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유일의 여제 무측천과 그녀를 기리는 비석 무자비(無字碑).
당 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맘에 들어 한다. 얼굴도 예쁘고 배움도 출중했기 때문. 태종은 그녀가 꽃과 옥같이 어여쁘다며 ‘미(媚)’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태종의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측천이 너무 ‘튀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태종에게 서역에서 공물로 보낸 ‘사자총(獅子?)’이라는 말이 도착한다. 너무 몸집이 크고 성질이 포악해 길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측천이 나섰다.
“제게 철편(鐵鞭), 철과(鐵戈), 비수가 있으면 길들일 수 있습니다.”
태종이 궁금한 표정으로 “어떻게 말이냐?”고 물었다. 무측천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철편으로 때려 말을 듣지 않으면 철과로 머리를 내리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비수로 목을 찌르겠습니다.”
섬뜩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무측천을 태종은 “대범하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경계심이 일었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무측천이 궁에 있던 10여 년 동안 수많은 비빈이 승진했지만 그녀는 보통의 재인으로 알아주는 이 없는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며 시기하고 질투하던 궁녀들은 시간이 갈수록 경멸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 동안 그녀는 상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사랑에 기대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기회는 또 온다, 때를 기다리자’며 마음먹고 한 일은 ‘궁내 정보수집’이었다. 그녀는 부패한 환관들을 상대로 뇌물을 주면서 궁 안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온갖 정보를 사들였다.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항상 따뜻한 말과 깍듯한 예로 궁 안 사람들을 대하니 점점 많은 사람이 그녀 편이 된 것은 당연지사다.
이 시기 무측천에게 또 하나의 큰 수확은 당 태종으로부터 ‘정치 리더십’을 배운 것이다. 당 태종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용했고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봉건 제왕의 본보기였다. 그가 통치한 기간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는 발전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고 국력은 강성했다. 무측천은 비록 정사에 간여할 수 있는 권력은 없었지만 태종을 시봉하면서 그의 통치술을 옆에서 보고 익혔다.
권력의 무상함도 느꼈다. 황궁이란 곳이 결코 모든 사람의 천당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황궁 한켠에는 화장을 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켠에는 늙은 궁녀의 고됨과 슬픔도 있었다.
어떻든 평범한 궁녀로 끝날 삶이 아니었다. 무측천은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태종을 시봉하다 인생을 바꿔줄 한 남자를 만난다. 다름 아닌 태종의 아들 이치였다.
이치는 무측천보다 네 살 연하였다. 두 사람은 엄밀히 따지면 모자관계다. 봉건적 윤리도덕에 의하면 상궤를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 황족의 윤리관념은 비교적 엷었고 남녀 간 금기도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했다. 오랜 세월 냉대를 받았던 무측천도 이치에게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뀐다.
다시 나락으로
649년 5월16일 당 태종은 죽는다. 이틀 후 이치가 즉위했는데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태종의 비빈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부처님을 믿었던 그가 비빈들에게 태종을 위한 염불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무측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감업사(感業寺)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오직 궁중 여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감업사는 이름 없는 평범한 암자에 불과했지만, 황제에 관한 궁중비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채 바깥출입은 물론 외부손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몇몇 비구니는 목숨을 끊거나 미쳐버렸고 영양실조로 죽기도 했다.
무측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긴 했지만 비구니가 되기를 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가 택한 것은 ‘인내’였다. 언젠가 고종이 반드시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주리라는 강한 믿음으로 비구니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뎌냈다.
그녀의 간절함이 멀리 떨어진 고종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마침내 1년 뒤 고종은 그녀를 찾았다. 태종 서거 1주년 의식을 마치고 감업사로 와 분향하고 절을 올린 뒤였다. 무측천은 그를 만나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흐느꼈다. 애틋한 연정이 되살아나기는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종의 황후와 숙빈 사이에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측천의 황궁 귀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궁궐 내에서 고종의 마음은 황후보다는 숙빈에게 기울고 있었는데, 황후는 무측천을 데려오면 숙빈에 대한 고종의 애정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측천과 숙빈이 서로 질투해 다툰다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측천을 황궁으로 데려오자고 먼저 건의한 것은 바로 황후였다.
무측천은 마침내 4년간 비구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입궁 이후 무측천은 누구보다 황후를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한다. 반면 황후는 자신의 계산대로 숙빈은 점점 고종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측천을 증오하기 시작한 황후는 이번에는 숙빈과 한통속이 되어 무측천을 제거하기로 의기투합한다.
무측천의 대응은 한수 위였다. 고종을 지극히 보살피는 한편 황후에게 배척당한 후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후궁들을 통해 얻은 황후와 숙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정보에다 거짓을 보태 고종에게 고했다. 이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암투도 이어졌다. 무측천이 자신이 갓 낳은 어린 딸을 황후가 보고 간 뒤 딸을 목 졸라 죽이고는 이를 ‘황후 짓’이라고 모함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이 일화는 여인들의 궁중암투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 와중에 고종의 총애가 무측천에게 집중될수록 안절부절 못하던 황후는 굿을 하다 무당에게 황제를 저주하는 말을 쏟아낸다. 이 사실은 바로 무측천에게 보고되고, 무측천은 바로 고종에게 일러바쳤다. 고종은 본격적으로 황후 폐위 문제를 제기했다.
655년 10월 황후와 숙빈이 모두 유배된다. 마침내 무측천이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자리를 손에 넣는 것 못지않게 자리를 지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언제 또 어떤 비빈이 고종의 총애를 얻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황후와 숙빈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감히 무측천과 겨루는 비빈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