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땀 흘리고 농사지으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온 사람. 20대 시절 책에서 얻은 생각을 평생 순결하게 지켜온 사람. 은둔 철학자, 박영호. “모든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온다”고 설파하는 그는 평생을 바친 다석사상의 최고 권위자로 우뚝 섰다.
“고독할 때 외로울 고(孤)가 아들 자(子) 변에 외과자(瓜)가 들어가지요? 영어의 멜론(melon)도 me 뒤의 lon이 외롭다(lone)는 뜻이지요? 우리말 ‘참외’ 의 ‘-외’도 외롭다는 뜻 아닐까요? 그게 왜 그럴까 생각해본 일 있습니까?”
바싹 다가앉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갖기는커녕 숱하게 그 단어를 발음하면서도 거기 주목해본 적이 없다. 참‘외’와 메‘LONE’과 고독할 ‘孤’에 나오는 ‘瓜’라!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참외밭을 유심히 뒤적거려봤습니다. 그랬더니 참외는 한 덩굴에 하나씩만 열리더군요. 참외 하나에 이파리 하나가 이렇게 덮여 있어요. 개체는 외로운 거죠. 단독자인 인간도 태어나면서부터 참외처럼 고독할 수밖에 없어요. 전체인 ‘한아님’이 내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고독하지 않게 되는 거지요”
여윈 몸매에 형형한 눈매를 지닌 박영호(朴永浩·72) 선생을 만났다. 지치는 낯빛 없이 일곱 시간을 이야기했다. 일어서 보니 시간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흘러가 있었다. 그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의 두 명뿐인 제자 중 한 분이다. 김흥호 교수가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강의했다면 그는 스승의 뜻대로 오로지 이마에 땀 흘리고 농사짓는 삶을 살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왔으니 유일한 제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 다석 선생에게 ‘마침보람’이라 적힌 봉함엽서를 받은 적도 있으니 일종의 졸업증서를 수여받은 셈이다. 그걸 받은 사람은 이제껏 박영호가 유일하다니 하나뿐인 제자라고 말해도 과장된 건 아닐 거다.
“다석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일원다교(一元多敎)라고나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다석 선생은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알려지기를 원치도 않았다. 그저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지만 독특한 신관(神觀)과 인생관을 가진 철학자로 사후에야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함석헌 사상은 그저 다석의 갈비뼈 하나를 풀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 사이의 통설이라 한다.
“‘오똑앉을 궤’라는 글자가 있어요. 발족(足) 위에 위험할 위(危)자를 쓰는 글자인데…. 서울 구기동 집으로 다석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그런 자세로 앉아 계셨어요. 수행법의 하나죠. 52세 되던 해 널을 한 감 짜서 널 밑판(그러니까 칠성판이죠)을 깔고 그런 식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전에 힘을 주고 앉아 계셨어요. 우리는 선생님 앞에 30분만 마주앉아 있어도 몸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죠. 하루 일식만 하시고 널 위에서 주무시고 가족들 모아놓고 해혼을 선언하셨죠. 해혼요? 결혼의 반대죠. 맺을 결(結)이 아니라 풀해(解)자 해혼. 동거는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진 않는다는 뜻이에요.”
톨스토이로 맺은 인연
그럼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어찌 만나 제자가 되었나? 역시 6·25전쟁이 거기 가로놓여 있다. 이야기는 절실하고 핍진(逼眞)하고 뜨거웠다.
“우리집은 대구 팔공산 너머 마을인데 6·25전쟁 때 격전지였어요. 안동, 의성, 대구가 전선의 마지막 라인이었잖습니까. 낙동강전투가 고향마을을 중심으로 벌어져 한 달을 밀고 밀리면서 싸웠으니 주변이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였어요. 인민군과 국군의 시체가 서로 섞여 썩느라 냄새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인민군은 노새에다 보급품을 실어 날랐거든요. 제공권을 뺏겼으니 비행기로는 물자를 실어 나를 수가 없어 그랬겠지요. 그 노새가 숱하게 죽어나자빠져서 또 다른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요.”
