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령 같은 계몽주의 정치사상의 소산이면서도 미국의 독립혁명이 프랑스 혁명과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인의 이런 현실주의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은 인류 일반의 마땅한 삶의 조건과 타고난 권리를 내세워 혁명을 정당화한 데 반해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들은 이념적인 것보다는 종주국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독립선언서에 새로운 이념이 담겨 있지 않다는 비판이 일자 그 초안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전에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원리나 주장을 찾아내려 하거나 이전에 한번도 이야기된 일이 없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인류 앞에 우리 식민지인들이 가진 상식을 밝혀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밝히고자 했을 따름이다.”
이런 현실주의적 사고는 유적을 보존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인들 또한 역사적 현장이나 유물 보존에 여느 나라 국민 못지않게 열성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현재와 무관한 숭모의 대상으로 찬미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 유적은 복고주의적 호사벽(癖)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을 만든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보존되고 기려진다. 그 점은 사적지나 공원의 안내센터에 비치된 소개 책자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고, 이런 곳에서 아동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안내 책자들은 현학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제퍼슨이 말한 상식과 일상적 교양의 심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버지니아주 주도(州都)인 리치먼드를 거쳐 영국인 최초의 정착지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를 둘러본 여행은 미국인의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을 음미하는 기회였다.
제임스타운, 최초의 정착지
제임스타운은 1607년 영국인들이 여러 차례 실패한 끝에 최초로 정착에 성공한 신대륙이다. 월터 롤리가 로어노크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다 실패한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작은 섬에서 성채로 출발한 도시지만 제임스타운은 1698년 주도가 윌리엄스버그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초기 정착민 사회의 중심지였다. 주도가 다시 리치먼드로 옮겨진 1780년까지 윌리엄스버그는 제임스타운의 전통을 이어받아 종주국 영국의 상류문화를 도입, 독특한 식민지 문화를 일궈냈다.
체서피크 만(灣)으로 흘러드는 다섯 개의 큰 강줄기 가운데 맨 아래쪽 줄기인 제임스 강. 그 강어귀에서 내륙 쪽으로 약 60마일을 거슬러 오르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제임스 섬이고, 제임스타운은 이 작은 섬의 연안에 세워진 정착지의 이름이다. 콜럼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1607년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정착지와 그 주변 지형의 이름을 당시의 국왕 제임스 1세에서 따왔다.
오늘날 윌리엄스버그 사적지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제임스타운은 윌리엄스버그에서 15마일 북쪽의 요크 강가에 자리잡은 독립혁명 유적지 요크타운에서 시작되는 식민지 사적 공원로(Colonial National Historical Parkway)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공원로의 서쪽 종점 부근, 제임스타운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제임스타운 정착지(Jamestown Settlement)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방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근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17세기 제임스타운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았다. 원래의 정착지 터는 이곳과 구분해 ‘역사적 제임스타운’(Historic Jamestown)이라 한다.
빗발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2월의 늦은 오후라 그런지 제임스타운은 찾는 이 없이 적막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안내센터에 들르니, 안내인은 네 명에 불과한 우리 일행을 위해 친절하게도 10분짜리 안내 영화 ‘섬의 목소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이곳의 역사를 섬의 처지에서 조명했다. 식민지 건설은 인간 편에서는 개척, 문명의 전파, 진보일지 모르지만 섬의 처지에서는 낯선 이방인과 원주민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부른 자연의 훼손이자 수탈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