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을 기점으로 극과 극을 달리한 삶. 부산 사내의 기질과 발레리노의 감수성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불협화음. 한국 발레 역사를 다시 쓴 ‘영원한 왕자’ 이원국의 춤인생.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원국(37). 그의 ‘속세 체험’을 스무 살 어느 여름날까지로 마감 짓게 한 것은 발레다. 1986년 6월1일, 그는 7년 간의 아픈 방황의 시간을 접고 발레라는 신(神) 앞에 종신서원을 했다. 과장이 아니다. 그는 정말 자신을 ‘버렸다’. 한국 발레리노의 교과서, 한국 발레 부흥의 변곡점은 그렇게 탄생했다.
무용평론가들은 이원국을 두고 ‘한국 발레 역사를 다시 쓴 무용가’ ‘한국 발레는 이원국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한국 발레의 이정표’ 등의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테크닉, 그 이상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그의 등장으로 우리 발레는 레퍼토리 확대와 대중성 확보에 획기적인 전기를 맞았다. 그는 팬클럽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발레리노이며 명실상부한 슈퍼스타다. 그의 출연 여부에 따라 같은 국립발레단 공연이라도 관객 동원에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1995년에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1995~96년에는 루마니아 국립발레단의 객원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9년에는 루마니아 국립클루즈오페라발레의 객원 주역이 됐다. ‘세계춤 2000 월드스타 갈라공연’에서 줄리 켄트, 이렉 무하메도프 등 세계적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기도 했다.
1989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시작으로 1992년 불가리아 바르난 국제무용콩쿠르 화이널리스, 1997년 한국발레협회상 당쉬르 노브르상, 1999년 평론가가 뽑은 무용예술상 무용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2000년 문화관광부 젊은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베스트 파트너상’(비출전자이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여)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서른일곱. 발레리노로서는 환갑 진갑을 다 넘긴 나이에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발레리노다.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격렬한 긴장, 엄청난 에너지
설핏 스쳐가는 봄 냄새가 가슴을 꼭 쥐었다 놓는 2월 어느 날,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 내의 국립발레단 스튜디오를 찾았다. 남녀 여러 쌍이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가장 넓었고 그의 자세가 가장 우아했다.
“이 사람이 이원국이에요.”
“누가 찾아왔다”고 하자 그는 웬일인지 몸을 뒤로 빼며 슬쩍 다른 발레리노의 등을 떼밀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웬 장난인가 싶었다. 그런데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서른일곱이라던데, 이런 꽃미남일 리 없잖아요.”
농담으로 받아치자 비로소 하하 편한 웃음이 터졌다. 연습이 아직 안 끝났으니 좀 기다려달라며 한구석에 의자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춤이 시작됐다.
팔 다리가 길고 아름다운 발레리나와의 격정적인 파 드 되(2인무)였다. 연습일 뿐인데도 플로어엔 강한 긴장이 흘렀다. 두 사람은 옷이 땀에 푹 젖을 정도로 깊이 몰두했다. 멀리서 보면 그저 가볍고 우아하게만 느껴지는 동작들이, 실은 근육이 파열될 만큼 격렬한 긴장과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행이란 사실을 처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보는 이의 몸에까지 절로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감정과 표정과 스토리가, 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연기력, 혹은 테크닉 그 이상의 ‘몸의 언어’가 필요한 듯했다. 그들은 등으로, 손끝으로 말하고 있었다. 춤추는 그 순간만큼은, 둘은 연인이었다.
연습이 끝난 후 탈의실 한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땀에 젖은 몸을 씻지도 않은 채 가운을 걸치고 앉아 진한 부산 사투리로 질문에 답했다. 성실한 자세였지만 상황의 이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말은 많지 않았다. 부산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일 수도 있겠고, 오래 한 일에 몰두해온 사람의 서투름 혹은 까다로움일 수도 있었다. 저녁으로 짬뽕을 시켜먹었다. 그는 “국물이 정말 맛있다”며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워냈다.
두 번째 본 날도 그는 춤을 추고 있었다. 국립발레단 최고령 현역이자 명실상부한 대표 발레리노인 그는 나이 어린 단원들의 교사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봄풀처럼 싱싱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제자’들 사이에서 그 또한 댓잎처럼 푸르고 강건했다.