눈앞에서 즉결처분하는 것도 수시로 목격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 공업학교에 다니다 말고 헌병대에 배속되어 장총을 하나 얻어 메고 군복을 얻어 입었다. 근방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군인들의 가이드 노릇을 했다. 죽이는 사람과 죽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그는 신경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오열(五列·간첩)이 넘어왔어요. 헌병은 쫓아오고 오열은 도망가는데 더는 갈 데가 없으니까 우물 안으로 들어가버려요. 거기다 총을 갈기니 우물이 온통….”
그런 장면이 떠올라 밤이 돼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이 무슨 투시경이 된 듯 사람이 걸어다니면 그 안에 든 해골이 훤하게 보였다.
“버스를 타면 그 안에도 해골들이 죽 앉아 있는 겁니다. 겁은 나고 잠은 오지 않으니 디립다 책만 읽어제꼈어요. 당시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가 유행했는데 그건 아무 소용없었고,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으면서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 걸 느꼈습니다. 톨스토이가 50세에 우울증을 앓았는데, 거기에 자살하게 될까봐 총도 치우고 노끈도 치우는 장면이 나와요. 그럴 때 하느님만 찾으면 평화를 얻는 걸 보고, ‘아,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처음 알게 됐지요.”
톨스토이 전집을 몽땅 구해 읽었다. 소설보다 50세 이후에 쓴 ‘예술론’ ‘인생론’ ‘우리가 어찌할꼬’ 같은 글들이 좋았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나니 어떤 관점이 생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톨스토이안이 된 것이다. 특별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일부러 찾아가보았다. 마침 그때 부산 피난지에서 발간되던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었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함 선생도 톨스토이안인 걸 금방 알겠더군요. 요즘 말로 하면 ‘코드’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석헌 선생의 주소를 알고 싶다고 사상계에 편지를 썼지요. 답장이 왔더군요. 잊지도 않아요. 그 주소! 원효로 4가 70번지. 물론 함 선생에게 다시 편지를 썼지요. 나는 톨스토이 영향으로 일생 농사짓고 살려는 사람이다. 한번 만나고 싶다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숭배
박영호 선생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디테일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함 선생을 처음 만난 식당 이름, 먹은 음식, 오갔던 말들을 50년이 넘도록 그는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 날 대구 YMCA에 강의하러 내려가니 그때 만나자는 답장이 왔어요. 서두에 ‘나도 톨스토이 영향 받은, 작은 한 사람이다’라고 쓰셨더군요.”
대구에 가서 함 선생을 만나 강연을 듣고 다음 목적지인 대구보육원까지 따라갔다.
“보육원에서 함 선생을 아주 잘 대접합디다. 전쟁 직후인데 신선로가 나왔어요. 나는 그날 신선로라는 음식을 처음 봤어요. 침대에서도 처음 자봤고. 함 선생이 두루마기를 벗을 때 보니까 양가죽 조끼를 입고 계시데요. 그날 다석 선생님 이름을 처음 들었지요. 공경 경자(敬)를 말하는데 그게 구차할 구자 옆에 씌어 있다면서 구차함 속에서 공경이 나온다는 얘기 중이었던 것 같아요. 함 선생이 그날 내게 ‘톨스토이처럼 농사지으며 공부하는 공동체 생활을 해보고 싶은데 농장이 마련되면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어요.”
마산요양소로 가는 함 선생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40~50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강원도 평창 산꼭대기에 땅이 500마지기가 났다는 소식도 오고, 가봤더니 추워서 안 되겠노라는 연락도 왔다. 마침내 중앙신학대학에서 구내 이발소 하는 사람이 충남 천안에 있는 땅을 함 선생께 내놓았다는 편지가 왔다. 그 땅에 과수를 심었는데 거름 줄 일손이 필요하다, 똥 풀 사람은 박영호밖에 없다, 그러니 하루빨리 오라고 했다.
