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열혈남아’가 보여준 끈기와 오기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yacho@hanmire.com

    입력2008-05-08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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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짜는 이인(異人), 기인(奇人)이다. 범상치 않다. 파격이다. 하지만 그들의 파격은 ‘격(格)’의 토대 위에서 나왔다. 결코 근본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그 같은 괴짜 정신은 세상살이를 즐겁게 만든다. 모두의 삶을 살찌운다. 여기 일본의 괴짜들을 살핀다. 지금의 일본은 그들이 있었기에 이뤄졌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러 우리에게 낯익은 이도 있고, 생소한 이도 있다. 옛날 인물도 있고, 이 시대를 사는 인물도 있다. 그네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편집자’
    ‘죽음의 일지’ 남긴 무서운 책임감 -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사쿠마 쓰토무 동상과 노모 히데오.

    우선 짧은 세 수의 시부터 감상해본다.

    ‘바다 밑 물빛에 비춰가며 적어나가도다, 대장부의 글’

    ‘가스에 질식하여 고통스러운 숨결, 가라앉은 배의 사령탑에서 적다니’

    ‘버리지 못한 무인(武人)의 의지, 죽음조차 막지 못한 책임감’



    메이지 시대 최고의 여류시인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1878~1942)가 지은 시다. 그는 이 작품말고도 ‘놀라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전통 시 작법의 시가(詩歌) 9편을 더 지었다. 그만큼 그의 충격, 혹은 감동이 컸기 때문이리라. 하기야 일본 사회 전체가 들썩거리고, 외국 언론들까지 난리를 피웠다니 분명 예사 사건은 아니었다. 누구인가, 이 작품에서 다루어진 무인이자 대장부는.

    1910년 봄. 아직 잠수함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잠수정 한 척이 히로시마(廣島) 남서쪽에 있는 구레항(吳港) 해군기지를 출발했다. 배 이름은 따로 없었고, 그냥 ‘제6호 잠수정’이라 불렸다. 전장 23.25m, 최대 폭 2.15m, 잠항 배수량 63t, 동력은 스탠더드 가솔린 기관과 2차전지. 가와사키(川崎)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승무원은 정장(艇長)인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佐久間勉) 외 13명이었다.

    러일전쟁 승리로 승전 무드에 한껏 젖어 있던 제국주의 일본은 해군력 강화를 겨냥해 1905년 미국 일렉트릭 보트사로부터 잠수정 5척을 구입했다. 설계자 존 홀랜드의 이름에서 따 ‘홀랜드형(型)’이라 했으며, 미국과 영국 해군 등이 실전배치하고 있었다. 일본은 잠수정을 분해해 들여온 뒤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공창에서 재조립, 제1잠수대를 편성했다. 제1잠수대는 러일전쟁 전승 축하 퍼레이드인 관함식(觀艦式)에도 참가했다.

    잠수정 분야 일인자

    제6호 잠수정은 일본이 자체 개발한 함정이었다. 수상 속력은 미국제 홀랜드형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중 속력이 4노트, 항속거리도 12해리밖에 되지 않아 홀랜드형에 훨씬 뒤처졌다. 일본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이날 성능 테스트 겸 잠항 훈련을 위해 제6호 잠수정을 출항시킨 것이었다. 첫 사흘 동안 행해진 제1차 잠항은 무사히 끝났다.

    나흘째 되던 날, 제2차 훈련에 나선 제6호 잠수정은 잠항을 시작하자마자 승강통(昇降筒)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잠수정은 이내 균형을 잃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전등이 모두 꺼져 캄캄한 잠수정 내에서 수동 펌프로 물을 뽑아내며 잠수정을 부상(浮上)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마침내 잠수정은 16m 해저에 완전히 가라앉아버렸다.

    침몰한 잠수정의 사쿠마 정장은 이제 갓 서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 겸 신사(神社)의 신관으로 일했다.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나온 다음 해군병학교에 들어가 1901년에 졸업했다. 그와 해군병학교 동기생 중에는 나중에 일본 총리를 지낸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가 있었다.

    사쿠마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뒤 소위로 임관해 처음으로 순양함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곧 이어 터진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동해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수뢰술(水雷術) 연습소에 입소해 기술을 익힌 다음, 수뢰 모함(母艦) ‘가라사키(韓崎)’에서 근무했다.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후쿠이현 미가타에서 열린 사쿠마 쓰토무 정장의 추모제.