지면에 실을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또 한번, 당당한 가운데서도 문득문득 수줍음을 타는 이중의 면모를 보였다. 하긴 이중성은 예술로 일가를 이룬 이들의 공통된 특징 아니던가. 이를 이원국에 국한해 말한다면, 스무 살을 기점으로 극과 극을 달리한 삶, 부산 사내의 기질과 발레리노의 감수성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에 그 뿌리가 있을 법도 하였다.
이원국은 1967년생이다. 부산일보 기자이던 아버지는 종손이자 4대 독자였다.
“위로 누님 한 분이 있고 그 다음이 저거든요.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더 있고. 어린 시절에는 종손이라고 할머니 귀염 깨나 받았어요.”
반면 아버지는 자녀를 매우 엄격하게 다뤘다. ‘바르지 않은 것은 요만한 거라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었다. 무섭고 어려웠다.
어머니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국전 입선 경력의 서예가이자 한지공예가. 다니는 성당의 국악 미사를 이끌 만큼 음악적 소양도 뛰어난 분이라 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 번잡한 아이였어요. 왜 늘 산만하다, 정신 없다, 그런 얘기 듣는 애들 있잖아요. 한마디로 집중력이 없는 거죠. 그러면서 수줍음은 많이 타고.”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던 그가 한가지 좋아하고 또 비교적 잘하는 것이 있다면 운동이었다. 부산초읍초등학교 재학중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6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사고의 후유증으로 이원국의 다리는 지금도 오른편이 왼편보다 조금 짧다.
부산 동이중학교에 입학한 얼마 뒤, 이원국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사건과 맞닥뜨린다.
“1학년 3반이었어요. 늦봄이었던 것 같은데, 담임선생님이 다짜고짜 제 뺨을 후려치는 거예요. 알고 보니 미술 담당 여선생님에게 좋지 않은 편지가 왔는데 그걸 제가 썼다는 거였어요. 물론 저는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없었고, 아니라고 주장했죠. 선생님은 믿지 않았어요. 뺨에 거푸 불이 났지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열세 살이었다. 지금은 키 180㎝에 빚은 듯 섬세하고 강인한 육체를 자랑하지만, 당시는 앞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빠를 만큼 작고 말라비틀어진 소년이었다. 반면 담임 교사는 보기 드물게 건장한 중년 남성이었다.
어린 이원국은 깊이 상처받았다. 구타당한 것도, 급우 누군가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도, 평소 인자하고 공정한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끝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것도 모두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어른들은 사실이 무엇이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는 것, 그를 근거로 약한 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핍박하고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에 깊이 모를 절망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이제부터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살리라.’ 소년은 이를 물었다.
“도대체 뭐가 덜 나쁜 거죠?”
중학교 1학년, 열세 살 소년의 방황이 시작됐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고 술, 담배에도 손을 댔다. 부모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왜 자신을 이해 못하는지, 그는 반대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꾸중듣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집에 들어가 자는 날은 줄어들었다. 끝도 없이 밖으로 떠돌았다. 어느새 그는 집과 학교의 왕따가 돼 있었다. 아무도 그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신의 반항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이들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만화방과 로라장(롤러 스케이트장)이 집이요 학교였다.
“집에 안 들어갈 때는 로라장에서 만난 애들 자취방 같은 데서 잤어요. 형들과도 안면을 트게 됐는데 그 중 ‘4학군 퉁’(부산 제4학군, 즉 서면사거리 인근 지역의 ‘짱’)인 형이 절 참 아껴줬어요. 그 형 나이래야 그때 겨우 열여섯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애들 장난이죠.”
그는 그런 면에서 영화 ‘친구’에 불만이 많다 했다. 시대적 배경이 꼭 그의 학창시절 무렵인데, 처음 얼마간을 빼놓고는 그 폭력성과 선정성이 실제보다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청소년기의 방황을 좀 길게, 진하게 겪은 것뿐인데, 그 영화를 보면 마치 당시 부산 지역 ‘양아치’들이 무슨 프로 폭력배들처럼 묘사돼 있잖아요. 그거 보면서 생각했죠. 감독이 그 세계를 좀 알긴 아는데 직접 들어가보진 못했구나. 뭘 모르는구나.”
