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고유어는 살이다.”
서예가이자 화가이자 전각가이자 금석학자인 김양동(金洋東·64) 선생의 흥미로운 주장이다. 그를 여러 번 만났다. 귀 기울일수록 흥미진진했고 들여다볼수록 신기했다. 수백장의 사진자료를 구경했고 옛 서적과 논문을 훑어봤다. 이야기는 소박하고 간명했다. 어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째서 여태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토기 위의 빗금은 ‘빗살무늬’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왜 하필 빗살을 그렸을까 의심하지 않은 채 그저 교과서에 나온 대로 빗살이란 명칭을 습득해버렸고 빗살이니까 빗살이려니 했다. 생각하면 우리가 사물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 아니었던가?
먼저 김양동 선생의 얘기를 근거로 ‘빛살무늬’ 토기부터 들여다보자. 토기는 그냥 물건을 담는 용기가 아니다. 50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말이 고스란히 담긴 경전이고 암호다. 토기가 생긴 것은 구석기시대가 지나고 신석기시대로 진입하면서부터다. 토기라는 그릇이 필요하게 된 사회경제적 의미는 농경생활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 먹고 살 때라면 깨지기 쉽고 옮기기에도 무거운 토기 같은 것이 필요했을 리 없다. 그런 시절에는 그저 던져도 깨지지 않고 납작하게 접히는 가죽 포대 같은 걸로도 족했으리라.
갈무리할 곡식이 생겼기에 저장할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토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기의 몸에 뭔가를 새겼다. 동이족(東夷族) 토기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표면에 그어진 빗금이다. 과연 아무 생각없이 머리 빗던 빗으로 흙 위에 죽죽 금을 그었을까?
아니, 그 시대 사람들이 과연 머리를 빗었으며 빗었다 해도 지금 같은 빗이 있었을까. 즐문(櫛文)이 어째서 즐문일까? 그게 과연 ‘빗살’이 맞을까? 김양동 선생의 의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온갖 자료를 찾아다녔다. 중국에도 가고 몽골에도 가서 책을 뒤지고 흩어진 파편을 주워 모았다.
고대의 생각을 찾아
그가 무슨 고고학자는 아니었다. 붓글씨를 썼고 글씨를 쓰다보니 전각을 하게 됐고 한서를 읽게 됐고 두루 궁금한 게 많아진, 천상 타고난 ‘공부꾼’일 뿐이다. 실은 고고학자니 서예가니 화가니 하는 구분조차 졸렬하다. 굳이 학문과 예술의 장르를 금 긋고 쪼개고 갈라놓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그는 토기의 빗금이 빗살일 리 없다고 맨 처음 의문을 들고 나온 사람이었다. 반복된 짧은 사선, 이게 뭘까? 왜 새겼을까? 다른 곳엔 없을까? 이 무늬가 그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이었단 말일까? 이쯤되면 공부란 가슴 뛰는 설렘이 된다.
그는 한문 해독력이 나라 안 둘째가라면 서러울 학자인데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었다. 게다가 직관이 발달했고 통찰력이 있었다. 내가 목동 그의 집에 자꾸만 찾아간 것도 비슷한 설렘에 전염됐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이 빗살무늬라고 부르는 건 그 무늬가 빗을 닮았고 또 빗 같은 도구로 그렸을 거라는 점에서 비롯된 거거든요. 빗살무늬라는 이름은 광복 전에 일본인 후지다 교수가 독일어의 ‘kammkeramik(comb pottrery)’를 직역해 쓰기 시작하면서 비롯됐고요. 그걸 우리 고고학계가 비판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 겁니다. 유물에는 고대인의 사유 체계가 그대로 담겨 있어요.
출토 유물의 명칭은 왜 그런 형태와 문양과 재질을 그 시대에 썼으며 무슨 내용을 담고 싶어서 그랬던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붙여야지, 지금 사람들의 잣대로 비슷하게 생긴 사물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여서는 안 됩니다. 유물의 명칭은 사고의 틀을 한정해버려요. 적어도 통일신라 이전 출토물들의 명칭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재검토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