    그 후 미국에서 잠수정이 도입되자 제1호, 제4호 잠수정장 등을 거치면서 잠수정 분야의 제1인자로 올라섰다. 사쿠마가 첫 일제 잠수정인 제6호 잠수정장에 임명된 것도 이 같은 그의 커리어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잠수정 성능 향상을 위한 막중한 임무가 맡겨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잠수정이 침몰하고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침몰 위치가 확인됐다. 이튿날 인양된 제6호 잠수정은 인근 해군기지로 예인됐다. 그 무렵에는 유럽에서도 잠수정 침몰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대개의 경우 죽은 승무원들이 해치 가까이에 떼지어 몰려 있는 것이 인양된 잠수정의 일반적인 광경이었다. 잠수정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결과였다.

    훨씬 훗날의 일이지만, 2000년 여름에 러시아 해군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가 노르웨이 북쪽 수심 100m 해저에 침몰한 사건이 있었다. 118명의 승무원이 전멸한 이 끔찍한 사고에서도 달리 감동적인 후일담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로 미뤄볼 때 쿠르스크 호의 함내 모습이 일반적인 예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제6호 잠수정의 해치를 열면서도 그와 똑같은 처참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고조사 반장이던 요시카와(吉川) 중령의 입에서 처음엔 절규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쿠마 정장의 시신은 사령탑에, 기관 담당 중위는 전동기 곁에, 기관 담당 사병은 가솔린 기관 앞에, 조타병은 조타석에, 공기수(空氣手)는 공기 압착관 앞에…, 14명의 승무원 모두 각자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질식사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에 매달렸다는 증거였다.

    군복 주머니 속의 메모

    더욱 놀라운 것은 사쿠마 정장의 군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였다. 그 같은 극한 상황에서 기록을 남긴 것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더욱 경이로웠다. 침몰 직후 실내등이 다 꺼지고, 산소는 점점 희박해져 갔으며, 가솔린에서 생겨난 가스가 들어차는 등 사고 이후의 상황이 시간별로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침몰 원인과 침몰 후의 상황을 밝혀두어 잠수정 사고방지와 성능개선 등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도록 한 게 분명했다.

    연필로 깨알같이 적은 사쿠마 정장의 마지막 기록은 ‘그렇지만 승무원 일동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직을 잘 지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함. 12시30분 호흡이 몹시 고통스러움’이었고, ‘12시40분이 됨’에서 끝을 맺었다. 그와 더불어 메이지 천황에게 올리는 상소문도 발견됐다고 한다. 내용은 이랬다.

    소관(小官)의 부주의로 폐하의 잠수정을 침몰시키고 부하를 죽여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국가를 위해 맡은 바 직무를 행하다 쓰러져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천하의 사람들이 이번 잘못을 들먹이며 장래 잠수정 발전에 타격을 가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입니다. 바라옵건대 다들 더욱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그런 오해 없이 잠수정의 발전 연구에 전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유감도 있을 리 없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한 통의 짤막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히 폐하께 말씀 올림. 제 부하의 유족들이 곤궁해지지 않도록 배려해주시기를, 제 염두에는 오직 이것밖에 없음.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혹시,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군부가 국민들 사이에 반전이나 염전(厭戰)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꾸민 조작극이 아닐까. 버럭 그 같은 의심이 치밀 만큼 사쿠마 정장이 마지막으로 취한 조치는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인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행위였다.

    일본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영국 신문 ‘글로브’는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체력적으로 용감할뿐더러 도덕적, 정신적으로도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례는 없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주재 외국 무관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거나, 미국 의회 의사당 내에 사쿠마 정장의 유서가 원문 그대로 전시되기도 했다니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도리도 없다 하겠다.

    일본 男兒의 귀감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일본 후쿠이현 오바마시에 있는 제6잠수정 모형.

    글머리에 소개한 요사노 아키코의 추모시도 이 같은 분위기에서 창작됐다. 남편도 저명한 시인인 아키코는 원래 반전 작품을 발표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1904년 9월, 이들 부부가 펴내던 문예지 ‘명성(明星)’에 ‘무엇이 너의 죽음보다 나으리’를 게재했다. 6개월 전 징병되어 여순(旅順) 전선에 배치된 남동생을 그리며 쓴 시였다. 이 작품의 셋째 연에서 아키코는 ‘천황은 스스로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 바람에 절친한 친구이자 국수주의자이던 한 문예비평가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이 문예비평가는 “집이 소중하다, 아내가 소중하다, 나라는 망해도 개의치 않는다, 장사꾼은 싸울 의무도 없다는 듯이 떠드는 것은 너무나 간덩이가 부은 소리다”고 몰아세웠다.