학교는 가다 안 가다 했다. 시험은 몽땅 컨닝으로 때웠다. 학교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계속 다니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찌어찌해 부산서중으로 전학을 갔다. ‘노는 애’가 터를 옮겨온다니 서중 패거리의 수상, 우상, 좌상(3대 주먹)이 우 몰려왔다. 그러나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원국의 뒤에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나 그를 아껴주는 형들이 여럿 있었다. “그 녀석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제법 강단도 있었다.
“서중에 대강 적응해서 다니는데 강력반 형사가 찾아왔어요. 친구가 뭔가를 훔쳤다 잡혔는데 그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거였어요.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같이 쓴 건 사실이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고 했죠.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이모 지갑을 뒤졌던가봐요. 이모는 이렇게라도 정신차리라는 뜻에서 조카 일을 신고했던 거죠. 가장 큰 사건이라야 뭐 그 정도였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나쁜 짓 하는 친구들이 꽤 됐나 보다”고 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뭐가 나쁜 짓이죠? 그중 뭐가 더 나쁘고 덜 나쁜 거죠? 그 땐 공부 잘 하는 것말고 그 나머지는 뭐든 하면 다 나쁜 짓 아니었나요?
전 제 맘대로 살았을 뿐, 악하거나 누군가를 이용해 먹는 짓 같은 건 안 했어요. 물론 애들을 때리기도 하고 더 나쁜 짓도 해봤지만 대개는 이유가 있는 것이었죠. 한마디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 주변의 다른 녀석들도 비슷했다고 생각해요.”
이쯤 해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그는 “사실 이런 얘기를 지금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다”고 했다.
“지금 전 스타로 살고 있어요. 팬들은 무대 위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저를 알고 사랑하죠.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옛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게 무슨 도움이 될는지. 하지만 억지로 감추고 싶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현재니까요. 지금 잘 살면 되는 거죠.”
그때는 그때대로 최선을 다한 것 아니었느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그냥 산 거지요.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래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끝도 없이 구르고 또 구르고. 누군가는 제 경우를 두고 ‘그런 과거가 있었으니 오늘의 당신이 있는 것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전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서 무슨 춤의 핵심 같은 게 흘러나온다고 생각지도 않고요. 따지고 보면 제 개인적 경험이나 감정이 춤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아요. 발레의 밑바탕이란 결국 첫째도 연습, 둘째도 연습이니까요.”
하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현재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둘 사이를 연역적 관계로 파악하고 싶어하지 않는 건 발레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너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의 삶을 진심으로 ‘진짜 삶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부산서중을 졸업한 이원국은 부산동명공고에 입학했다. 공고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 대학 갈 희망을 버린 때문이었다.
“중학교 졸업반 무렵에는 나름대로 맘 잡고 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선택하려다 보니, 인문계로 가봤자 도저히 대학은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또 ‘꼭 대학에 가야지’ 하는 목표의식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난 기술자로 가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생각과는 달리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전자과 학생이 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과의 ‘대표 주먹’이 됐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부산 고교 전체의 ‘퉁’이었던 대학생 형의 ‘보호’를 받게 됐다. ‘귀엽고 심부름 잘하고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퉁이 되려면 말 잘하고 주먹 잘 쓰고 보스 기질도 있어야 돼요. 전 그때 중간키 정도였는데 아마 제법 성깔이 있었나봐요. 그렇다고 뭐 대단한 일을 벌인 것도 아니어서, 말 그대로 경쟁자, 그러니까 화공과나 건축과 주먹들과 ‘맞짱을 뜨는’ 정도였달까. 그 방식도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워요.”
일단 붙을 상대를 정하면 가서 말한다.
“됐나?”
“됐다.”
미리 잡아놓은 날짜가 되면 양측 친구들이 죽 둘러서 구경하는 가운데 승자를 가린다. 대개 ‘선수’들은 속옷만 남기고 다 벗는다. 몇 번 투닥이다 보면 어느새 승부가 난다. 한 쪽에서 “니가 이겼다” 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면 지는 거다. 그도 많이 울어봤다고 했다.
“요즘 애들이 하는 식으로 살벌하게 싸우는 게 아니에요. 대개는 기선을 잡으면 이기거든요. 그러니 눈빛 세고 말 잘하는 녀석이 쌈도 잘하는 거죠.”
