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적하던 이 동네도 최근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조금 부산해졌다. 1, 2년 내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강 전 총리는 걱정이 많다. 웬만하면 이 집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다.
뒷집에는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 선생이 사셨다고 한다. 강 전 총리가 5·16 후 반혁명으로 구속됐다 100여 일 만에 풀려났을 때 윤치영 선생이 그를 찾아와 “형무소가 자진해서 갈 데는 아니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거기서도 배울 게 있다”고 한 말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고지식하고 고집 센 벽창호
1921년생으로 올해 87세인 강 전 총리가 지난 5월에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를 펴냈다. 그 책에는 어린 시절 평안도 고향 이야기부터 광복 후 군에 들어간 과정, 6·25, 4·19, 5·16 등 한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먼저 회고록 출판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필요하면 보충설명을 하겠다며 큰아들 강성룡 변호사가 배석했다.
▼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가 있나요.
“처음에는 순전히 가족적인 동기에서 시작했어요. 손자들에게 할아버지로서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고 독립국가를 이뤄나갈 동안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싶었지요. 또 하나, 내 한평생은 나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수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뤄졌다는 걸 깨닫고 그분들께 대한 사은(謝恩)의 마음을 담아 쓰게 된 거지요. 이건 일종의 도리(obligation)라고 생각했어요.”
▼ 회고록에 보면 1949년 12연대장 시절 옹진반도에서 치른 북한군과의 교전 당시 연락병 이름부터 여순반란사건 직전 광주에 머문 여관 이름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걸 어떻게 다 외우고 계십니까.
“이번에 회고록 쓰면서 일기 안 써놓은 걸 후회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생활이 단순해 웬만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큰아들 강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강 전 총리가 회고록을 처음 준비한 것은 1985년 바티칸 주재 대사로 근무할 때였다고 한다. 바티칸 대사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시간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등으로 일할 때는 엄두를 못 내다가 1994년 적십자 총재로 부임한 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흔히 ‘벽창호’라고 한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집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전 총리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이다.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자신과 이미지가 닮았다고 한다.
그의 군대기록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초고속 진급의 연속이다(건군 초기 장교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두 달 만에 소위 계급을 달고, 2년 후에는 국방장관 비서실장이 된다. 그 후 연대장, 육군본부 인사국장, 군단 참모장, 사단장, 연합참모본부 본부장, 군단장, 육사 교장 등 1961년 강제 예편할 때까지 15년간 거의 모든 요직을 두루 맡는다. 그럼에도 그의 옛날 사진을 보면 예전의 장군답지 않게 홀쭉한 편이다. 평생 배 한번 나오지 않아 다이어트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슨 비결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소식(小食)하고, 중학교 때 배운 테니스로 운동을 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