    아키코는 “시는 진정한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라면서 혹평을 일축했다. 그런 그의 반전사상도 시절이 바뀌면서 슬금슬금 변하여 전쟁 미화 쪽으로 기울어졌다.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언론 탄압도 극심해졌던 탓이리라. 급기야 그는 해군대위로 출전하는 넷째아들을 위해 ‘수군(水軍)의 대위가 되어 / 우리 넷째 전선으로 떠나는구나 / 용감하게 싸우렴’이라고 격려하는 작품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야 어쨌든 죽음에 이르도록 주어진 임무를 다한 잠수정 승무원들의 사연은 계속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때까지 전사자의 유족에 대한 보상이 없었건만 메이지 천황은 희생자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보냈다. 사쿠마 정장이 유언으로 남긴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또한 ‘아사히신문’과 해군성이 국민을 대상으로 공동 모금운동을 벌여 5만6000엔을 모았다. 요즘 가치로 따지면 억대에 해당하는 액수인 모양이다.

    들뜬 분위기 속에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사쿠마 정장 송가(頌歌)’도 나돌았다.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기고 /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우리의 장한 사쿠마 정장은 / 일본 남자의 귀감이 되리라’는 제1연에서 시작해 ‘정장이 태어난 곳은 후쿠이현(福井懸) / 이 해군대위의 이름은 쓰토무 / 천황의 명으로 계급이 추서되니 / 죽음으로 꽃핀 영예로다’며 제10연까지 이어지는 서사시의 형태를 띠었다.

    문예와 히로익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압권은 당대 최고의 문인, 아니 오늘날에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존경받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제시했다. 그는 1910년 7월19일자 ‘아사히신문’ 문화면에 ‘문예와 히로익’이라는 제목 아래 충동적이면서도 아주 도발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나쓰메 전집’ 제16권에도 수록)

    자연주의라는 말과 히로익(heroic, 영웅적)이라는 문자는 센다이히라(센다이 지방 특산 견직물)로 만든 하카마(전통 일본 옷 하의)와 도잔(외국에서 수입된 무명 직물)으로 만든 앞치마처럼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자연주의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히로익을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형용이 붙는 행위가 20세기에는 있을 리 없다고 단정해왔다. 당연한 일이리라.

    (중략)

    나는 최근 잠항 중에 죽은 사쿠마 정장의 유서를 읽고 이 히로익이라는 문자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던 군인에 의해, 기계적인 사회 가운데에서 단숨에 활활 타오른 것을 기뻐하게 된다. 자연파의 여러 군자(君子)에게 이 문자가 오늘의 일본에서 여전히 참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사실로서 증명해준 데 대해 치하하고자 한다. 머릿속으로 히로익을 그리기가 께름칙하고 두려웠던 그들에게, 마음껏 이 방면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보증과 안심을 주었다는 사실을 경하하는 바이다.

    예전에 영국 잠수정이 이와 비슷한 불행을 당했을 때, 승무원이 죽음을 면하려는 일념에서 앞 다투어 한 곳에 몰려 물빛이 스며드는 창 아래 겹겹이 쌓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본능이 책임감보다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본능의 권위만을 설파하려는 자연파 소설가들은 여기서 멋진 이야깃거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 어느 수완가가 이 하나의 사실에서 걸출한 문학을 빚어 올릴 수도 있으리라.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노모 히데오는 메이저리그 양대 리그인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에서 각각 노히트 노런을 수립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것뿐이다. 그 외에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자연파 작가는 사쿠마 정장과 그 부하의 죽음, 그리고 정장이 적은 유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짐승들이나 하등 다를 바 없는 현대적인 인간에게도, 또한 이와 같은 유의 불가사의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자연파의 작품은 그저 좁은 문단 안에서나마 통용되면 그뿐이라는 자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자연파 역시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세계가 아닌 더 너른 세계를 알아야 한다.

    병원생활을 한 지 한 달가량 됐다. 어떤 이가 사쿠마 정장의 젖은 유서를 그대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병상에서 그 명문을 거듭 읽어보고 ‘문예와 히로익’이라는 글 한 편이 쓰고 싶어졌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기고문에서 사쿠마 정장의 유서를 ‘명문’이라고 추어올린 까닭에 대해 나중에 “문장이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성실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뜻이다”라고 밝혔다.