그는 당시 청소년 사회를 지배한 어떤 일탈과 폭력성은 ‘문화적 굶주림’에 기인한 바 크다 했다. “에너지는 넘치는데 달리 할 게 없잖아요. 그때 발레를 알았다면 곧 빠져들었을 거예요.”
어느새 고교 2학년이 됐다. 기술 한번 제대로 배워보겠다던 결심은 이미 흐지부지된 상황이었다. 부모는 그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했다. 아버지는 그를 불러다놓고 조용히 “뭐든 10년만 해라. 더 이상 혼내지 않겠다. 그렇다고 버린 자식이라 생각지도 않겠다. 그저 너 하고 싶은 일을 한번 맘껏 해보라”고 다독였다. “부모님도 아신 거죠. 이 고비를 피해갈 수 없다는 걸, 그냥 제 힘으로 넘겨야 한다는 걸….”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그야말로 몸으로 하는 일이면 안 해본 것 없이 다 건드려 봤다. 술집 웨이터, 떠돌이 장사꾼, 거간꾼….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넝마주이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건 3개월을 넘지 못했다. 이런저런 운동이나 취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꿈이 없었다. 어쩌면 정직하고 자존심 강한 그는 자기가 발견한 것이 아닌 ‘거짓 꿈’을 위해 억지스런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열아홉 살 때였다. 부산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조직’의 수하에서 일하게 됐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파라솔 장사 삐끼 노릇을 했다. 제 발로 간 것이 아니었다. ‘얼치기 양아치’ 노릇을 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프로 중의 프로’인 지인의 남동생에게 “사람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보기에 아들은 결코 그 길로 빠질 ‘재목’이 아니었다.
“두 달쯤 일했을 때 큰형님이 불러 갔더니 ‘너는 이 쪽이 아니다, 공부를 하든 뭘 하든 딴 데로 가라’고 하더군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두 말 없이 짐을 쌌어요. 어머니 바람대로 스스로 깨닫게 된 거죠. 그 쪽 세계 사람이 되려면 감정이나 감성을 엄청나게 자제해야 해요. 냉정하고 냉혹해야죠. 또 전 항상 혼자였는데 거기는 단체이며 조직 아닙니까. 어디 속하는 거 정말 싫어했거든요. 전 싫으면 안 해요. 하늘이 무너져도 안 해요.”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원국이 세상과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일 것이다. 이는 또한 그가 발레가 아닌 어떤 것과도 한 몸이 되기 어려웠던 까닭이기도 하다.
“싫은 일을 하나씩 밀쳐 놓으며 갈 데까지 가봤더니 더 이상 갈 데가 없더라고요. 도망칠 곳이 없었어요. 어쩌면 그래서 너무 힘든 순간에도 발레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몰라요. 이것까지 놓치고 나면 정말 제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잡은 것이 하필이면 이토록 생명 짧은 일이라니…. 그래서 더 다짐하죠. 내 삶을 완전히 불태워서라도 이것만은, 예술은 영원하다 했으니 어떻게든 이것만은, 순간의 예술이 영원이 되는 그 정점에 꼭 도달하고야 말겠다고.”
스무 살, 발레를 만나다
이원국을 발레로 인도한 이는 어머니였다. 스무 살. 여전히 공고 휴학생인, 이제 밖으로 떠도는 생활에조차 재미를 잃은 듯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어쩐지 너랑 맞을 것 같다”며 발레를 권했다.
“그 한해 전, 신문에 동아콩쿠르에서 대상 받은 한국무용 듀엣이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어머니가 춤추기를 권했지만 전 코방귀도 안 뀌었죠. 그런데 그때는 달랐어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였거든요. 비로소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이 스물에 도대체 이건 뭐 하자는 인생인가, 자포자기한 심정에 어디론가 도망치고만 싶었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뭐든 어머니가 원한다면 하자.”
부산 남천동에 있는 정금화발레연구소를 찾았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대학입시를 앞둔 여고생이었다. 남자는 당연히 그 한 사람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다녔어요. 착실하게, 규칙적으로 어딘가를 매일 간다는 게 중요했어요.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모습 보는 것도 좋았고. 물론 누가 알까봐 전전긍긍했죠. 처음에는 아버지한테도 비밀이었는 걸요.”
