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세 때의 프레야 스타크.
그해 11월, 34세의 프레야는 베이루트로 가는 작은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최초의 중동지역 여행이었다. 갑판 의자에 앉아 지중해의 넘실대는 파도를 보자 아랍어를 배우고 이름난 탐험가들의 모험담을 모조리 구해 읽으면서 머릿속에 모래땅 중동을 그려본 그 오랜 날들이 떠올랐다. 바로 그 땅을 자신의 두 발로 직접 디딜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수중에 가진 것이라곤 단테의 ‘신곡’ 한 권과 얼마 안 되는 돈, 리볼버 권총 한 자루, 그리고 털 코트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레바논에선 주로 브루마나에 머물면서 현지실정을 파악하고 아랍어를 익혔다. 또한 강대했던 우마이야 제국의 수도로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아랍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위대한 도시 다마스쿠스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다마스쿠스는 너무나 초라했다. 영광스러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물은 무너지고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종교와 부족 간의 전쟁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생활에 이골이 난 그였지만 식사를 할 때엔 단테를 읽으며 자신이 뭘 먹는지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막에 사는 토착민 족장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을 만나자 그들이야말로 기사도 정신과 명예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아랍의 마지막 보루란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런 지위도 없는 아랍의 토착민과 어울리려 한 것은 이런 점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오지의 베두인들이 무식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그 자신 역사의 과정에 행위자(actor)로서 참여하겠다고 결심했다.
홀로 여행하며 오지 토착민과 교류
다시 브루마나로 돌아온 프레야는 새 봄이 오자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새벽시간을 이용해 당나귀를 타고 드루즈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드루즈파는 외세에 거세게 항거하며 1000년 가까이 고립된 생활을 영위해왔다. 그들은 대개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에 살았다. 다른 종족과는 결혼도 하지 않으며, 이슬람교를 믿는데도 모스크를 세우지 않았고 예배시간도 지키지 않았다.
프레야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드루즈파의 본거지로 들어갔지만 곧 그 지역을 지키던 프랑스 군인에게 붙잡혔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드루즈파는 영국 편을 들었고 프랑스는 이들과 앙숙관계인 마론파 기독교도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야의 체포는 자칫 국제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런 사실이 영국에 알려지면서 그의 명성은 오히려 드높아졌다. 예루살렘과 카이로에 들렀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캐나다로 가 아버지를 만나고는 런던에서 발간되는 ‘콘힐’지에 드루즈족 탐험기사를 기고했다.
1929년 10월 말, 프레야는 다마스쿠스와 트란스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를 거쳐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랍인과 사귀면서 아랍어를 익혔고 페르시아어 등 동방언어도 배웠다. 틈틈이 저명한 여성 여행가이자 ‘아라비아 로렌스’의 친구였던 게르트루드 벨과 이븐사우드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천재 탐험가인 존 필비의 여행기를 탐독했다. 또 이슬람 세계의 낯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는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코란의 교리도 배우기 시작했다.
프레야는 바그다드를 매우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이자 압바스 왕국의 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본 바그다드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볼품이 없었다. 1920년 상 레모 조약에 따라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라크란 국명을 사용하게 된 이 나라는 메카의 지도자인 파이잘과 1916년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사막의 항거’를 주도한 로렌스가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었다.
하루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 족장에게서 초대를 받았다. 그는 아랍어 선생의 사촌이었다. 프레야를 아는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지 말라고 했으나 유럽 여성 한 사람과 길을 떠났다. 프레야 일행은 족장의 환대를 받고 하얀 매트리스와 자주색 쿠션이 있는 전형적인 베두인의 검정 천막 속에서 한동안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