 5억달러에서 최대 1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걸프전에 소요된 비용은 600억달러였다).
분명한 것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 김정일 위원장과 평양의 지도부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양은 위기를 벗어나는 동시에 미국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고도의 외교술을 발휘했다. 이미 수년 전 평양에 방문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바 있던 카터 전 대통령이 그 수단이었다. 백악관으로부터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전해들은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이 장면을 중계한 CNN의 보도가 전세계에 타전되자 북미간의 위기는 성공적으로 해결됐다.
그 해 10월 맺어진 기본합의(이하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한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흑연원자로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이를 검증하기 위한 핵사찰에 응하는 대가로 한·미·일로부터 경수로를 공급받기로 했다. 경수로 구입비용 40억달러 또한 세 나라가 장기차관 형태로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은 흑연로 폐쇄로 인한 북한의 에너지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난방용 석유도 공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