타이즈만 신고 연습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눈길을 둘 곳이 없어 애를 먹었다. 나이 먹어 굳은 관절과 근육도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슨을 시작한 지 한두 달쯤 됐을 때였을 거예요. 우연히 안소니 도엘이라는 세계적 발레리노의 공연 비디오를 보게 됐어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상상도 못한 테크닉에 아름답고 역동적인 동작. 바로 결심했어요. 나도 언젠가는 꼭 저런 춤을 추고야 말겠다….”
그는 “발레가 좋다는 감정보다는 어떤 돌파구를 발견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것으로 비로소 세상과 만날 수 있겠구나, 내게 어떤 고통을 줘도 좋다,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마….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비슷한 시기, 부산지역 한 무용가의 창작 발레에 출연하게 됐다. 발레리노 수가 워낙 적다 보니 이제 겨우 발모양이나 만들고 있을 그에게도 차례가 온 것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공연을 보러 왔고, 그가 발레리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자 또 한번 “무엇이건 10년만 해보라”는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인 아버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었다.
무섭고 맹렬한 연습이 시작됐다. 1987년 봄에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복학도 했다. 대학 무용과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수업만 끝나면 학원으로 달려와 자정까지 몸을 움직였다.
발레는 조기교육이 중요하다. 발레 특유의 동작을 아름답고 능숙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관절이 굳기 전, 그에 맞는 몸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앙 드오르, 즉 발뒤꿈치를 맞대고 발끝을 180도 밖으로 벌리는 동작 하나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 만도 8~9세부터 최소한 수년간 매일 체계적인 훈련과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이원국이 발레를 시작한 건 스무 살 때였다. 늦어도 보통 늦은 것이 아니다. 아니, 직업 무용수가 되기란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시점이었다.
“시작이 늦은 건 제게 가장 뼈아픈 지점이에요.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뼈를 유연하게 만들어준다는 얘기에 매일 식초를 들이키던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거 효과가 있는 것 같데요. 속은 쓰려 죽겠는데 안 되던 자세가 되기도 하더란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심리적인 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기만족, 뭐 그런 게 상승작용을 일으킨 거겠죠.”
그는 “왜 빨리 시작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이제는 (그 생각이) 친구 같다”고 했다. “그 외에도 저는 한계가 많은 발레리노예요. 외국 무용수들과 비교할 때 문화적으로 너무 뒤떨어진 환경에서 살았고, 그래서인지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지 않아요. 또 하나 절대 넘을 수 없는 게 언어 장벽이죠. 저도 러시아, 루마니아, 뉴욕 등지에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도 있어봤지만 원활한 소통에는 문제가 있어요.”
1987년 12월, 부산KBS 무용콩쿠르가 열렸다. 이원국은 여기 참가해 일반부 대상을 받았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이미 스물한 살이라 일반부 참가 자격이 충분했다. 힘이 좋다, 체격이 훌륭하다는 평이 뒤따랐다. 발레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 만이었다. 한양대 주최 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기도 했다.
모래주머니 차고 잠들던 날들
1988년, 이원국은 마침내 중앙대 무용과 학생이 됐다. 친구들보다 2년 늦은 출발이었지만 그에게는 벅찬 감동이었다.
“떠돌던 시절,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 화물차 조수로 일한 적이 있어요. 예술대가 속해 있는 중앙대 안성 캠퍼스 앞을 지날 일이 종종 있었죠.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부러움과 좌절감을 느끼곤 했어요. 대학생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겁니다. 행복했죠.”
다시 살인적인 훈련과 연습이 시작됐다.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즐거움은 모두 반납했다. 아침 6시 기상, 7시40분 학교 도착,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수업, 5시40분 서울행 버스에 올라 7시 발레학원 도착, 밤 10시경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식사를 하고 다시 자정까지 개인연습. 이것이 대학 4년 동안 그의 스케줄이었다. 수업시간에도 곧잘 빠져나와 무용실로 달려갔다. 발레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일단 눈앞의 목표는 동아콩쿠르나 신인콩쿠르의 대상 입상이었다. 그래야만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발레리노에게, 특히 그처럼 어른이 다 돼서야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에게 군대 생활 3년이란 곧 춤과의 절연을 뜻했다. ‘지성과 감성이 한참 성장할 나이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일만 반복하다가는 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어떻게 찾은 길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1학년 때 이원국이 입상에 실패하자 그의 입대를 늦추기 위해 동생이 먼저 군대에 갔다. 더욱 절박해진 그는 잠자는 시간에도 발목에 두른 모래주머니를 벗지 않았다. 아침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 있을 정도였다.