“아주 기뻤어요.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살러가는 벅찬 걸음인데 어찌 방자하게 차를 타고 갈 수 있겠나 싶데요. 한 걸음씩 걸어서 가기로 작정했어요. 마침 그때 함 선생님이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 산다’란 글을 발표하신 게 있었어요. 정치적 혁명을 하자면 난리 나니까 그 말은 않고 정신적 혁명을 해야 한다는 글이었는데, 굉장한 암시를 담고 있어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한 내용이죠. 그걸 복사해서 가방에 한아름 넣었어요. 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거 한 부씩 나눠주는 거예요.
구미 지나 안동 지나 문경으로 올라갔죠. 막 문경시멘트 공장이 생겼더군요. 충주 달천을 지날 때는 일부러 임경업 장군 사당을 찾아가 하룻밤 묵었어요. 함 선생님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임경업 장군을 크게 칭찬한 걸 읽었거든요. 집을 나선 지 일주일 만에 천안에 도착했어요. 거지꼴이 돼서 선생 계신 곳을 찾았더니 마당가 위에서 주무시다가 반기며 일어나시더군요.”
이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숭배가 있나. 그 시절은 비할 데 없이 행복했다. 중앙신학대학 학생이 몇 와 있어 농장 식구가 다섯쯤 됐다. 강당에 모여 같이 기도하고 찬송했다. 성경과 톨스토이와 사서삼경과 고문진보와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했다. 물론 주된 일은 천안 시내까지 달구지를 끌고 가서 똥을 퍼오고 발이 세 개인 이북식 호미로 간작한 고구마 밭을 매는 농사일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뿌듯하고 충만했다.
“소낙비가 올 때 밭을 매면 마음이 급해지잖아요. 입은 다물고 호미질만 급히 하노라면 흐린 하늘 아래 호미소리만 들리죠. 선생님이 문득 호미를 멈추고 ‘들어봐라,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음악소리 아니냐’ 하신 적도 있었죠.”
벅차게 살았다 한들 외로움이야 왜 없었을까. 똥을 담은 지게를 지고 천안시내를 걸어오면 눈앞으로 교복 입은 여고생이 지나가곤 했다. 눈물이 푹 솟는 날도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싶기도 했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에고(ego·자아)를 죽이는 것이잖아요. 기독교의 ‘날 버려라’, 불교의 고집멸도(苦潗滅道), 공자의 극기(克己), 노자의 무사(無私)가 다 에고를 죽이라는 말인데 나는 천안농장에서 어지간히 그 연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려면 에고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에고는 거짓 나죠. 그게 죽는 자리에 참나가 들어서는 겁니다. 천안역 앞에서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거지가 천사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손이 하늘나라 시민증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손을 내밀면 천국시민이고 외면하면 아닌 거죠. 김용옥은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면서 큰 가르침을 얻은 거예요.”
함 선생은 금요일엔 서울로 갔다. 자신의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다. 함 선생만 해도 그에게는 하늘 같은데, 그 선생님의 선생님은 도대체 누굴까 싶었다. 그때 다석 선생은 매주 금요일 서울 YMCA에서 기독교 사상을 강의하고 있었다.
“성도 안 붙이고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해요. 유 선생님이라고 하면 유달영 선생인 거지…. 함 선생님이 ‘일주일에 우리 선생님만치 정신생산 하시는 분은 역사상 드물 거라’고 하시는데 그 분이 누군지 늘 궁금했지요.”
함석헌과의 결별과 재회
그 무렵 함석헌 선생은 서울시경에 붙잡혀 갔다. 사상계 6·25 특집 칼럼으로 ‘평화통일을 하자, 이북과 화해를 해야지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된다. 북한동포가 남으로 내려올 때 총이나 쐈지 얼싸안은 사람 한 명이라도 있느냐, 사람 죽인 게 무슨 자랑이라고 훈장을 달고 그러느냐’는 요지의 글을 썼으니, 당시로서는 뒤집어질 소리였다. 농장 식구들도 가까이 있던 특무대에 다들 잡혀갔다.
“우리 함 선생님이 신의주 학생 의거에 참여했다 소련군으로부터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니 김일성 뱃속에 집어넣다 꺼내도 빨갛게는 안 될 사람인데 간첩으로 의심한다니 말이 되냐고, 평화통일 하자는 게 선각자적 소리지 자꾸 싸우자고 해야 되는 거냐고 막 따졌지요. 정 의심스러우면 내가 지금까지 써온 농장일지가 있으니 조사해보라고 했더니 일지만 받고 우린 풀어주더군요.