    그 후 제6호 잠수정의 순직 승무원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사쿠마 정장의 경우에는 생가와 모교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동상과 기념비가 들어섰다. 그의 유서는 고향에 있는 신사에 보존됐다. 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시시각각 죽음이 밀려드는 히로시마만 바다 밑에서 침착하게 책무를 다하고 / 지(智)와 용(勇)과 정(情)을 바닷물에 젖은 수첩에다 담고 / 천명(天命)을 기다렸다 / 때는 메이지 43년 4월15일 / 아아 이리하여 대장부의 참된 정신은 세상을 넘어 영원히 살아가리니

    한참 세월이 흘러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에 졌다. 일본을 점령 통치하기 시작한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사령부(GHQ)는 인양된 후 구레의 일본해군 잠수학교에 전시되어 있던 제6호 잠수정을 해체해버렸다. 아무래도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다시금 세월이 바뀐 1959년, 사쿠마 정장 순직 50주년을 계기로 높이 19m의 거대한 비석이 구레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졌다. 한동안 홀대를 받았던 다른 기념물들도 잇달아 재조명됐다. 지금도 해마다 4월15일이면 위령제가 현지에서 열린다.

    불혹에 마운드 지키는 불굴 의지 - ‘투수왕’ 노모 히데오

    긴 겨울을 지나 야구 시즌이 막 시작되려던 지난 3월21일, 일본 유력 일간지 ‘아사히신문’ 1면 칼럼 ‘천성인어(天聲人語)’에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고군분투하는 두 일본인 야구선수가 등장했다.

    …봄을 앞둔 꽃샘추위를 여한(餘寒)이라고 한다. 대조적인 낱말이 잔서(殘暑)인데, 옛날에는 여열(餘熱)이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여열이 ‘나이든 사람이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분투한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여열을 발휘한다’고 표현하면 식지 않는 정열로 세상에 보탬을 주는 것을 의미한단다. 혹시 이들의 도전을 여열이라고 하면 실례가 될까. 바다 건너 메이저리그에서 일본의 나이 지긋한 선수가 꿈을 좇고 있다. “잃을 게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구와타 마쓰미(桑田眞澄) 투수,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의 길을 연 노모 히데오(野茂英雄) 투수. 화려한 실적을 쌓아왔지만, 과거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둘 다 올해 마흔이 된다.”

    칼럼에 등장한 두 선수 가운데 입버릇처럼 “즐겁기에 야구를 한다”고 앳된 소년처럼 말하곤 하는 노모 히데오는 1968년 8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 글러브를 꼈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무명선수였다. 그가 진학한 고등학교 야구부 역시 일본 고교야구선수들이 꿈에 그리는 고시엔(甲子園)과는 애당초 인연이 멀었다.

    고시엔은 봄, 여름 두 차례 열리는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상징한다. 고시엔 자체는 프로야구 한신(阪神) 타이거즈 홈구장을 가리킨다. 4000개가 넘는 일본 고교야구팀 가운데 1%만이 고시엔구장에 서서 기량을 겨룰 수 있다. 그러니 노모가 다닌 고등학교는 그만큼 야구팀 실력이 뒤처졌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노모는 고교 2학년 때 팀의 에이스가 되어 생애 첫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다. 오사카 지역 예선에서였다. 고교를 졸업할 시기가 되자 프로구단에서 손짓을 해왔다. 그러나 노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프로로 뛰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추어 구단을 택했다. 여기서 1년 만에 주무기인 포크볼을 익혔다.

    1988년 서울올림픽. 드디어 노모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 대표팀으로 뽑힌 그는 준결승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마운드에 섰다. 자신만만한 피칭, 노모의 괴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홈팀을 가볍게 물리친 일본 대표팀은 결승에서 야구 종주국 미국 대표팀에 무릎을 꿇고 은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통해 명실공히 아마추어 투수 제1인자로 떠오른 노모에게 프로구단들이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할 노릇이었으리라.

