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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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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낮에는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첨단과학을 연구하고, 저녁에는 발레를 보고 숲길을 산책한 뒤 카페에서 상대성이론을 논하는 도시.’ 광대한 러시아 영토의 한복판, 시베리아의 넓은 평원지대에 연구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하려 했던 사람들이 처음 그렸던 꿈은 그런 것이었다. 비록 역사는 그 꿈을 무너뜨렸지만 소비에트 붕괴 10년을 넘긴 지금 도시는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아카뎀고로도크 전경

공항을 출발하면서부터 한 시간 내내 시베리아 자랑에 침이 마르던 택시기사가 다 왔다며 차를 세웠다.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라는 것이다. 이상한 것이, 지도에는 분명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는 호텔인데 사방을 둘러봐도 울창한 숲뿐이다. 한적한 휴양림 분위기다.

호텔 직원에게 예약을 했다고 얘기했지만 선뜻 방을 내주지 않을 분위기다.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어느 기관의 초청을 받았는지, 누구를 만날 예정인지 꼬치꼬치 묻는다. “아카뎀고로도크는 제한이 엄격한 도시이기 때문에 단순 관광객에게는 호텔 투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 소련 시절부터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국가지정 과학도시임을 실감케 하는 ‘첫인사’였다.

한참을 확인하고 난 호텔 직원이 열쇠를 내준다. 방에 올라가 다시 사방을 살펴보지만 온통 숲이기는 밑에서 볼 때나 마찬가지. 한참을 둘러보고 나서야 나무들 사이로 숨어 있는 건물 꼭대기들이 언뜻언뜻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시를 짓고 나서 조경을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숲속에 군데군데 건물을 짓고 길을 낸 형국이다.

안내지도를 펴보니 도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러시아어로 ‘아카뎀’은 아카데미, ‘고로도크’는 작은 도시를 의미한다. 아카뎀고로도크는 그러니까 ‘작은 학술도시’쯤 되는 셈이다. 이 도시는 러시아 영토의 한복판인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남쪽으로 40km 지점, 사방을 둘러봐야 언덕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완벽한 ‘一’자 지평선의 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자작나무와 전나무만이 울창하던 숲 사이사이에 30여 개의 대형 연구소와 4개의 대학, 10만여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 사회주의 소련 과학중흥의 본거지로 마련한 것이 바로 아카뎀고로도크다. 동서냉전 체제와 우주개발 경쟁이 막 불붙기 시작하던 1957년의 일이었다.

잘 관리된 연구단지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아카뎀고로도크 인근 시베리아 횡단철도

짐을 풀고 거리에 나가 천천히 걸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과연 연구도시답다. 도로 위에 반듯하게 그려진 횡단보도와 제대로 작동되는 신호등. 한쪽에서는 새로 도로포장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러시아 지방 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려진 건물 하나 눈에 띄지 않고, 길가의 잔디는 잘 다듬어져 가지런한 데다 여기저기 꽃까지 심어놓았다. ‘여기가 러시아 맞나’싶을 만큼 잘 관리된 모양새다.

호텔이 있는 일리치 거리를 따라 우체국과 쇼핑센터, 영화관, 노천카페, 콘서트홀 등이 줄지어 서 있다. 여가용 문화시설을 한 거리에 배치한 것이 전형적인 소비에트식 도시설계 그대로다. 필요할 때는 집회를 할 수 있는 작은 광장도 있고, 연구도시답게 꽤 큰 규모의 서점도 몇 군데 보인다. 일리치 거리를 따라 중심도로인 모르스코이가와 라브렌체브가에 이르자 4~5층짜리 연구소 건물들이 숲 사이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아카뎀고로도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연구소가 밀집해 있는 연구단지와 아파트가 대부분인 거주단지가 그것이다. 기자가 묵은 호텔은 연구단지에 위치해 있다. 연구단지라고 해서 연구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빽빽한 나무에 가려 있는 까닭에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뿐, 연구소 사이사이 숲 속에는 3층짜리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우선 이 연구단지를 구석구석 살펴보기로 마음먹는다.

조금 더 걷자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연구소라는 핵물리연구소가 나타났다. 그 앞 화단에는 젊은 여성 두 명이 모종삽을 들고 빨갛게 핀 꽃들을 다듬고 있다. 거리의 잔디밭이 어찌 그리 깔끔한지 궁금증이 해결됐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20명 남짓 되는 직원들이 일주일 내내 도시 주요도로와 건물 주변의 꽃과 잔디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내친김에 숲속 아파트 사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나뭇가지가 길을 막을 만큼 울창한 숲길 사이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다. 알록달록 페인트칠이 잘 돼 있는 놀이기구 뒤로 보이는 주차장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일제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다. 마침 아이를 데리고 나온 30대 주부 라리사 카말료바씨에게 이 도시에 사는 이유를 물었다.

“자연이 좋잖아요. 거리도 깨끗하고 치안도 괜찮은 편이고요. 이를 위해 시 당국도 노력을 많이 하니까요. 예를 들어 쓰레기만 해도 다른 도시에서는 한쪽 쓰레기장에 모아두면 며칠에 한 번씩 처리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수거차가 건물마다 방문하죠. 모두들 시간에 맞춰 쓰레기를 들고 나오니 거리가 깨끗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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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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