함 선생 별명이 ‘글쎄요’였어요. 암만 확실해도 ‘글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지, 글처럼 절대 힘차고 결연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조봉암이 함 선생께 도와달라고 찾아왔더래요. 함 선생이 거절했답디다. ‘조봉암 사건이 터졌을 때 가담했으면 나도 죽었을 걸’ 하시던 게 기억나요.”
대구형무소에서 탈옥한 죄수 강오원도 잊을 수 없다.
“다섯 겹 형무소 담을 뛰어넘은 사람인데, 그의 변이 ‘한국은 스케일이 너무 좁아 도망갈 데도 없더라. 만주벌판 같았으면 내가 마구 날아다녔을 텐데…’였거든요. 함 선생이 그 뉴스를 듣고는 ‘우리, 대구로 강오원이 면회 한번 갈까’ 하시는 겁니다. ‘이성계 그릇이 강오원이보다 못하니까 만주를 뺏겼지’ 하고 안타까워하시면서….”
농장에서 3년을 땀 흘리며 신성하게 살았다. 그때쯤 순결한 청년 박영호의 귀에 스승 함석헌의 스캔들이 들려왔다. 상상하기도 싫은 소문이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조차 인정하기 싫었어요. 너무 어려서 그랬겠지요. 스캔들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어느 날 밤 남들 잠든 후에 선생님 방에 찾아가서 물었죠. 사실이냐고?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한참 입을 다물고 계시더니 선생이 사실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는 집안 고모하고도 내외하는 법도를 지키던 사람인데 한번 여자하고 사귀니까 사타구니가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겠더라’ 그러면서 ‘너는 나처럼 되지 말고 비노바 바베(인도의 구도자)처럼 되라’ 하시더군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 선생이 오직 하나의 님이었는데 그 님이 무너져버렸으니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 후부터는 선생이 무슨 말을 해도 교회식으로 말해서 은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말할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선생을 너무 우상화했던 게 문제였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함 선생 곁을 떠났다. 공식 모임에서는 가끔 만났지만 개인적인 대화는 싹 끊었다. 그가 함 선생과 화해한 것은 함 선생이 임종하기 직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무렵이었다. 함 선생은 다석 선생의 한시를 박영호가 해설한 책 ‘씨알의 말씀’에 꼭 서문을 써주고 싶어 했다. 병이 위중해지는 와중에도 퇴원하면 그것부터 쓰겠다고 하더니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함 선생을 떠난 그는 고향에 내려가서 천안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금요일이면 예전 함 선생이 하던 대로 YMCA에 나가 유영모 선생 강의를 들었다. 그걸 들을 목적으로 서울에 온 셈이었다. 일은 물론 농사였다.
“십계명보다 땀 흘리는 노동이 먼저라고 톨스토이가 말했거든요. 양심적으로 참되게 살아야 하는데 농사를 안 짓고 어찌 참되게 살 수 있겠나 싶었지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다’
다석은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따로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 3대 무식할 각오하고 농사지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직접 북한산 비봉 아래 구기동 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집으로 찾아가면 널판 위에 곧추 앉아 한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1955년에 YMCA에서 처음 선생님을 뵙고 댁으로 갔을 때 대뜸 하시는 말씀이 ‘생각이 나느냐?’였어요.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난다’고 했더니 ‘그러면 됐다’고 하셔요. 선생님은 누구를 만나든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이런 건 절대 물어보는 법이 없어요. 대신 하느님하고 영통(靈通)하는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인 ‘생각’이 나느냐고 물으셨지요.”
박영호 선생은 경기도 의왕 변두리에 자그만 집을 얻어 30년 가까이 책 읽고 글쓰며 살아왔다.