    기록의 사나이

    서울올림픽 이듬해, 노모 히데오는 드래프트회의에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8개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다. 결국 추첨을 통해 긴테쓰(近鐵)에 우선권이 주어졌고, 사상 처음 1억엔을 돌파한 계약금에 긴테쓰 유니폼을 입었다. 1990년부터 프로 세계에 첫선을 보인 노모는 첫해부터 온갖 기록을 세우면서 일본 사회에 ‘노모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한 게임 탈삼진 역대 타이 기록(17개), 최다 승리 투수, 최우수 방어율,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 베스트9, 신인왕, 사와무라상(澤村賞), 그리고 최우수선수(MVP). 사와무라상은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전설적인 강속구 투수 사와무라 에이지(澤村榮治)를 기리기 위한 상이다. 현재 한국인 강타자 이승엽이 뛰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트(巨人) 투수였던 사와무라는 태평양전쟁에 징집되어 나갔다가 대만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아쉬워한 요미우리신문사가 1950년에 제정한 상이다. 수상 대상을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 가운데 요미우리 자이언트가 속한 센트럴리그 투수로 한정했던 것이 퍼시픽리그로까지 확대되면서 첫 수상자로 노모가 선정된 것이다.

    사와무라상 후보에 오르려면 7개 항목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15승 이상, 방어율 2.50 이하, 완투 10게임 이상, 200 이닝 이상 등판, 탈삼진 150 이상, 25게임 이상 출전, 승률 6할 이상이 그것이다.

    프로 마운드에 선 뒤 4년 연속 최다승 투수 및 탈삼진 1위에 오른 노모는 마침내 시야를 더 넓은 세계로 돌렸다. 본고장 미국의 메이저리그로 꿈의 무대를 옮긴 것이다. 일본인으로서는 30여 년 만에 두 번째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터여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LA다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어야 했고, 계약금도 긴테쓰의 10분의 1이 되지 않는 푼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메이저리그로 올라섰다.

    데뷔 첫해 5월2일, 노모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트와의 경기에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섬으로써 제2의 황금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해 13승6패, 236 탈삼진을 기록해 신인왕과 탈삼진왕으로 뽑혔다. 올스타전에도 선발투수로 나섰다. 그 후 메이저리그 6개 구단을 전전하면서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토네이도 투법

    그는 시속 150km의 묵직한 속구와 두 종류의 포크볼로 쟁쟁한 타자들을 요리해 나갔다. 노모의 포크볼 중 하나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공을 끼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깊숙하게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쥐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포크볼은 노모 이외엔 아무도 구사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독특한 투구 폼에는 ‘토네이도 투법(投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수많은 미국 팬을 열광시켰다. 일본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닥터 K’(탈삼진 박사)라는 별명도 그대로 메이저리그에서 통했다.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에 비해 거한(巨漢)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 노모 히데오는 그야말로 불굴의 투지로 게임에 임했다.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내셔널리그, 아메리칸리그 양대 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은 동양인으로서는 경이로운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묘하게도 두 번의 노히트 노런에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따라다닌다.

    메이저리그 데뷔 이듬해인 1996년 9월의 노히트 노런은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이룬 것이다. 게임이 치러진 곳은 해발 약 1600m의 고지대에 자리한 쿠어스 필드. 타구가 너무 잘 날아가는 것으로 유명한 구장으로, 이른바 ‘투수들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줄기차게 비가 내리는 바람에 게임이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게 시작됐다. 마운드 상태가 엉망이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투수에게 불리한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노모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텼다고 한다. 그 결과가 9대 0, 노히트 노런이었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노히트 노런은 어느 투수도 세우지 못한 불가침의 영역이었다니 가히 감격적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은 2001년 4월, 노모가 소속된 보스턴 레드삭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시합이었다. 노모로서는 이 해 첫 등판이었는데 이날은 하필 볼티모어 캠든야드 구장이 게임 시작 1시간 반 전부터 정전되어버렸다. 결국은 예정시각을 40여 분이나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전기가 들어와 플레이에 나설 수 있었다.

    노모의 피칭은 거의 신들린 사람의 그것에 가까웠다. 110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5연속 탈삼진을 포함, 11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4구는 단 3번밖에 내주지 않았다. 운도 따랐다. 9회 1사후 상대 타자가 때린 공이 2루를 훌쩍 넘는 안타성 타구였다. 그걸 2루수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잽싸게 다이빙 캐치함으로써 3대 0, 노히트 노런에 기여한 것이다.