대학 2학년 시절이던 1989년. 마침내 동아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매스컴도 발레계도 난리가 났다. 발레 입문 4년 만에 그 상을 거머쥔 이는 일찍이 없었다. 스물셋. 그는 이미 프로였다.
“솔직히 희소가치 덕을 봤다고 생각해요. 발레리노가 워낙 없던 시절이니까. 그걸 너무 잘 알기에 사실은 책임감이 더 컸는지 몰라요. 내가 기준이다, 정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것 때문에 아주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이원국이 자신과 자신의 춤을 보호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자기중심주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만, 짓고 싶은 표정만 지었다. 그러다 보니 이리저리 부딪힐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옳다.”
“전 언제나 제 자신이 우선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처럼 맘껏 춤 출 수 없었을 거예요. 한국 사회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무용계도 상하관계, 조직생활, 그런 것들이 중요하거든요. 거기에 너무 얽매이면 자리를 잃어버리게 돼요. 전 파워싸움에서 한번도 밀려본 적이 없어요. 이기든지, 아니면 스스로 포기했죠. 타협은 안 해요. 예술하는 이들은 극단적인 편이지요. 왜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겠어요.”
이원국의 이런 면모를 두고 무용평론가 문애령씨는 ‘철저한 에고이스트’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 사회에는 철저한 에고이스트가 필요하다. 개성이 없고 정체성이 없고 불안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자신감 있게 길을 개척하는 사람은 위험해질 수가 있다. 물론 에고이스트는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혹시 알더라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대신에 동네잔치의 중심에 서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원국은 지금 ‘동네잔치’의 분명한 중심에 서 있다. 어쩌면 바로 그런 에고이스트적 면모가 그를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서른서너 살 때까지는 싫은 후배나 선생과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뭐랄까, 상대를 차갑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랄까. 발레는 의외로 사고나 공연 중 실수가 많을 수 있는 분야거든요. 돌발상황이 많아요. 그러니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죠. 어떤 ‘독기’까지 품어야 할 때도 있어요. 공연 전 쓸데없는 농담이나 꼭 필요치 않은 말로 호들갑 떠는 후배들을 보면 걱정스러워요. 그래서 어떤 때는 일부러 파트너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하죠. 그럼 눈빛이 확실히 달라지니까.”
그는 “성품, 자세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했다. 춤을 추다 보면 손가락 끝에서까지 성품이 배어 나온다는 것. 그가 수도사처럼 건조한 삶을 택한 것도, 춤추는 그 순간에 완벽히 몰입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헌신인 듯했다.
대학 4학년 때부터 국립발레단 무대에 서기 시작한 그는 1992년 졸업과 함께 정식 단원이 됐다. 그러나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유니버설발레단으로 적을 옮긴다.
“저는 빨리 춤추고 싶은데,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기회가 오질 않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국립발레단은 공무원 사회 같은 면모가 있어서 실력만큼 서열이 중요했거든요. 전 늘 제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유니버설에서 주역 및 솔리스트로 오라 하기에 뒤돌아볼 것 없이 갔지요.”
3년 동안 유니버설발레단 주역으로 활동한 그는 1997년,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다. 외국인 예술감독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청소년 시절도 그렇고, 다소 충동적인 성격 아니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원하는 대로만 살려 했으니 충동적이 됐겠지요. 그럼 어떻게 발레는 17년 동안이나 계속해왔느냐,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냐. 그건 제게 새삼스레 대단한 인내력 같은 게 생겨서가 아니라, 발레란 예술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고 충동적이기 때문이에요. 그 미묘한 맛, 예측불가능한 측면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순간이라 더 강렬하고, (무용수로서의) 수명이 짧아 더 절실하다 할까요. 발레리나들 다이어트 하는 것 보면 눈물겹죠. 남자건 여자건 발레는 참 많은 희생을 요구해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건 무대에 선 그 순간의 지독한 황홀경 때문일 겝니다.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행복을 주거든요.”
그도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여행을 떠날까.