그의 집과 논은 시흥에 있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시흥이 서울에 편입된다고 하자 그는 서울시민이 되는 것이 싫어 경기도 의왕으로 농장을 옮긴다. 값이 싸서 땅을 좀더 넓힐 수 있었다. 삽을 여러 개 부러뜨려가면서 논밭 6000평을 개간한다. 농사짓는 짬짬이 책을 읽고 유영모 선생 강의를 듣고 집에 찾아가 다시 말씀을 듣는 나날이었다. 1965년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기동에 갔더니 선생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제 날 찾아올 생각이 안 나야 되고, 편지할 생각도 안 나야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씨앗이 뭉쳐 있는 것보다 땅에 흩뿌려져야 하는데, 이젠 혼자 독립해서 살아보라는 거였어요. ‘나는 8자를 좋아한다’고도 하셔요. 자꾸 갈라질 수 있는 숫자라서 좋아하신다는 거죠. 날더러 박형이라고도 하고 박 선생이라고도 했는데, ‘이젠 박 선생이 혼자 생산해서 살아가라’는 거였어요. 충격이었죠. 두말도 않고 돌아 나왔어요. 나오는데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요. 이젠 집앞을 지나가셔도 쳐다도 안 보겠다 결심하고 집에 와 생각하니 선생님이 옳은 것 같아요.
이를 악물고 5년간 혼자 생활했지요. 처음에는 막막해서 선생님 말씀이 그립기 짝이 없었으나, 나 혼자뿐이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요. 자가생산을 해야 하는 거였지요. 함석헌 선생이 늘 ‘지음이 먹음이다’고 하셨거든요.”
물질 생산도 그렇지만 정신 생산도 자기 창작이 자기 양식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석 선생과 ‘단사’를 경험하고 혼자 제 생각을 기록한 것이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이다.
새 시대의 신앙은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선언한 책이다. 1. 미에서 선에서 진으로, 2. 역(力)에서 지(知)에서 신(信)으로, 3. 부(父)에서 사(師)에서 천(天)으로!
“1번은 서양철학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인데 파스칼의 팡세 맨 끝에 정리되어 나오죠. 2번은 나중에 알고 보니 키에르케고르도 그런 소리를 했더라고요. 3번만이 내가 독창적으로 생각한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무렵 아내가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책이 나온 걸 기뻐해서 문병 오는 사람에게 한 권씩 나눠주던 아내였다. 힘들었다. 바깥과는 단절하고 집안에서 지냈다. 다석 선생이 풍문에 소식을 듣고는 한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봄에 못자리 할 무렵에 사람이 와 추석 때 구기동으로 찾아갔어요. 냉수마찰하신다고 하며 웃으시는 걸 보니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5년 만에 굉장히 늙으신 거지요. ‘나는 은혜라는 말은 싫으니 힘입어서 잘 사시오’ 하셔요. 축복이지요. 그렇게 고별인사를 하시려고 날 부르신 거였습니다. 내 책을 이미 읽으셨어요. 장하다고 칭찬하시고는 ‘합(合)’과 ‘동(同)’을 혼동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셨어요. 합은 형이상학을 말할 때, 동은 형이하학을 말할 때 구분해서 쓰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선생님과 정식으로 단사를 했습니다. 5년 전엔 그냥 나왔는데 정식으로 큰절을 올리고 물러났어요.”
이번에는 감개무량했다. 정신적 독립을 인정받은 것이다. 집에 왔더니 그 봉함엽서, ‘마침보람’이라 적힌 졸업증서가 우편으로 배달돼 있었다. 다석 유영모 제자 박영호로 인가가 난 것이다.
“토인비는 어려서부터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해서 시상이 영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떠오른다지요. 선생님도 한문에 능통하셔서 시상이 한문으로 떠오르는 분이시죠. 그러나 웬만하면 한자를 안 쓰셨어요. 우리말을 찾아 쓰거나 없으면 만들어 쓰셨죠. ‘마침보람’도 그렇게 만든 말이었고 ‘한님’도 ‘씨알’도 다 선생님만의 조어였어요.”