    이처럼 한 번은 비로, 또 한 번은 정전으로 시합이 지연된 희한한 상황에서 노모의 투지가 빛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을 합쳐 200승을 달성한 노모에게도 위기는 닥쳤다. 오른쪽 팔꿈치에 염증이 생긴 것이다. 그는 즉각 선발 리스트에서 제외됐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6년 여름의 일이다. 투수로서의 생명과 직결되는 부상인 데다 나이도 나이였던 터라 사람들은 노모의 재기를 절망적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닥터 K의 부활

    이 대목에서부터 비(非)스포츠맨인 필자로서는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동안 쌓아올린 화려한 커리어, 그리고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깨끗이 은퇴하는 게 순리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노모는 맨 처음 미국 무대에 발을 디뎠을 때처럼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꾹 참고 견뎠다.

    그렇게 시련의 시기를 보낸 뒤 맞은 2008년 시즌의 시범경기, 노모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섰다. 그로서는 메이저리그 7번째 구단이었다. 비록 선발이 아닌 계투 요원이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을 올렸다. 한창 때만큼의 위력은 회복되지 않았으나 고비마다 상대 타자를 헛스윙으로 돌려세워 ‘닥터 K’의 부활을 엿보게 했다. 일본 매스컴들도 은근히 노모의 재기에 큰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에서 생긴 오른쪽 다리 통증으로 노모는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동료들과) 개막부터 함께 뛰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다”며 고개를 떨군 그는 애리조나에 있는 마이너 캠프로 떠났다. 그렇게 분루를 삼킨 지 꼭 일주일 만인 4월6일, 투수진 보강에 나선 로열스는 통증이 사라진 노모를 다시 빅리그로 불러올렸다. 가까스로 3년 만에 컴백한 노모. 예전의 앳된 모습이 아니라 턱수염을 길러 예리한 인상마저 풍기는 그가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나지막하지만 다부진 어투로 다짐했다.

    “너무 기쁘다. 타자를 제압해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선발이건 계투이건 다를 바 없다. 반드시 팀 승리에 공헌하도록 하겠다.”

    오늘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일본선수는 수십명을 헤아린다. 스타플레이어도 여럿 있다. 일본 매스컴들은 그들의 활약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스즈키 이치로(鈴木一郞)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부터 방망이에 불이 붙어 2001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타격왕, 도루왕의 영예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30개 전 구단 상대 승리

    미국인들로 하여금 정통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는 이치로가 2007년에는 급기야 큰일을 냈다. 샌프란시스코 AT&T 파크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5회초 1사 1루 상황, 타석에 들어선 이치로가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그라운드 홈런. 이날 그는 2개의 신기록을 세웠다. 78번의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사상 첫 그라운드 홈런, 그리고 아시아인 사상 첫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최우수선수.

    메이저리그의 일본 선수들에게 노모는 우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있었기에 수많은 후배 선수가 ‘꿈’을 키울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일본의 세 군데 출판사가 펴낸 고교 영어교과서에 노모가 다뤄진 이유 또한 그 때문이리라.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조양욱

    1952년 경남 의령 출생

    한국외대 일본어과 및 동 대학원 수료

    조선일보 기자, 국민일보 도쿄 특파원·문화부장

    일본 라디오단파방송 제8회 아시아상, 제2회 문화교류기금상 수상

    現 일본문화연구소장

    저서 : ‘일본 지식채널’(예담) ‘조양욱, 일본을 묻는다’(아침바다) 등


    불혹의 나이를 잊고 노모가 전성기의 위력을 되찾는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이 미국 땅에 가서 처음 몸담았던 다저스를 상대로 승수를 올리게 되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전부로부터 승리를 거둔 사상 두 번째 투수가 된다고도 한다. 그때는 그야말로 일본 야구계의 영웅이 거듭 탄생하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참, 노모의 이름 영웅(英雄, 히데오)은 유명한 엔카(演歌) 가수이자 배우인 무라타 히데오(村田英雄)의 열성 팬이던 그의 아버지가 무라타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노모는 비단 스스로의 플레이뿐 아니라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2003년에는 고향 오사카에 아마추어 야구단인 ‘노모 베이스볼 클럽’을 설립했다. 또 옛 긴테쓰의 동료들과 힘을 합쳐 미국 독립 리그에 속한 야구팀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한다.

    그가 어렵사리 다시 올라선 메이저리그 무대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지, 또 앞으로 얼마나 더 현역으로 뛸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글머리에 인용한 ‘아사히신문’ 칼럼이 이런 표현으로 끝을 맺어놓은 게 하나의 암시가 될까.

    “노장 투수의 챌린지(도전) 정신에 감읍하면서, 나이는 그저 괄호 안에 넣어버리면 그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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