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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 “이제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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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활한 대지와 짙푸른 초목이 이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라바쉬까지 162km. 그 사이로 흐르는 강줄기를 타고 구한말 한인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 때로는 강을 끼고, 때로는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 위에.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한인마을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던 연해주 남부 핫산지역. 그 북부 중심에 바라바쉬(Barbash)라는 마을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남쪽으로 162km 정도 거리에 있는 이곳은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리적 환경적 여건 덕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중국이나 북한 국경지대로 가는 도중 바라바쉬를 그냥 지나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곳을 지나고 나면 국경 근처에 다다르기까지 마땅한 식당이나 가게가 없어 밤늦은 시간까지 굶어야 한다. 주유소도 없다. 중간에 가스나 기름이 떨어지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이런 사정으로 오늘날 바라바쉬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주유소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들이 많다.

바라바쉬는 중국과의 국경지대로부터 아무르만으로 흐르는 주요한 강 가운데 하나인 바라바쉐프카(Barab-ashevka)강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옛 명칭은 ‘몽구가이(Mongugai)’, 한자로는 몽고가(蒙古街)로 표기했다. 바라바쉐프카강 역시 과거에는 ‘몽구가이강’이라 불렸다. ‘몽구가이’는 18세기에는 ‘메이구헤(Meigukhe)’로 불렸던 지명인데,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러시아 지도에 ‘몽구(Mongu)’ ‘뭉구(Mungu)’ ‘망구(Mangu)’ 등으로 표기되기 시작했고, ‘맹구가이(Mangugai)’에 이어 몽구가이(Mongugai)로 불렸다.

한인들은 이 지역 일대를 ‘멍고개’라 부르기도 했는데, 원래 지명인 ‘몽구가이’의 발음에 우리말 해석을 담아 ‘맹고개(孟古介)’ ‘맹령(孟嶺)’ ‘맹현(孟峴)’ ‘맹산동(孟山洞)’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2년 말 또는 1883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맹고개관(孟古介館)’에 수비병 30명이 있고, 러시아인 30여 가호가 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이 기록을 통해 당시 한인들은 바라바쉬를 ‘맹고개관’이라 불렀고, 또 이 지역에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기록에는 ‘맹고개영(孟古介營)’으로 표기돼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의 중심지

1911년경 일본군 첩보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바라바쉬에 주둔한 러시아부대의 병력은 약 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정부가 바라바쉬를 군사전략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890년대 초반 노보키예프스키 주둔 러시아 경관은 철도간선부설관리국의 통역인 최재형에게 지시해 노보키예프스키 러시아군영의 병졸 300여 명과 주변 한인들로 하여금 노보키예프스키로부터 몽구가이(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게 했다. 대거 동원된 한인들의 인건비는 러시아 당국에서 지불했다. 이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들까지 러시아정부의 토지분배에 대한 보상명목으로 도로건설 공사에 동원돼 노보키예프스키에서 두만강 하구의 포드고르나야까지, 라즈돌리노예로부터 스찬강(현재의 파르티잔스크강)에 이르는 주요 간선도로가 건설됐다.

바라바쉬, 즉 과거의 몽구가이는 이처럼 교통의 중심지이자 군사전략상 중요한 마을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기 주변에 많은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이 생겨난 것도 이런 연유다.

1906∼07년경 몽구가이강가에 위치했던 주요 마을들을 강 하구로부터 소개하면, 러시아마을 보고슬로브카(Bogoslovka), 한인마을 니즈네예 몽구가이(Nizhnee Mogugai), 러시아마을 포포바 고라(Popoba Gora), 러시아마을 우로치쉬체 바라바쉬(Urochitsshe Barabash), 러시아마을 오브치니코바(Ovchinnikova), 한인마을 베르흐네 몽구가이(Verkhne Mongugai) 등 6개 마을이다. 당시 한인마을과 러시아마을은 이처럼 서로 뒤섞여 있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한인마을이 몽구가이강가에 처음 형성된 것은 1885년 무렵이었다. 강 하구 쪽에 위치해 있던 니즈네예 몽구가이, 즉 하(下)몽구가이가 가장 먼저 생겨난 마을이다. 통칭 몽구가이라고 하면 바로 이 마을을 일컫는다. 베르흐네 몽구가이, 즉 상(上)몽구가이가 생기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해 ‘아랫마을’이라는 뜻의 ‘니즈네예’를 붙인 것이다.

이밖에도 문헌상에 나타난 몽구가이강 주변 분지에 위치해 있던 한인마을들로는 1919년 당시 몽구가이 주둔 헌병분견소 관할 내의 상사평(上砂坪, 몽구가이 서북방 약 8km), 남촌리(南村里, 몽구가이 북방 10km), 상개척(上開拓 또는 山開拓, 몽구가이 서방 16km) 등이 있다. 1914년경 몽구가이를 중심으로 몽구가이강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총수는 2500명에 달했다.

몽구가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의병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주목받는 지역이 됐다. 1911년 5월24일 홍범도, 전제익, 허근(허영장), 이진룡, 조장원, 이춘식, 김중화, 최병규, 엄인섭 등 의병파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운동 개시를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집결장소를 몽구가이로 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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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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