유영모는 한아님을 한님이라고 썼다. 란 지극한 우(上)란 뜻으로 ‘님을 머리우에 인다’는 말이다. 임(任)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아님을 머리 위에 이고 설 때 사람은 실존하는 단독자가 되고, 뼈가 시린 단독자가 된 후에야 제 안의 한아님을 깨닫게 된다고 가르쳤다. 예수도 석가도 키에르케고르도 맹자도 공자도 진공 속 같은 외톨이가 되고 난 후 비로소 자기 안의 큰 힘을 발견해낸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오산학교에서 쫓겨나다
유영모는 서당에서 맹자를 배우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맹자를 팽개치고 당시 애국지사들이 몰려들던 YMCA로 달려온다. 1890년생이니 만 15세였다.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이던 김정식의 권유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고 경신학교에 다닌다.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정주 오산학교 선생으로 갈 때까지 그는 정통 기독교인이었다.
오산학교에는 이미 춘원 이광수가 와 있었고 단재 신채호, 신간회 멤버이던 여준 선생도 교사로 있었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학생들에게 기독교뿐 아니라 불경과 노자, 장자를 가르쳤다. 성경은 톨스토이가 4복음의 기적 부분은 다 빼고 한 권으로 만든 이른바 톨스토이 복음을 가르쳤다. 곧 남강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됐고, 이어서 학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선교사는 오산학교 안에 이상한 기류가 번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정통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사들을 다 내쫓아버린다.
“다석이 오산을 떠날 땐 이미 비정통으로 돌아선 후였어요. 그걸 오산의 아이러니라고 하죠. 춘원도 쫓겨났죠. 바이칼을 거쳐 나중에 서울로 왔지요. 함석헌은 그때 오산학교 3학년 학생이었어요.”
다석에겐 3남1녀가 있는데 자식을 제도교육의 질서 속에 집어넣지 않았다. 많이 배우면 착취나 일삼는 귀족이 되어 씨알(民) 앞에 거들먹거릴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매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재산을 움켜쥐는 것은 더욱 금했다.
“사모님이 순종형인데, 두 가지만은 선생님께 항의했대요. 하나는 아이들을 공부는 안 시키고 농사일만 시킨 점이고 또 하나는 천안광덕에 있던 과원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냥 농사짓던 사람에게 줘버린 거라지요.”
그러나 큰아들 유의상씨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영역하고 6·25전쟁 때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통역관을 지내다 휴전회담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그 현장에 참여한 인재가 됐다.
無, 空, 靈이신 한아님
다석의 훌륭함은 중국고전, 서양사상, 불경, 인도철학, 베다경전에 두루 능통했고 생활 속에서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는 점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신관(神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다석의 신관, 나아가 함석헌과 박영호의 신관에 나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한심한 질문에도 그는 맹렬한 열의로 대답해줬다.
“지금까지 말한 게 다 소용없네, 아이구 답답해” 하면서도 스승이 말한 한아님, 자신이 찾아낸 ‘참나’를 이런저런 비유로 알려주기 위해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은사(隱士) 유영모는 제 손꼴을 노트에 베낀 후 ‘무명소자(無名小子) 되와 세 가지 걸림 없이 영원히 아버지께 이루어지이다’라고 썼다.
다음은 거기에 대한 박영호의 해설이다.
“세 가지 걸림이란 엄지가 상징하는 밥(富), 검지가 상징하는 힘(貴), 중지가 상징하는 빛(名)이다. 이 세 가지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세 가지가 뿜어내는 행복이란 신기루에 홀려 인생을 갈팡질팡 헤매게 된다. 뒤늦게 마음의 눈을 떠 뉘우쳤을 때는 때가 이미 늦다. 이 셋을 잡고자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만시지탄을 토하기를 ‘원래 세계엔 두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정신과 칼이 그것이다. 긴 눈으로 보면 칼은 반드시 정신에 굴복한다’고 했다. 마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이다.…(중략)…
46억년 동안 다듬어온 지구에 300만년 전에 유인원이 나타났다. 2000년 전에는 손(手)이 나타나서 (절대)을 가리켰다. 은 그대로 한아님을 일컫는다. 중국에서도 상제(上帝)라 하고 일본에서도 우에(上)를 신(神)이라고 읽는다. 을 가리킨 손은 검지인 예수를 비롯하여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다. 그 다섯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인 틈은 손가락 사이의 뜨임(距離)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손이 가리킨 이 생명의 뿌리요 목적이요 가치인 아버지 한아님(天)이요 니르바나(Nirvana)요 브라흐마(梵)요 자연(自然)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다섯 손가락)이 가리키는 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매달리는 사람일수록 손가락에 대한 시비가 많다. 다섯 손가락이 똑같지 않고 다 다르듯 예수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는 다 다르다. 그러나 가리키는 곳은 한곳이다. 무(無)이고 빔(空)이고 얼(靈)이신 한아님이다.”