“아니요. 슬럼프라고 해서 연습을 쉬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몸이 힘들면 힘든 대로, 맘이 힘들면 또 힘든 대로 더 열심히 움직여야죠. 발레는 몸과 마음의 예술입니다. 슬럼프에 젖어버리면 좋은 춤을 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 지금 슬럼프요’ 하고 티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별로예요. 연습 시간에 입 벌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전 하소연이나 의논이나 그런 걸 해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언제나 저 혼자라고 생각해왔으니까.”
이원국은 갈데 없는 부산 사내다. 말을 아끼고 크게 웃지 않으며 감정 표현도 덤덤한 편이다. 그런 그가 섬세함 그 자체인 발레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예요. 지금도 가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니까. 상황에 따라 파트너의 눈을 깊이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는데 그걸 잘 못하겠어요. 물론 무대에 서면 달라지지요.”
그는 여자가 “나 사랑해요?” 하고 물으면 “미쳤나!” 하고 답하는 게 부산 남자라며 “처음에는 손 하나 뻗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제는 그 보이지 않는 막이랄까 편견 같은 걸 많이 걷어냈어요. 무뚝뚝함도 또 하나의 감정 표현일 뿐이며,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무감성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도 얻었죠.”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또 아름다운 여성들 속에 ‘파묻혀’ 사는 발레리노는 여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죠. 춤을 추다 보면 손이고 몸이고 안 닿는 데가 없는데, 거기 신경 팔리면 정말 아무것도 못해요. 서로 무감각해져야죠.”
하지만 발레리나건 발레리노건 여성미 혹은 남성미의 극치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고통 속에 밀어넣는 프로들 아닌가.
“물론 어떤 작품을 올린다, 거기서 누군가와 파트너가 되면 그 기간만큼은 정말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려고 애를 쓰죠. 춤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작품이 끝나면 친밀감도 낮아지게 마련이죠.”
발레리노들은 타이즈 안에 댄스벨트라는 것을 입는다. 중요부위를 보호하면서 또한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그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여성 관객의 호응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물론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에서 꽤 흔한 일이다.
절박한 바람 “마흔까지 추고 싶다”
이원국은 “발레는 순간이며 한계가 분명한 예술이기에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정말 절박하거든요. 발레리노나 발레리나처럼 나이의 한계를 절감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시간과의 끝없는 싸움인 거죠.”
요즘 그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도 ‘과연 언제, 어떻게 물러나야 할 것인가’이다. 이미 대한민국 최고령 발레리노. ‘원로’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연륜이다.
“누가 ‘어, 이 친구 아직 춤추네’ 하는 말을 하면 한 대 때려주고 싶어요. 지금 제 목표는 오직 마흔까지 춤추는 거예요.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도 그의 일과는 대학시절 못지 않게 빡빡하다. 6시30분~7시30분에 아침을 시작해, 9~12시는 수업, 12~4시는 리허설, 이때야 겨우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6~8시 다시 연습, 30분 쉬고 10~12시 또 연습. 이런 정도의 스케줄을 거의 매일 소화해낸다.
“하지만 이젠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어릴 때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했죠. 지금은 ‘자기 확신’이에요. 존재 자체에 대한 자신감이랄까. 컨디션이 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 자아가 컨디션, 부상 공포, 실수에 대한 두려움까지를 컨트롤하는 거죠. 최선을 다 하되 다 하지 않는 것, 관객에게 최선의 것을 선사하기 위해 20%의 여유를 남겨놓는 지혜도 터득하게 됐어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힘이 안 들지요.”
지난해 이원국은 국립발레단 연수단원인 장윤미씨(25)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한 달 전 첫아이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문득문득 ‘이제 어른들 말씀에도 귀 기울여야지, 너무 차갑고 괴팍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한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에 발레를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옹졸하다, 남 배려할 줄 모른다는 소리 듣는 거 저도 싫죠. 하지만 그게 제 삶에서 정말 중요한 무엇일까요. 제 삶의 모든 것은 결국 오늘의 나, 오늘 나의 춤으로 결판나는 거잖아요. 그 총체성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빛을 잃고 말죠. 아마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살 거예요. 내일 죽지 않으면 다행이란 심정으로, 매순간 순간을 안타깝고 절박하게. 아직 저 초보단계에 있습니다. 더 세게 살아볼 작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