독보적인 다석사상
이것이 바로 스승 유영모와 제자 박영호의 신관이다. 보수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어느 종교든 결국 다 같다는 것이니 다원주의니 혼합종교니 하며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종교계 내부에서도 서서히 그들의 생각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얼마 전엔 다석학회가 만들어졌다. 서강대에서 쫓겨난 정양모 신부는 “3000명 가톨릭 신부 중에서 1%쯤은 이런 소리를 해도 괜찮아요” 하면서 드러내놓고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있고, 에든버러대에서 다석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명우 목사, 버킹엄대에서 해석학적 다석사상으로 학위를 딴 윤정현 성공회 신부도 있고, 감신대의 오정숙 교수도 다석사상으로 박사가 됐다. 석사논문은 그보다 많아 20편이 좀 넘는다.
“한국외대 철학과의 이기상 교수는 우리 철학을 하신 분을 찾아 박종홍, 김지하, 함석헌을 연구했는데, 그중에서 다석 선생님이 월등하다고 그래요. 왜냐면 인간 정신의 경지는 무엇보다 신관(神觀)이 뚜렷해야 하는데, 그 점에선 다석 선생이 독보적이라는 거지요. 그 다음엔 인성(人性)에 대한 관점이 확고해야 하는데 다석 선생은 세계적인 사상가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합디다.”
격렬한 그의 글을 한 구절만 더 읽자. 비슷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 부분이다. “얼(靈)을 객관적으로 나타낸 것이 참(진리)이다. 얼을 인격적으로 나타낸 것이 독생자다. 얼을 윤리적으로 말한 것이 한아님 아들이다. 얼을 사회적으로 말한 것이 그리스도다. 일요일에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고 설교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얼을 위하여 몸이 희생하는 것이 참예배다.
몸은 죽지만 얼은 죽지 않는다. 몸은 상대세계에 있지만 얼은 절대세계에 있다. 상대계의 존재에게는 복귀(復歸), 복명이 중요하다. 절대계에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한아님 아버지께 돌아간다, 석가가 니르바나로 돌아간다, 노자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만 다르지 똑같이 절대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상대계에서 빌린 몸은 돌려주고 절대계에서 받은 얼(불성, 도)만이 돌아간다. 실은 돌아간다는 것도 상대적 존재인 몸이 부스러져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절대인 얼이 오고가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간 공간 인간을 초월한 절대가 가고 오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지금껏 스승 다석 유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왔다. 다석 전기 두 권과 다석사상 정해인 ‘씨알의 말씀’과 다석 한시 풀이와 시조 해설집을 쉬지 않고 써서 스승을 세간에 알렸다.
“선생님에 관한 자료가 망실될 것이 두려워 내가 선생의 둘째아드님 자상씨에게 나중 누구든 선생님 전기를 쓸 수 있게 자료를 모아둬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함석헌 선생님은 평소 강연 중에도 당신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다석 선생은 YMCA 연경반 강의 때도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 했거든요.
다석 선생의 큰 제자인 함석헌 선생이나 김흥호 교수나 감히 선생님 전기에 대해선 어려워서 말을 못 꺼내고 있었어요. 나는 나이도 어리고 시간여유도 있고 해서 말을 꺼냈던 것인데, 그 편지를 자상씨가 아버님께 보여드렸고 선생님은 또 그걸 김흥호 교수에게 보인 모양이에요. 서울시청 속기사에게 의뢰해 연경반 강의를 속기해둔 자료가 있었는데 김흥호 교수가 그걸 한 짐 지고와 ‘다 도와줄 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줬지요.”
스승을 한 걸음 앞섰나
그리고 3월13일 (유영모와 함석헌은 생일이 같다. 돌아간 날은 하루 차이다.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아놓는 바람에 함 선생이 하루를 더 산 거라고 여기고 있단다) 선생 생신에 구기동에 가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틈틈이 쫓아가 묻고 또 물었다. 다석의 일기를 빌려 필사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아나갔다.
‘선생이 읽은 책을 나도 독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금강경, 아함경, 논어, 맹자, 주역을 다시 읽었다. 1971년에 준비하기 시작한 다석전기는 1984년에 책으로 나왔다. 꼬박 13년이 걸린 작업이다.
“10년은 자료를 모았고 원고는 선생님 돌아가시던 1981년에 쓰기 시작했어요. 쓰는 데만 만 3년이 걸렸어요. 다석 사상은 굉장히 과학적인데 그러면서 신비해요. 다석 한시 해석을 읽은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다석이고 어디부터 박영호냐?’ 묻곤 하지요.”
내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생 스승에 매달려온 박영호는 다석을 한 걸음 앞서갔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만약 내가 부가가치를 붙인 게 있다면 보디(body)와 마인드(mind)와 솔(soul)을 구분하는 용어를 만든 것 정도일 겁니다. 보디와 마인드는 ‘몸나’와 ‘맘나’로 에고(ego)에 속한 거고, 솔(soul)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변치 않는 ‘참나’이고 ‘얼나’거든요. 인간은 원래 동물이지만 탐진치(貪瞋痴)가 없어지면 짐승냄새가 안 납니다. 내가 다석 선생께 그렇게 경도된 이유도 그분에게선 짐승냄새가 나지 않은 데 있지요. 요한복음 12장 2절에 나오는 ‘만백성을 거느리는 권능’이란 말도 제 마음속 탐진치를 거느린다는 소리예요. 예수가 12제자도 못 거느렸는데 무슨 만백성이 있었겠습니까. 한아님을 모르고는 도저히 부처님이 될 수 없어요. 금강경이 무슨 소리인지 막연하더니 축소판 팔만대장경을 다섯 번쯤 읽고 나니 니르바나가 곧 한아님이라는 걸 알겠더군요.”
예수나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대신 우리가 배울 건 예수나 석가의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젊어서 생긴 늑막염으로 기운을 쓰지 못해 그는 10·26이 나던 1979년 아쉽지만 농사를 접었다.
토지는 헐값에 화물기지로 수용되고 그 변두리 자그만 터에 집을 짓고 지금껏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았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아내의 제자였던 이와 재혼도 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않고 대개 집에서 책을 읽지만 일주일에 두 번은 외출한다. 수요일은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 곁의 베드로의 집에서, 화요일은 유달영 선생이 하는 서울 여의도 성천 아카데미에서 다석사상을 강의하며 제자를 기른다.
“다석 선생이 1910년부터 가지고 있던 신약성경을 1971년에 제게 주셨어요. 그 성경을 얼마 전 내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줬습니다. 아들에게 물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니 그분도 누군가 전해줄 사람을 만나면 나처럼 물려주는 거겠지요.
지금 한국 교회는 한아님이 오신다면 질색을 하게 변해버렸잖아요. 부처님도 절에 가보시면 ‘이거 내가 가르친 거 맞나’ 하고 깜짝 놀라실 걸요. 21세기의 혼란은 다석사상으로 충분히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다고 나는 믿어요.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시켜 놓으신 분이 다석 선생님이죠.”
삶의 완성은 ‘얼’과의 만남
크지 않은 체구의 그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20대에 책에서 얻은 생각을 평생 순결하게 지켜온 사람. 그도 이제 일흔이 넘었다. 삶의 목적과 완성은 저마다 제 마음속에 실존하는 참 생명인 ‘얼’을 만나는 것이라고 그는 거듭 말한다. ‘그 밖의 다른 일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허랑하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다들 ‘그 밖의 다른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참 나는 어디 있나? 참외처럼 외롭고 멜론처럼 고독한 단독자, 우리는 바로 지금 제 마음의 알갱이를 고요히 들여다봐야 한다.